먼저 양희은 콘서트의 오래된 농담 한 구절부터,
“어느 부인이 근사한 양장을 차려 입고 택시에 탔더래요. 꽃다발까지 한아름 들고 말이죠. 그러면서 택시 기사님한테 “아저씨… <전설의 고향> 가주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기사님이 놀라지도, 묻지고 않고 <예술의 전당>에 정확하게 데려다줬대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사람과 소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아니, 보다 노골적으로 물어본다면, 사람 간의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위해서 ‘말’과 ‘글’이 하는 역할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소통에 있어서 언어의 역할이라는 게 무척 제한적이라고 봅니다. 당장 저만 봐도 그래요. 정말 일생 통틀어 영어 과외, 영어 학원 한번 다닌 적 없고, 학창 시절에도 모든 종류의 교양 영어 수업을 C 이상 맞은 적이 없었지만, 영어권 사회에 이민 와서 20년째 그냥저냥 버텨내고 있잖아요? 게다가, 점점 고유명사가 기억 안 나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대화 중 종종 지시대명사를 섞어 대충 얼버무리게 되는데, 그걸 또 그럭저럭 알아먹고 앉아 있더라구요. 지난번에는 아내가 (정확한 워딩을 기억해내자면) “거기 지금 열었으려나?”라고 물어본 걸, 제가 인터넷으로 (아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가게 영업시간을 검색하고 있더라니까요.
물론, 언어를 통해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엄청나게 확장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훠얼씬 더 재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서, 또는 다른 여러 가지 간접 경험에 있어서, 언어가 담당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할 의도는 전혀 없어요. 단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부분, 혹은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려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 말빨이나 글빨이 독자적으로 가지는 힘이라는 게, 생각보다 참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사실 의사소통에 있어서 대단히 많은 부분이 ‘맥락 (Context)’과 ‘느낌 (Vibe)’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앞서 언급한 오래된 농담에 있어서도, 화사하게 차려입고 꽃다발까지 들고 탄 부인이라서 아무 의심도 없이 <예술의 전당>에 모셔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만일 하얀 소복을 입은 (그리고 꽃은 머리에 단) 부인이 <전설의 고향>에 가자고 했다면 기사님도 매우 당황하셨을 테니까요.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인터넷 메시징 서비스에 의존하는 요즘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의 반응을 눈으로 보지 못 하고 목소리톤을 못 듣는 상태에서의 대화, 때로는 이모티콘을 동원한 대화는 종종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아마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으실 거예요. 카톡 중에 내가 의미한 건 전혀 그게 아닌데 상대가 오해를 해서 갑자기 급발진하는 경우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카톡의 이모티콘이나 철자 하나 쓰는 데에도 나름 불문율이 생긴다고 합니다. 듣자 하니 ‘ㅋ’의 갯수에 따라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고들 하죠.
그렇더라 해도 역시, ‘언어’라는 건 역시 의사소통에 있어서 무언가를 ‘규정’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공포를 느낍니다). “에이.. 그걸 꼭 말을 해야 하능가..ㅎㅎㅎ” 하면서 수줍게 웃는 할아버지들에게 공개적으로 사랑고백을 하게 만드는 TV 방송들을 보고 있다 보면, ‘대화를 통해서만 확정적으로 전달되는 진심이 있다’라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죠. 뭐 사실,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서 ‘맥락’과 ‘느낌’에 너무 의존하여 ‘지레짐작’ 하는 것이 습관화되다 보면, 단순 오해를 넘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내 ‘지레짐작’이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는 항상 의심스럽고 말이죠 (물론 대화를 하고도 의심스러운 건 마찬가지이지만요). 그래서 많은 초보 연인들이 “우리 무슨 사이야?” 혹은 “오늘부터 1일”을 반복하면서 관계를 확정 짓는 것 아니겠어요?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 2021)
제작 / 배급 : Bitters End, C&I Entertainment, Drive My Car Production Committee
원작 :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 셰에라자드, 기노>
각본 / 감독 :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 히데코시 니시지마, 오카다 마사키, 미우라 토코, 키리시마 레이카
***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들에 대한 내용 스포일러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치정극을 즐겨 읽고 봤던 사람 입장에서 항상 가지고 있던 의문은요, 왜 배우자의 불륜 사실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배우자가 아닌 불륜 상대에게 분노를 터뜨릴까 하는 점이었어요. 남편이 바람을 펴도 가족, 친구들이 죄다 몰려가서 불륜녀에게 김치 싸다구를 날린다든지, 아내가 바람을 펴도 그 상대 남자를 살해하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하는데,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갔거든요. 자신을 배신한 건 바로 자기 배우자인데 말이죠. 그리고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불륜 상대 탓이 아니라 자기 배우자 탓이란 말이에요.
그 연유가 배우자를 자기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우자를 탓하거나 징벌하는 건 자기 자신을 탓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간주되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건 먼 훗날이었죠. 사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도 강력한 소유욕이 존재하는데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얘기야!”, “얘가 애는 참 착한데, 나쁜 친구들을 사귀는 바람에… 등등”), 연인 관계, 혹은 부부 관계는 오죽하겠어요. 그런데, 종종 상대에게 소유욕을 가지는 걸 쿨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합니다. 주인공 ‘가후쿠’도 그렇죠.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지만 겉으로는 크게 개의치 않아 보입니다. 사실은 무척 상처 입었지만 그걸 인정하길 싫어해요. 아내가 할 얘기가 있다고 했을 때도 어떤 선언을 듣게 될지 두려워 무척 주저합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 단편집 <여자가 없는 남자들>의 세 단편을 매우 영리하게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원작을 바탕으로 하지만 2차 창작자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작품을 보고 분석을 할 땐, 오리지널 작품에 비해 2차 창작자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전체 뼈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다시 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같은 경우는, “20년 동안 감금한 이유보다, 20년 후에 풀어준 이유”가 ‘가장 잔혹한 복수’라는 감독의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잖아요.
원작 단편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주인공 ‘가후쿠’와 상대역 ‘다카츠키’라는 캐릭터를, 그리고 죽은 아내의 불륜 상대로 추정되는 ‘다카츠키’와 술자리를 갖고 아내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에피소드, 그리고 사정상 자신이 운전을 하지 못해서 젊은 여성 운전수를 고용한다는 에피소드, 그리고 주인공 ‘가후쿠’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라는 점을 따왔습니다. 또 다른 단편 소설 <세예라자드>에서는 섹스 후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인이라는 캐릭터라든지, ‘칠성장어’의 에피소드를, <기노>에서는 아내의 불륜 목격했지만, 쿨한 척,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사내의 이야기를 따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설 속 설정들을 모두 설명하는 초반 40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타이틀 롤이 올라오는 거죠. 마치 ‘이제부터가 내 이야기 시작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히로시마 연극제’와 같이 완전히 새로 쓴 에피소드를 제외하더라도, 원작과 설정이 다른 점은 많습니다. 주연급 자동차가 노란색 컨버터블이 아닌 것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원작 소설의 ‘가후쿠’는 연출을 한다는 얘기가 없고, 아내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심지어 이름도 안 나옵니다. 그냥 최소 4명의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만 나오죠. 사망원인이나 과정도 완전히 다르고요. 원작에서 ‘다카츠키’는 아내의 장례식에 초대도 받지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무척 억울해하죠. 그리고 운전사인 ‘미사키’의 배경에 대해서도 거의 안 나옵니다. 음주운전 사고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만 나오죠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일에 대해서, 아내의 몸과 마음을 독점하지 못한 것에 대해, 영화 속 ‘가후쿠’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걸 자꾸 회피하려 듭니다. 아내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 앞에서 쿨하고 젠틀한 남편 코스프레를 하는 거죠. 불륜 사실에 대해 아내와 터놓고 얘기를 하는 순간, 자신과 100% 딱 맞는 인연이라고 생각해왔던 아내를 영영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의 고통과 딜레마가 떠오르게 합니다. 물론 동훈은 아내뿐 아니라, 어머니, 형제, 직장 등 자기가 가진 모든 인연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 혼자 떠안고 있긴 했었지만요.
하지만 그게 어디 쿨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겠어요? 잊으려 해도 자꾸 생각나고 생각나고 결국 혼자서 수많은 망상에 빠지게 만드는 일일 테죠. 손이 떨려서 담뱃불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다든지, 운전 중 실수를 한다든지 하면서 그의 마음속 상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내의 장례식에 찾아온 (아내와 최근에 동침한 녀석으로 추정되는) ‘다카츠키’를 목도하고는, 곧바로 이어지는 <바냐 아저씨> 무대에서 (대본과 안 맞게) 격정을 토해내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또 히로시마에서 오디션을 볼 때, ‘다카츠키’가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자 참지 못하고 끊어버리고 말죠 (그리곤 키스신이 없는 바냐 배역을 줍니다 ㅋㅋㅋ).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인중 하나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작품세계 전반에 걸쳐서 줄기차게 “소통에 있어서 ‘언어’가 가지는 역할은 매우 불분명하고 한계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해왔던 것 같습니다. <아사코 I & II>에서도 그녀가 ‘바쿠’에게 첫눈에 반한 이유라든지, ‘료헤이’를 떠난 이유, 그리고 ‘바쿠’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관계가 연결되고 끊어지는 것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해피아워>에서도 등장인물 간에 수많은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또 그만큼 소통의 단절이 거듭되고, 오히려 대화를 통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죠. 아예 언어 대신에 몸을 맞대어 생각을 공유하는 장면도 나오구요.
<우연과 상상>의 경우에는 더욱 노골적입니다. 첫 에피소드인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은 제목부터가 바로 ‘언어 소통’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보여주죠. 내용 역시, 대화가 너무 잘 통해서 마법과 같은 시간을 같이 보내더라도, 그 상대의 과거에 대해 전혀 무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물론 그가 과거에 누구와 사귀었는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요). 둘째 에피소드인 <문은 열어둔 채로> 역시, ‘음성언어’ 만으로 야기할 수 있는 수많은 오해의 가능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구요. 세 번째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에선 아예 전 세계 통신망이 단절된 사회를 가정합니다. 그리고 사람 간에 위로를 나누는 것은 상대의 정체를 완전히 오해하는 상황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죠.
마치 강박관념을 가진 것처럼 집요할 정도로 ‘말’과 ‘글’의 제한된 역할을 주지시키는 이유는 왜일까요?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의 전개 방식도 관객이 궁금할 만한 정보를 휙하니 건너뛰는 경우가 많은 걸 봐서는, ‘언어 소통’의 한계성을 말한다기보다는 ‘제한된 정보가 진심 혹은 사실 전달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아사코 I & II>에서 ‘료헤이’와 ‘아사코’의 이후 삶이 어떻게 될는지 설명이 없고, <우연과 상상>에 있어서도, 도게자를 한 학생의 정체를 카메라를 통해서 보여주지 않는다든지, 잘못된 이메일 주소로 인해 벌어진 사건 자체는 생략하고 넘어간다든지 하는 연출이 나오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런 연출에 익숙하지 않은 – 고전적 내러티브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무척 불친절하게 느껴집니다. 누가 뭐래도 우린 <건축학개론>을 보고 나와서 과연 수지가 선배와 잤는지 안 잤는지를 애타게 궁금해하니까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감독은, 여전히 ‘언어 소통의 유효성’에 대해 계속 반추합니다. 영화 초반부 ‘가후쿠’가 출연했던 (그리고 아마도 연출도 겸했던) 연극은 ‘사무엘 베게트’의 대표적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입니다. 가뜩이나 인물들의 파편화된 대사가 서로 안 이어지는 걸로 유명한 부조리극인데, 그걸 또 일본어와 (아마도 상대 배역 연기자의 자국어일) 인도네시아어, 그리고 영어자막으로 진행합니다. 이렇게 다국적 언어로 연극을 만드는 ‘가후쿠’의 방식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일본, 한국, 대만, 필리핀 출신 연기자들이 자국어로 (한국 수화 포함) 극을 이끌어 갑니다.
‘가후쿠’는 처음 팀을 꾸리고 한동안은 대본 리딩만을 반복해서 하는데, 이는 실제 무대에서는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더라도 진심을 담은 연기를 끌어내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장 르누아르 감독’이 했다고 알려지는)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은 채 천천히 읽는 대본 리딩에는 아마도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첫째로, 대본의 문장을 ‘단어의 연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음성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거죠. 마치 어린아이들이 처음 언어를 배우는 과정처럼 말이죠. 이러면서 상대 배역은 자신이 모르는 언어의 대사라고 할지라도, 그 소리가 가지는 의미를 기억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방식의 리딩은 그 대사를 읽는 본인이 아니라 상대 배역을 위한 방법인 것이죠.
둘째로, 이는 실제로 이런 리딩 연습이 하마구치 감독의 배역 연습에서 사용되는 이유라고도 하던데, 대사를 달달 외울 정도로 대본을 숙지하고 나면, 실제 무대나 촬영 첫 테이크에서 배우의 진짜 감정이 실린 연기가 저절로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감독들이나 영화배우들도, 영화 촬영 중 첫 테이크가 감정이 가장 잘 살아있다고 하죠.
끝으로, 극 중 “자신의 말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평범한 일”이라고 말하는 ‘유나’가 밝혔듯이 “보는 것과 듣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말보다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어의 연결’인 문장을 분석하는 과정은 자칫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죠. 특히 소통에 있어서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가지는 힘에 대한 믿음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려는 이야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언어는 모르지만, 그가 만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은, 마치 자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걸 알 수 없는 수많은 상황에서, 자신의 심장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하는 연습인 것이겠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히로시마 연극제 무대 공연에 차질이 생긴 ‘가후쿠’는 조직위로부터 본인이 직접 ‘바냐 아저씨’ 배역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배역은 아내가 떠난 직후 무대에서 “그것은… 그 여자의 정숙함이 철두철미하게 거짓이니까!” 라는 대사를 하다가 감정이 격해져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정리할 기회를 갖기 위해 ‘미사키’의 고향, 홋카이도의 마을로 짧은 여행을 떠납니다.
홋카이도로 향하는 길에서, ‘가후쿠’는 몇 년 동안 가슴에만 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아내는 또 그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알았다는 점. 어느 날 아내가 터놓고 대화를 하려 했지만, 뭔가 얘기를 시작하면 아내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집에 늦게 들어갔다는 점. 만일 자신이 아내와 대화할 용기를 가지고 일찍 들어갔다면, 뇌출혈로 쓰러진 아내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책합니다. ‘미사키’ 역시, 눈사태가 일어났을 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학대했던 엄마를 구할 기회가 있었지만 구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가족의 죽음, 상실에는 자신들의 비겁함, 망설임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그걸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난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어… 진실을 지나치고 말았어. 사실 깊은 상처를 받았어. 미쳐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 못 본 척했어.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었어. 그래서 오토를 잃은 거야. 영원히… 이제야 알겠어… 오토가 보고 싶어. 만나면 화를 내고 깊어. 책망하고 싶어. 나를 속인 걸… 그리고 사과하고 싶어. 내가 귀를 가울이지 못한 걸. 내가 강하지 못했던 걸…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보고 싶어. 다시 한번 얘기하고 싶어… 하지만 돌이킬 수 없어.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너와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만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결국 원작에서도 나온 다카츠키의 대사, “…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는, 자신의 작품세계 전반을 통해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했던 감독의 결론으로 들립니다. 마치 “소통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고, ‘듣는 것’ 중에서도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소통에 첫걸음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다시 말해,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마주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상대방의 진실과도 마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바냐 아저씨>에 나온 대사를 ‘오토’의 입을 빌려 얘기함으로써, 한 번 더 깊은 방점을 찍습니다.
“내 생각에는, 진실이란 그게 어떤 것이 되었든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이지”
P.S. : 하지만, 성장하는 동안 ‘정글의 법칙’을 몸소 깨우치면서, 친구들끼리 만나면 헛소리만 늘어놓고, 낄낄거리고, 주먹 인사를 나누고, “미친 새끼 ㅋㅋㅋㅋ” 혹은 “병신 새끼 ㅋㅋㅋㅋ”라는 아름다운 대화를 통해 우정을 확인하고, 대신 제대로 진지한 의사소통은 경험하기 힘들었던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있어서, 음성언어를 통해 의사소통하는 것은 사실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전 세계 남편들이 부인한테 듣기 가장 무서워하는 대사가 이거라잖아요. “오빠, 여기 앉아 봐. 잠깐 얘기 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