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혼자 극장에서 성룡 액션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다리가 항상 풀려 있었어요. 그도 그럴 듯이 영화 속 성룡이 발길질을 하면 같이 다리에 힘을 빡 주게 되고, 주먹질을 하면 어깨가 움찔움찔했었거든요. 펀치 단 한 방으로 상대를 저 멀리 날려보내거나 총을 한번 휘두르면 수십 명이 자빠지는 미국 액션 영화는 아무리 봐도 괜찮았거든요. 시나리오도, 촬영도, 음향도, 뭘로 보나 헐리우드 영화가 훨씬 더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저에게 액션 영웅은 성룡이었죠. 스크린 안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배우와의 동조감. 그게 실제로 배우의 근육과, 핏줄과, 얼굴 표정, 고함소리가 모두 생생하게 연결되었을 때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나중의 일이었지만요.
<로보캅 (Robocop, 1987)>을 극장에서 봤을 때에도 비슷한 걸 느꼈죠. 그전 해부터 급우 중 한 명이 (시골 아이스럽지 않게) 잡지‘스크린’을 보고 있었는데, 헐리우드 단신 코너에 있는 <로보캅> 스틸컷을 보고 광분하고 있었거든요. “우와~ 이 총 좀 봐!!! 화염이 이마아안큼 크게 나오는 것 좀 봐!!!” 하며 말이죠. 당연히 몇 달 동안 교과서며 연습장이며 로보캅을 따라 그린 그림으로 가득했었죠. 근데 막상 영화를 보니, 철갑 헬멧을 쓴 멋진 로보캅의 모습은 전반도 채 안 나오고, 후반에는 헬멧이 벗겨 저서 주인공 ‘머피’의 얼굴이 노출된 채로 영화가 진행되는 거예요. “아니…??? 저 멋진 디자인의 헬멧을 안 씌우고, 왜 저렇게 험상궂은 얼굴만 보여주는 거지? 톰 크루즈처럼 미남도 아닌데???” 싶었죠. 하지만 역시, 극중 주인공과의 감정적 동조는 후반이 더 강했어요. 어두운 헬멧을 쓴 채 총을 휘갈기는 모습은 굉장히 멋졌지만, 주인공 머피의 심리적 갈등도 그렇고, 액션 장면에서 관객의 심장 쫄깃하게 만들기 위해선 당연히 배우의 눈빛이, 배우의 근육이, 힘줄이 보여야 하는 거였더라구요.
8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장 클로드 반담’이니, ‘실베스터 스탤론’, ‘아놀드 슈와체네거’ 등 덩치가 되거나, 몸매가 되거나, 액션이 되는 남자 배우를 써서, 무조건 적 사상자만 더 많이 쏟아지는 액션 영화를 만들고 있었는데, 네덜란드에서 건너 온 ‘폴 버호벤’ 감독은 이미 알았던 거죠. 어차피 관객이 동조하는 건 영화 속 주인공의 역경이지 상대방 (빌런?)이 주인공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당하는냐는 단지 시각적 쾌감 만을 준다는 것.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그걸 극복하는 걸 배우가 얼마나 리얼하게 연기하느냐는, 멜러물이 되었든 액션 영화가 되었든, 미스터리 서스펜스물이 되었든,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이걸 증명하는 사례는 다른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당장 <터미네이터 2 (Termionator 2 : Judgement Day)> 만 해도, 그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과 폭발 장면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하지만, 정작 관객의 근육을 움찔하게 만드는 건 사라 코너가 쇠 파이프를 휘두를 때였거든요.
근데, <외계+인 I>에서는 배우가 전혀 안 보였어요. 염정아+조우진 배우 콤비가 그나마 좀 웃겨주기는 했지만, 김태리 배우도 류준열 배우도, 도무지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더라구요. 김태리 배우는 <승리호>,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나왔던 캐릭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출연 분량에 심리적 갈등이 드러나는 장면이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류준열 배우마저 (아마도 전우치 역할을 기대하고 쓴 것 같은데) 뭔가 한 껍질이 벗겨지는 장면 없이 그냥 답답하게 가더라구요. 아니 이게 어떻게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를 만든 감독과 같은 사람이 찍은 영화라고 할 수 있냐는 말이죠.
게다가 ‘가드’ 역할을 하는 김우빈 배우는, 사실상 1부에서 가장 출연 분량이 가장 많은 리딩 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뭐… 워낙에 로봇이라는 설정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자신의 임무나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지구인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감정 병화가 극에 달아야 할 액션씬을 죄다 CG로 처리해 버리니.. 아 정말 이렇게 좋은 배우들 모아놓고 뭐 하는 거냐… 하는 탄식이 나오더군요. 외계 로봇이나 비행체와 싸우는 장면은 말하자면, 1부에서 가장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액션신인데 액션 애니메이션 구성도 좀 신경 쓰고, 김우빈의 얼굴이 반쪽이라도 나오게 해서 찍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구요. 맞서 싸우는 적 캐릭터가 시나리오상 설정 때문에 죄다 <터미네이터 2>의 T1000처럼 나온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구인이나 가드 정도는 관객의 흥분을 이끌 수 있도록 보다 인간적인 액션 연기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무엇보다 CG의 참신함이 없어서 더 그랬죠. 이제 한국 영화가 오스카를 타고 넷플릭스 시청 1위를 하는 시대인데, 고려 시대 액션씬 CG는 여전히 <촉산>이나, <천녀유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현대 액션씬 CG는 <마블 어벤저스 >시리즈와 계속 비교하게 만들어요. <괴물> 이후로 헐리우드 수준의 CG가 한국 영화에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시각효과 만으로 새로움을 추구할 수 없다면 최대한 시나리오와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겠죠. 헐리우드의 몇 퍼센트 비용으로, 후반작업도 단 몇 개월 동안 해냈다는 변명은 과연 더 이상 통할지는 의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벤저스> 시리즈 관람료가 <외계+인>보다 몇 배로 비싼 게 아니잖아요. 관객 입장에서는 말이죠.
330억이나 들여서 만든 대작인데… 후반작업이 완벽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추석이나 겨울 개봉을 노렸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추정컨데 ‘롯데’에서는 <한산>을, ‘쇼박스’에서는 <비상선언>을 밀었기 때문에, CJ 입장에서도 여기에 맞서 싸울만한 텐트 폴 영화가 급했었던 것 같은데, 연출도 그렇지만 후반작업 완성도에서 가장 아쉬웠습니다. 손익분기 700만인 영화를 가지고 150만 정도 밖에 결과를 못 냈으니, 후반작업을 재작업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그나마 최근 할리우드처럼, 다 만들어놓고 (차라리 세금 감면이라도 받기 위해) 영화를 폐기해버리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수많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야기랑 개그 코드가 저와 너무 잘 맞아서요. 2편을 꼭 보고 싶어요. 극장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