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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토피노 0

결혼한지 19년째, 이민온지 16년째 되었다. 여전히 영어를 쓸 때마다 버벅대고 더듬거리고.. 여기 식으로 말하먼 Broken English를 쓰는 것처럼, 결혼 생활도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덜컹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민온지 20년이 넘는 사람들도 영어를 쓸 기회가 자주 없는 생활을 한다면 여전히 영어에 자신없고 힘들어 하는 것처럼, 결혼 생활도 이렇게 계속 부딪혀 가면서 서로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끝까지 힘들 것 같다.

토피노에 가는 것은 이번이 세번째. 현지 직장에서 풀타임을 가지게 되고 나름 첫휴가라는 걸 받게 되었을 때, 우린 그동안 얘기만 들었던 토피노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밴쿠버 아일랜드엔.. 뭐.. 여름에 가족들이 올 때마다 빅토리아니 부차드 가든이니 해서 가보긴 했지만, 다운타운 교통 복잡하고 기념품 가게 많고, 터무니 없이 비싼 꽃구경이라는 것 정도 밖에 그리 큰 인상이 없었는데, 그래도 커다란 페리를 타고 2시간 남짓 항해를 한다는 게 설레게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토피노라는 섬 서쪽 끝단 해변은 마치 한국의 동해안 같이..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볼 수 있단게 유명했었고 (막상 가보니 서해안 같은 갯벌이었지만), 날씨 사나운 겨울엔 이른바 Storm Watching을 하려고 사람들이 또 몰려든다고 했었다. 마침 휴가를 겨울에 얻었고 해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준비 없이 그리고 아무런 호텔 예약 없이, 키우던 강아지를 데리고 떠났다.

그러다가 악명높은 4번 국도의 기후 급변 때문에 말그대로 눈길에서 절벽으로 떨어질뻔 하고, 비오는 겨울철이라고 예약도 안하고 갔는데, 마침 스톰 워칭 성수기라 하마터면 길바닥에서 잘 뻔한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찬사해 마지 않던 롱비치..라는 곳에 갔었으나.. 이게 뭐야.. 경포대나 태안 앞 바다보다 못한데..?? 하기도 했고, 수준에 맞지 않는 근사한 (주상절리대 경치를 품은) 레스토랑에 갔었다가 가격표를 보고 잔뜩 움츠러 든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난 애피타이저만 먹고 나왔었지). 그리고 숙소에 묵는 내내 날씨방송만 켜놓고 돌아가는 길은 괜찮을지 걱정을 하곤 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빅토리아 근교의 작은 도시 Sidney의 풍경을 보고.. 아.. 나중에 늙어서는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돌아오자 마자 무리를 해서 모기지를 얻어 내집 장만에 올인했었다)

그리고.. 두번째 토피노 여행.. 은 2016년이었었나? 봄이 시작되면서 캠핑 계획을 짜던 중에 토피노에 있는 국립공원 이야기나 나왔다. 지난 번엔 갑작스런 기후 변화 때문에 즐기질 못했으니 이번엔 찬찬히 다 댕겨보자고… 그러던 중.. 세계일주를 하던 학교때 친구 부부가 밴쿠버에 들러서 바로 의기투합하였다. 그전까지는 .. 캠핑이라는 건 의례 우리 둘만 하는 것이어서 (그리고 우리 개 딸기도 같이)항상 툭탁 거리고 싸우고, 그래 놓고는 또 같이 산책을 다니고, 아님 먹을 걸 해 먹거나 주질러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일이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캠핑한다는 것이 그렇게 재미난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동안 안마시던 술도 다시 엄청 마시게 되었고.. 같이 깔깔거리고 떠들며 즐겁게 수다를 떠는 것도 캠핑의 즐거움이라는 걸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전에 왔을 때는 다 못다녔던 토피노 근방의 모든 명소들, 트래킹 코스들도 찬찬히 다 둘러 보았었다. 둘이서 다닐땐 의견 대립이 생기면 한동안 실랑이를 해서 풀어야 했던 일들도, 여럿이 다니니 때때로 압도적인 다수결로 금새 해결이 되는 상황도 많이 즐겼다. 그리고.. 다시금 밴쿠버..라는 곳이, 우리가 사는 이 곳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라는 걸 깊게 느꼈다.

세번째 토피노로 오게 되기까진 사실 많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올 여름 자스퍼로 캠핑 여행을 갈 때 구입해둔 국립공원 연간 입장권이 있는 터라, 뽕을 뽑자라는 심정으로 또 한번 국립공원 캠핑을 하자라는 생각이었지만.. 날이 슬슬 추워지자 왠지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서 쉬다 오자…하는 욕심도 들었다. 곧바로 멕시코 7박 코스 베스트딜을 여기저기서 찾아보다가 지쳐 잠들기도 하였으나 지난번 멕시코 여행때 기름진 음식에 너무 쉽게 질려버렸던 기억이 났었다, 그래서 이번엔 밴쿠버 다운타운 내에 호텔에서 쉬다 오자라는 계획도 있었고… 휴가일정은 한달도 훨씬 전에 결정되었지만, 출발 바로 이틀 전까지 마음이 오락가락하였다. 결국 토피노로 결정해버린 건 마치나 누군가에게 떠밀려진 느낌이었는데, 토피노 관광지 주변으로 관광객 평점이 높거나 비평가들에게 주목받는 레스토랑들이 대거 생겨났다는 걸 발견했고, 우리 휴가 일정에 마치 맞춘듯이 특정일자 및 시간 대에 RV의 페리 승선료 할인 프로그램이 생겼으며, 멕시코 및 중남미 해안에 태풍들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거기에.. 지독한 게으름 탓에 다른 여타의 여행상품을 쇼핑하는 것에 쉽게 질려버렸다. 멕시코 여행이 올 인클루시브라고 해서 (식사, 음료, 주류, 쇼 등등이 숙박과 해안시설 사용에 다 포함되는 것) 언뜻 저렴하게 보이지만, 일인당 하루 가격이 최소  200불 이상, 둘이서 하루에 400불 이상 쓴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특별히 카리브 해안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거면 모를까…사실 그 정도 비용을 쓴다면 밴쿠버에서도 즐겁게 놀 수 있다는 점이다.

어쨌건 이렇게 세번째 토피노 행이 결정되었고, 이번 캠핑은 최대한 가볍게 가서 요리는 최대한 절제하고 그 동네 식당들을 이용하자.. 라는 계획을 세웠다. 일기예보는 일주일간 비가 오는 걸로 되어 있었고 캠핑장 예약을 미리 안해둔 탓에 이 사이트에서 저 사이트로 계속 옮겨 다니는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놀러가는 계획을 세우는 건 여전히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