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일
8시가 넘어 일어났다. 동네 산책을 하기로 한다. 딸기를 데리고 (이 동네엔 독수리가 많아 작은 개는 채가기도 하니 꼭 가까이 데리고 다니라는 모텔 주인의 충고가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햇살이 내려 쬐기 시작하는 거리로 나섰다. 모텔을 나서 북쪽으로 향해 걸어가면 거리 양편에 고래투어 안내소, 서핑 장비 빌려주는 곳, 자전거 빌려주는 곳, 커피숍, 식당, 옷 가게 등 관광지스러운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아주 작은 동네이다. 한 다섯 블록 가니 끝이 나온다. 식품점이 하나, 협동조합 슈퍼, 조합 옷 가게, 조합 잡화점 등이 하나씩 있고 빵집 몇 곳, 나머지는 숙소와 레스토랑들이다.
한 블록 아래도 비슷하다. 이 길엔 도서관과 마을회관 비슷한 곳이 있고 나머지는 또 숙소와 식당들. 그래도 가정집들이 좀 있다. 한 블록 위쪽은 학교가 있고 병원, 그리고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중국식당. 중국식당은 어디나 있어 저렴한 가격으로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
한 바퀴 돌고 빵집에서 점원이 추천해주는 당근 크림치즈 머핀이랑 남편을 위한 소시지빵을 사서 숙소로 돌아온다. 가격은 관광지답게 비싸다. 작은 빵 하나에 세금 포함 2불씩. 모텔로 돌아와 커피를 내려서 빵과 함께 먹었다. 빵이 그다지 맛있는 편은 아니다. 커피메이커로 뜨거운 물을 만들어 컵 신라면도 먹었다. 냄새가 많이 날까 봐 발코니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에서 라면을 먹었는데 날씨도 좋고 풍경도 예쁘고 좋다. 밖에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 (원주민 아주머니. 영어를 잘 못하시는 것 같음)가 왔다 갔다 하신다. 먹고 정리하고 해변으로 가보기로 한다. 사무실로 가서 이틀 더 묵겠다고 얘기하고는 차로 한 5분여 걸리는 해변으로 향했다. 긴 해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길을 따라 여기저기 나 있다.
가장 가까운 체스터맨 비치로 들어가 본다. 차를 세우고 10여 미터 들어가니 백사장과 파도가 우리를 맞는다. 날씨가 확 개어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나와 있었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멍멍이들도 많고.. 딸기는 신이 나서 졸졸졸졸 다닌다. 독수리가 무서워 끈을 풀어주진 못했지만 제법 신나 하는 것 같다. 캐나다 와서 이렇게 고운 모래사장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대부분 돌이 섞인 조그만 해변가인데 여기는 아주 고운 모래밭이 길게 펼쳐져 있다. 모래가 희진 않고 한국 서해안의 모래 같은 회갈색이다.
바로 집 앞 나무에도 독수리가 천연덕 스럽게 앉아있다
한참을 바닷가에서 놀다가 다시 차를 타고 다음 해변으로 가본다. 이번엔 개인주택들 뒤편. 여긴 한편 끝으로 바위와 나무들이 신비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파도가 세찬 때문인지 보웬에 많던 바위에 붙은 홍합 같은 것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다음 해변은 제법 길다.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여전히 날씨가 좋다. 바다에는 겨울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몇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캠핑의자를 가지고 와서 바다에 펴놓고 파도가 밀려오면 발을 들어올리면서 서핑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있다 파도가 조금 세지면서 나무토막들이 밀려오자 딸기가 짖어댄다. 무슨 동물인 줄 아나.. 바부..
한참 있으니 약간 추워진다. 점심은 조금 근사한 곳에 가서 먹기로 했다. 다시 시내(라고 하기엔 너무 작지만)쪽으로 차를 돌려 가는 길 해변에 있는 위카니니쉬 리조트에 딸린 Pointe 레스토랑으로 갔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바로는 이 숙소는 비수기에도 최소 하루 40만원 정도하는 고급 숙소였다. 여름엔 하루 150만원(!)까지도 한단다. 가서 보니 의외로 건물이 너무 후져서 뭐야 했지만 레스토랑에 들어가 보니 비쌀 만 하다 싶다. 다른 숙소들은 모래사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비치 옆에 있었지만 이 곳은 파도가 치는 바위 옆에 자리하고 있어 숙소에서 내려다 보면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바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내부시설도 잘 갖추어져 놓은 것 같았다. 뭐.. 암튼 레스토랑에도 들어가니 옷도 받아주고 의자도 꺼내주고 테이블 옆으로는 바로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석양 때 맞춰오면 아주 멋질 것 같았다. 나는 시푸드 파스타와 차이 티, 그리고 메인보다는 애피타이저를 좋아하는 어린 식성을 가진 남편은 애피타이저만 두 가지(굴 튀김과 게살 케익)를 주문한다. 처음에 나오는 치즈 빵이 맛있다. 굴 튀김은 딸랑 세 개 나온다. 옆에 조린 방울 토마토와 무 순 샐러드가 따라 나오긴 했지만 너무해.. 맛은 어제 저녁 먹었던 집 굴 튀김이 낫다는 의견. 게살 케익은 두 조각 나왔는데 전부 게살 덩어리여서 괜찮다는 생각. (게살을 뭉쳐서 전처럼 부쳐냈다.)
예의 치즈빵
차이티.. 정말로 차이파리가 들어있다
달랑 3개 나온 굴 튀김
해물 파스타
달랑 두 개 나온 게살케잌 ㅜㅜ
계산서와 함께 초콜릿 후식도…
굴 튀김 세 개와 게살케잌 두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후 그림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식당에 걸려있던 원주민 마스크..
식당 내부.. 밖에선 하염없이 유리창을 닦고 있고
식당 밖 풍경
차이 티는 티 백이 아닌 잎 차로 나와 마음에 들었고 세팅도 아주 멋졌다. 파스타도 면을 직접 밀어 만든 듯 쫄깃하고 맛있었으나 소스가 넘 짰다. 전체 분위기나 정성스러운 서빙 등이 마음에 들었다. 파스타는 다 먹지 못하고 남겨 저녁용으로 싸왔다. 한번은 가볼 만한 곳.
잔뜩 배가 불러 모텔로 돌아와 잠깐 쉬고. 낮잠도 잠깐 자고. 날이 의외로 좋아 혹시 석양을 볼 수 있을까 해서 시간 맞춰 다시 해변으로 가 보았으나 가는 길에 비가 쏟아져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비 올 때 파도소리는 언제나 멋진 것 같다.
오는 길에 남편을 위한 중국집 탕수육을 사와서 나는 낮에 파스타 남은 것과 같이 먹고 TV를 보다가 잠을 청했다. 집에서는 안 보던 TV가 꽤 재밌다. 여긴 미국방송을 바로 틀어줘서 볼 게 더 많다. 캐나다 방송이 거의 미국방송이긴 하지만.
어린 식성이 아니라.. 소담스럽고 맛깔스러운 요리를 좋아하는 거라고!!! 서양 요리의 푸짐(!)한 유지방은 정말이지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란 말이지…
아무튼, 사실 여행을 하기 전에 토피노에 대해서는 그리 기대하지 않았었다. 뭐 워낙에 해변으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그냥 바닷가겠지.. 잘해야 경포대 수준이고.. 뭐 보웬 섬과 그리 다를 바 없겠지. 여기 애들은 경포대나 태종대, 제주의 주상절리대 같은 걸 못 보았으니 작은 바닷가 마을에도 호들갑 떠는 거 아니겠어? 오죽 볼 것이 없으면 폭풍우 치는 걸 관광상품이랍시고 만들었겠냐구… 정도로 생각하고 여행을 나섰던 것이다. 그럼 왜 비싼 뱃삯을 내고 그 눈 쌓인 길을 헤매면서 여기까지 왔냐구? 그거야.. 여행이란 게 원래 자기 동네에서 벗어나서 남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것에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거고, 똑같이 쌀밥에 김치찌개를 먹어도 남이 차려주고 설거지 해주는 음식을 가끔 먹고 싶은 법이니까..
사실 토피노의 첫인상은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것은 해변가였다. 동해의 ‘백사장’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해안, 그것도 안면도 부근의 고운 뻘 바닥이 길게 뻗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확! 들어버렸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같이 간 안면도 해변에는 짙은 색깔의 뻘 바닥이 군데군데 파도에 갈려진 바윗돌과 함께 펼쳐져 있었고, 특히나 뻘 바닥을 밟으면 발 주변으로 물기가 스윽!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보이는 게 재밌었는데.. 이민 오고 처음.. 정말이지 얼마만인지 이런 해변을 보는 것은..
이 추운 날씨에 아랑곳없이 서핑을 즐기는 아저씨 아줌마들
자그마한 감상에 젖으며 한참 해변을 걷고 사진을 찍고 걷고 찍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구름 속으로 숨어들어가고 있다. 날이 점점 쌀쌀해진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날이 추워지든,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하든 상관없이 여념 없이 서핑을 즐기고 있다. 행복한 녀석들.. 내가 저 나이 때에 유일한 오락거리라고는 모여서 술 마시고 엊저녁 TV 드라마에 대해 떠들거나, 최신 영화에 대해 떠들거나.. 더 취하면 사회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늘어놓거나.. 거기서 더 취하면 여자들한테 찝적대거나 괜히 시비를 붙는 것뿐이었다. 그 흔한 배드민턴도, 탁구도 국민체육인 축구 조차도 나와는, 그리고 내가 어울리던 친구들과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물론 그 당시로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고, 지금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간다 해도 그 길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못하겠지만, 그 때의 그 고민들과 절망들이 지금 사는 모습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허송세월 했다고 단정짓는다면, 아니..라고 한마디로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컨셉 중에 하나는 대책 없이 쉬고 놀고 그런 종류의 여행이었지만, 나로서는 나름대로 의미를 걸어놓은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앞으로 먹고 살 곳을 찾는 문제였는데, 물론 워낙에 역마살로 도배를 한 터라 어디에 자리를 잡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일시적인 충동에 가깝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밴쿠버에 비해 이곳 밴쿠버 섬에 기대를 걸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밴쿠버 보다는 덜 되바라져있지 않을까… 밴쿠버 보다는 조금 더 순진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이다. 물론 서울에 비하면 밴쿠버도 아주 무지렁이 촌 동네에 가깝지만, 전세계로부터 수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어오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 정해진 땅덩어리에 비해 인구밀도가 늘어나게 되고, 게다가 자국에서 돈을 벌어 투자이민을 온 사람들이건, 자국의 정치상황이 싫어 도망쳐 온 사람들이건 간에 나름대로 약삭빠르다 보니까, 점점 실망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바로 우리보다 일년 전에 이민 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고속도로가 정체된다고 해서 노견으로 다닌다던가 얌체 행동을 하는 것은 찾기 힘들다고 했는데, 우린 이민 온 그 해부터 보기 시작해서 점점 더 많이 보게 된다. 차 들도 점점 많이 늘어나고, 운전하면서 시비가 붙거나 욕설을 내뱉는 일도 전보다 잦아졌다. 하루하루가, 매년 매년이, 예전보다 삭막해지고, 지난번보다 사람들과 다툼이 많아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소소한 일들이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밴쿠버 섬 사람들이라고 해서 좀 더 순진하고, 덜 약삭빠를 것이라는 보장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3~4일 동안의 여행으로 그런지 아닌지 알 수도 없다. 그냥.. 아마 그렇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
나나이모에 있는 우리 회사의 지점에 컴퓨터 기사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아내에게 슬쩍 물었다. “여기서 살아보고 싶어?”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아내는 이내 좀 더 생각해 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글쎄..”라고 대답한다. 사실 나도 모르겠다. 이리로 오게 되면 그나마 3년간 살면서 정 붙인 (아주 사소한 거라도) 또 한번 헤어지게 되는 셈이고..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과 익숙해지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저녁이 되자 빗줄기가 심상치 않다. 낙조를 본답시고 나섰으나 차에서 내리자 마자 순식간에 쫄딱 젖고 말았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렇게 비가 오기 시작하고 날이 어둡기 시작하면 정말 할 일이 없는 동네다. 에그…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낮에 몇 점 얻어 먹었던 느끼…한 파스타 조각을 중화하기 위해 ’중화’요리를 먹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디나 어김없이 매일매일 영업하는 중국집. 토피노에도 예외 없이 중국집이 저렴한 가격으로 매일같이 지역주민에게 봉사하고 있다. 남편은 속이 안 좋은 모양이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고 (6시도 안 된) 밤이 되면 배고프다고 할 것이 불 보듯 뻔해 종용해서 중국집서 저녁거리를 사오게 했다. 속이 안 좋다고 하더니 탕수육 한 접시를 혼자서 다 먹더군. 그러더니 탕수육이 속을 달래줬단다. 참 희한한 속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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