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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를 위한 107가지 법칙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젊으셨을 때 출판사 세일즈를 하셨다. 7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이른바 <월부장수>라고 불리우던 ‘방문영업’을 하셨던 건데, 덕분에 우리 집에는 내가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책이 많았다. (전자제품 세일즈를 하셨다면 엄청난 전자제품이 쌓여있을지도..) 특히나 ‘승자를 위한 107가지 법칙’ 등, 아버지 스스로 관심이 많았던 영업, 대인관계, 처세술에 관한 책들은 전집으로 몇 질이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전집류의 책들은 몇 차례의 이사를 거치고도 본가 서가에 의젓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내가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아직 아버지의 청춘에 대해 같이 뒤돌아볼 여유가 있는 나이가 아직 되지 못했을 때, 나는 그런 책들이 집에 꽂혀 있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일어서서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을 역설하고 이 세계가 화해와 화합의 존재 가능성을 거부한 채, 대결과 승부 만을 강조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가치관과 나만의 세계에 몰두한다는 것이, 그리고 타인과의 대화를 거부한다는 것이, 오히려 너무나도 깨지기 쉬운 내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겁을 내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아직 알 수 있는 나이는 되지 못했다. 그런 걍팍하고 고지식한 관념이 오히려 대결과 승부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인간으로 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어떤 수식어와 명분을 갖다 붙혀도 군대란 것은 살인자의 집단에 불과하다. 당연히 군대에서의 정신교육은 적개심과 전투욕을 고취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 된다. 이런 분위기가 폐쇄적이고 자기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성된 사회에서는 그대로 상대에 대한 적개심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계급사회아닌가!! 나 역시 내가 위에서 깨지지 않기 위해, 내가 살기 위해 내 아랫사람을 밟아야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공포심이 스며들면 들수록, 나는 내 가치관과 세계를 2년2개월 동안 간직할 수 있도록 강한 정신무장이 필요했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입대전 몇 달 동안 나는 중국의 역사에 대해 닥치는 대로 읽었고(아쉽게도 한국 역사에 대해서는 냉정하면서 재미있게 저술된 책을 찾지 못했다. 대개 민족의식 과잉이 아니면 국사 교과서와 같았다), 특히 중국 고대왕조에 대한, 다시 말해서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 등 피바람 나는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느지를 공부했다.

우스운 것은.. 그런 열국지, 사기, 십팔사략, 삼국지 등을 읽고 있는 동안 내가 크게 영향받은 순간들은, 상황을 판단하고, 목숨을 보전하고, 사람을 설득하는 이른바 고대의 처세술 등이었다. 특히 대개의 역사가 전쟁 중심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이런 처세술들은 대부분 상대방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과 연관되어 있었다. 예전에, 예전이라봤자 그리 오래 전도 아닌 때에, 그렇게도 질색을 했던 처세술과 승부수에 관한 지식들을, 중국 고대사를 통해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사실을 어느덧 깨달았던 순간에는 이미 그런 지식들이 실생활에 얼마나 편리하게 사용되는지 감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저버릴 수는 없었다.(그래봤자, 재행무상이니 일체유심조, 새옹지마, 뀡 잡는 게 매.. 등등 지당하신 말씀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거였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 들었던 생각은, 아버지께서 그 책들을 모았을 때 당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맨손으로 사회에 뛰어들어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아버지는, 두려웠던 것이다. 자칫 당신의 가정을, 당신의 세계를, 힘든 사회생활 속에서 잃게 되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