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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단상

1. 대학 영화써클 시절, 신입생 모집 기간 동안 총학 산하 동아리들을 홍보하기 위한 비디오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연극을 하는 “극예술 연구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름 신경을 써가며 3분 짜리 대본을 미리 만들어 놓아서 찍어 달라는 대로 카메라를 돌리기만 하면 되었었는데, 배우 중 한명이 느닷없이 핸드 헬드 카메라로 달려들어 고함을 지르는 장면이 있었다. 살기 등등한 눈빛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화면이 흔들리지 않게 끝까지 카메라를 고정시키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부터 였을까? 아직도 너무나도 살벌한 연기들을 보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가 “조선민주공화국 만세”를 외칠 때가 그랬고,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눈에 파란 빛을 뿜으며 유지태에게 달려들 때에도,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김윤석이 밥상을 뒤집어 엎을 때에도 그랬다. 하지만 한국어가 아닌 말로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서 그런 힘을 느끼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는데, 오늘 2시간 35분 동안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故 히스레저의 명연기에 가슴을 계속 부여잡아야 했다.

비틀거리면서 걷는 걸음걸이 하나서 부터, 어눌한 말투, 심지어 철창 안에서 치는 박수 마저도 하나하나 소름 끼치게 만들었는데, 그 정도로 배역에 몰입해 있었다면 약물 없이 정상적인 삶을 버텨나가기 힘들었다는 그의 뒷얘기를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JSA에서 만세 삼창 장면을 찍고 나서 송강호는 그 후 한 동안 스스로 격정을 참기 힘들어 2번째 테이크를 찍자는 말에 짜증을 냈었다는 얘길 했었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0회는 될 법한 촬영기간 내내 조커의 캐릭터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2, <배트맨 비긴즈>가 좀 더 현실적인 배트맨의 설정을 완성해서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다지만, 나는 처음에 그리 신선해 보이지 않았다. 좋게 봐줘도 고우영의 “일지매”와 유사하고 심하게 말하면 짝퉁 007이라는 오명을 씻기 힘들다고 봤다. 그도 그럴 것이 티벳 고원에서의 닌자 부대는 뜬금없기 이를 데가 없었고, 그런 일본의 암살기술에 환호하는 북미 관객이나 평단들이 그냥 초밥이라고 하면 무조건 영양 만점일 거라고 생각하는 (정확히 초밥에 대한 선호도와 몸매 관리를 열심히 하는 것을 등식화 시키는) 이곳 젊은 여자애들처럼 보였다. 스토리는 지루했고 임팩트가 없었으며, 리암 니슨의 허황된 야망은 태권 V에서의 카프 박사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팀버튼의 만화적인 배트맨이 시종일관 악몽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성공했었다면, <배트맨 비긴즈>는 그냥 화려한 액션물에 일본 문화를 곁들인 <킬빌>의 후예 처럼만 보였다. 막말로 크리스찬 베일이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울트라맨”이라고 하거나 “에스퍼맨”이라고 자칭해도 전혀 줄거리에 영향이 없어 보였다. 

하, 지, 만, 영화 홍보사에서 흔히 쓰는 문구에서 처럼, 1편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했다. <다크 나이트> 중 조커가 배트맨에게 “넌 나를 완성시켜 You complete me”라고 하는데, 히스 레저의 조커야 말로 크리스토퍼 놀란 식 현실적인 배트맨 시리즈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1편의 따분했던 현실적인 설정은 히스 레저의 광기어린 연기를 통해서 바로 우리 주변의 섬뜻한 현실로 다시 태어났다. 

P.S 심심했던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배트맨 비긴즈>에서 부터 나왔던 배트 모빌의 디자인은 정말이지 근사하다. 정말 군더더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뜨윽”하고 시치미를 때는 거처럼 생긴 것이, 잘 갈아진 한 자루의 칼날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