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민을 이야기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이 나라에서, 나는 더 이상 버텨나가기 힘들다는 걸 언젠가부터 깨닫기 시작했었다. 어디나 만연해있어서 더 이상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하는 부정부패나, 좀 더 못 가진 자들과 차등 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인간들. 상대를 업신여김으로써 자긍심을 느끼거나, 상대가 자기보다 앞서가면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는 사람들. 세금을 제대로 내는 월급쟁이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사장들, 의사들, 변호사들. 언제나 자기 몸보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공무원들… 짧은 삶이라면 짧게 살아오는 동안, 순간순간의 이러한 스트레스가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아버지 어머니는 어떻게 그 오랫동안 이 나라에서 견뎌왔는지, 그러고도 어떻게 당신 자식에게 나라에 충성할 것을 가르치셨는지 점점 의아해졌다.
다 좋다. 누구 말처럼 사람 사는 건 어디나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또 누구 말처럼 토대가 변화하면 상부구조도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꿈꾸는 순간, 정말 자유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환경은 그렇게 맘 편하게 꿈만 꾸고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고, 나도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헛웃음을 팔기도 하고 강한 자에게 굴종하고 약한 자들을 밟아야 하는 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60여 년간 이 사회에서 처절하게 생존투쟁을 벌이셨던 부모님이 좀 더 벌어놓은 돈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 덕에 내가 “생계”라는 절대조건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난 (이민에 대해선 절대 꿈도 꾸지 않은 채) 이 땅에서 내 젊은 날의 꿈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흐린 물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결국 깨끗한 물뿐이다.”라고 하던 중학교 한문 선생님의 말처럼, 이곳에 남아 좀 더 덜 피곤한 사회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면서, 그런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사회에 적응하려 하면 할수록, 사회와 사회에 대한 적응을 혐오하면 혐오할수록, 내게 남은 선택은 이곳을 떠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단지 내가 좀 더 사는 데 덜 피곤한 나라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던 것뿐이었다.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미국을 꿈꾸며 배를 탔던 펠레처럼… 그래, 다른 건 다 사람 사는 곳이니 마찬가지 일 거라도, 그냥 젊은 나이에 지하철 좌석에 앉았다고 지팡이로 얻어맞지만 않는다면,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다고 해서 따돌림당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그곳에서 살고 싶다.
아내 역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적잖이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여자였기 때문에 나보다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결혼 후 전문직 공무원 면접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예의 없는 면접관은 출산 계획 등을 묻고 자리를 접었다). 만남이 깊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아내와 이민 계획에서부터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고(아내는 심지어 나의 프러포즈를 “같이 이민 갈래?”로 기억하고 있다), 결국 결혼해서 같이 준비하기로 했다.
이민을 작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니나 다를까 가족이었다. 아내의 부모님이나 나의 부모님 모두 넉넉한 형편에서 유복하게 살고 있었던 게 아니었고, 게다가 두 집안 어른들이 모두 건강마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우리만 잘 살아보겠다고 이 나라를 떠나보자는 선택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나라에서 30년을 더 살고 우리의 아이들이 이 나라에서 30년을 살게 된 어느 날, 내가 왜 아직 여기서 피곤함을 견뎌나가고 있는지를 자문했을 때, 그게 결국 우리의 부모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때가서 부모님 탓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또 하나 우리가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걸 망설이게 만든 것은 “과연 외국에 가서,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 뭘 하고 먹고 살 수 있을까?”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나라가 싫어서 떠나는 건데 이 나라의 악습이 더 도드라져있는 교민사회에서 언제까지 기대 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김치 발음이 현지에서 몇 년 산다고 해서 유창한 영어를 가지게 되어 애니메이션 업종에 직업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전형적인 걱정순이에다가 준비 철저 만사 튼튼을 좌우명으로 삼는 아내는 아내대로, 구체적인 계획 없이 덜컥 이민 준비를 시작하는 것을 절대 경계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마냥 구체적인 뭔가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개월간의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그냥 시드니가 좋았다. 프라하가 좋았다. 밴쿠버가 좋았다 하면서 뜬구름만 잡고 있었을 뿐, 막상 뭔가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내 없이 나 혼자 덜컥 준비를 시작하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이었다. 나의 10년간의 애니메이션 경력은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납세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정직원으로 있었던 적은 합해서 2년 정도 밖에 되지 못했고, 계약직으로 있었던 동안에는 회사에서 원천징수 증명서를 받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게다가 그 회사들은 .. 모두 망했다). 독립 이민의 경우 5년 이상의 경력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난 아내가 움직이기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이민 준비에 대한 불안감에 일침을 가한 것은, 의외로 <가족>이었다!! 짧게나마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아이가 생기자 우린, 이사를 가야 한다느니 직장을 잡아야 한다느니(여행을 갔다 온 후 나와 아내는 계속 백수로 지냈다. 난 집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CF 콘티나 플래시 애니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보탰고, 아내는 나중에 연세대에 국제회의 전문가로 취직을 했었다) 하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 도중 먼저 밴쿠버에 정착했던 차선배가 이민 추진을 독려했고, 아내와 나는 (특히 아내는 놀랄만한 모성애의 힘으로) 힘을 내어 우리 2세가 자랄 땅을 선택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몇 주간을 인터넷을 뒤져가며 결국 이민 신청 서류를 완성했고, 대사관에 서류를 제출하던 날, 우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미래를 선택했다는 자긍심에 축배를 들었다.
2001년 10월에 그렇게 일차 서류를 제출하고.. 몇 주 후 파일 넘버를 받고, 2개월 정도 지나자 36개월 이내에 인터뷰를 하겠다는 통지를 받았다. 36개월이라니!! 그때까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던 터라 불안함은 더해갔다. 아니.. 불안감이라기보다는 맥이 탁 풀린 것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냥저냥 세월을 허비하기 시작했다. 생활을 위해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지만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버린 나나 아내에게 일자리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게다가 취직이 된 후에도 뒤늦게 회사 측에서 경영상의 문제를 들어 뒤엎은 적도 세 번이나 된다. 정말 마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나마 광고 회사에 있던 선배가 조금씩 일감을 주었고, 그걸로 근근이 생계를 연명해갔다.
2002년 5월이 되자 캐나다 이민법이 개정(개악!) 된다는 소식에 이민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요지를 말한다면, 새 개정 이민법에 의하면 부부 모두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캐나다 현지에 유학 경험이 없거나 친척이 없거나 일자리를 미리 구해놓지 못한다면 독립이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로 정리된다. 이 개정 이민법은 2001년에 이민 신청을 한 사람들에게는 소급 적용되지는 않지만, 2003년 1월까지 인터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부 적용될 수 있다고 밝혀졌다. 우린.. 정말 정말 정말 다급해졌다. 이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인터뷰를 면제받아서 빨리 출국해야 한다. 물론 인터뷰를 하고 좀 더 나중을 기다리는 방법이 더 나을 수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하루라도 빨리 뜨고 싶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손에 잡히지 않았고, 당장 내년에 또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리고 이회창이 집권해서 맘껏 없는 사람들을 유린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린 몇 가지 대책을 마련했다. 일단 캐나다 이민이 최상책이겠지만 그게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2안으로 호주 유학도 준비해두었다. (호주 이민은 우리가 자격이 되지 못했다. 이민 자격이 되려면 현지에서 공부를 하고 먼저 학위를 취득해야 했었다). 게다가 호주에서는 유학생 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주 20시간 노동이 가능했다!! 호주 대학연합에 가서 아내가 공부할 수 있는 적당한 학교를 선택했고(이 역시 아내가 먼저 공부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나보다 영어에 능통했고,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학과 선택에 있어서 아내의 학력과 경력 조건이 나보다 좋았다), 나름대로 유학수속에 대한 대비를 했다. 곧이어 아내가 5월을 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IELTS 시험 준비에 나섰다. 캐나다 대사관으로부터 인터뷰가 필요 없겠다고 판단하도록 설득하는 편지를 써야 했는데(인터뷰 재고 레터..라고 한다), 우리가 현지에 도착해서 생존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었고 영국계 국가로의 유학생이나 이민자를 위한 영어능력 시험인 IELTS 점수를 첨부 제출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2개월 정도 학원에서 집중적으로 시험 대비를 했던 아내는 Academic module에서 6.5라는 점수를 받았고(일반적으로 이민자들을 위한 제너럴 모듈보다 유학생을 위한 아카데믹 모듈이 좀 더 어려웠다. 우린 2안으로 유학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카데믹을 봤고, 6.5는 우리가 원하는 학교에 원서 제출이 가능한 점수였다. 참고로 캐나다 이민법 개정 전에는 제너럴 5.5만 받으면 영어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개정 후 제너럴 7.0이 필요하다고 한다), 호주 유학과 캐나다 이민 인터뷰 재고 레터 준비를 동시에 했다.
1차로 재고 레터를 발송했던 것이 8월 2일쯤.. 지난번 이민 신청 서류 접수 후 추가된 아내의 경력(연세대에서 국제회의를 준비했던)과 IELTS 점수를 첨부했다. 그리고 보름 후쯤.. 답장이 왔으나 인터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confirm 한다고 명시한 편지였다. 아내와 나는 기운을 내어 곧바로 다음날 2차 재고 레터를 보냈다. 2차 레터에는 밴쿠버에 있는 차선배의 추천서와 토론토 Evilclown Animation Studio(지난 겨울 내가 자원봉사 일을 한 적이 있다) 대표 Mike Dobson의 추천서, 그리고 지난해 여행 시 비행기에서 만나 사귀게 된 캐네디언 친구 Nancy Heine의 추천서를 첨부했다. 낸시의 편지가 아내의 영어능력을 강조했다면, 차선배와 Mike의 추천서는 나와 아내의 능력과 경력이 캐나다에서 통할 것이라는 걸 주지했다.
2차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곧바로 오지는 않았다. 호주 유학이 민에 관련된 세미나에도 참가했고, 추석을 맞아 양가를 방문하는 통상적인 일이 반복되었고… 아내와 나는 총력전을 펼칠 것을 각오하고 현지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기로 했다. 난 10년간 해왔던 애니메이션을 이만 그만두기로 하고 가전 수리 기술 학원에 등록했고, 아내는 불어와 중국어, 그리고 수지침을 배우러 다녔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고… 기다리다 못한 아내와 나는 추석이 지난 첫 월요일(sep. 23. 2002), 직접 대사관을 찾아가서 경과를 물어보기로 했다. 면담 요청을 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지난번에도 느꼈던 일이지만).. 정말 많은 종류의 인간들이 캐나다에 가려고 안달을 하는 모습들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과 얼마 후에 좁은 도시에서 얼굴을 마주치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어떤 사람은 PR 여권을 제출한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비자를 못 받았다고 하면서 문의를 하기도 했다. 정말 이민 수속은 맨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1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 드디어 우리 차례.. 창구에 가서 문의해보니 한참을 컴퓨터로 조회하던 상담원이 불쑥 신체검사 받으라는 편지가 근일 중으로 도착할 거라고 한다. 인터뷰 없이 기술심사를 결국 통과한 것이다. 아내는 환호했지만.. 나는 어떤 감정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고.. 단지 조금 걷고 싶었다.
며칠 전 추석을 맞아 상계동 본가에 찾아가는 동안 차 안에서 동물원 노래를 들으면서 가는데, 혜화동이 흘러나오는 순간 감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 적이 있다. 혜화동의 한 구절..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라는 말이 가슴에 그렇게 꽂힐 수가 있었다. 그게 뭔가를 암시하는 순간이었나 보다. 그렇게 기다리던 기술심사 통과에는 성공했지만, 뭐가 좋은 건지, 뭐가 성공한 건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추석 전날 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이민 계획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을 때의 아버지 표정이 생각이 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전날 대판 싸웠던) 아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무교동과 종로, 광화문 거리를 쏘다녔다.
다음날 집으로 도착한 대사관의 답장을 확인한 후에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신체검사가 필요하다는 서류와 정착비용을 입금하라는 안내서 등이 있어서 이제 정말 가는구나..라는 마음을 들게 했지만, 그걸로 그만.. 더 이상 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현지에 가서 언어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사람들과 적응하면 살게 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뭔가를 성취했다는 기쁨을 잠식하고 있었다.
답장을 받은 다음 날인 바로 오늘 아침, 지체할 필요 없이 곧바로 지정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별문제는 없었다. 그냥.. 이렇게 한 걸음씩 캐나다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2년 9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