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시간은 정신없이 흐른다. 여차하고 났더니 벌써 출국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딱 일주일 남았나? 이제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우리 개 100배 똑똑하게 키우기>라는 책을 보면 개들은 주인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에 많은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심하면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한다. 예를들어 주인이 집에 개를 홀로 버려두고 직장에 가거나 해서 홀로 집에 남을 경우 등을 말하는데 전문용어로 분리불안증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도 그런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국민학교 첫 소집일에 갔을 때를 기억한다. 어이없이 놓여진 부모님의 손으로부터 어딘가로 마구 달려가서 앞으로 나란히를 해야했을 떄를 기억한다. 개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나에게 있어서 분리불안은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어울려야 한다는 불안함이었다는 것이겠지… 그 뒤로 수많은 홀로 여행들.. 대학교 1학년때 혼자 갔던 제주도로의 무전여행, 안면도, 해남으로의 여행들을 혼자 떠날 때마다 나는 좀 더 사회화가 되기를 원했지만 여행내내 자신을 닫아두고 타인이 침입하지 못하게 다녔을 뿐이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 친구들 손을 잡고 훈련소로 향한 후.. 어느덧 “장정 여러분”의 소집이 있자 마찬가지로 허둥지둥 연단 앞에 앞으로 나란히를 하러 뛰어가야 했다. 그러나 2년2개월 동안 변한 건 없고,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 때 발톱을 감추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내게 있어서 가장 큰 홀로 여행은 아마도 결혼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큰 사회화가 아니었나 싶다. 배우자라는 사람에게는 내 과거나 내 결함 등을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어서 편했다. 아내 앞에서는 울 수도 있었고 겁에 질릴 수도 있었고 비겁할 수도 엄살을 피울 수도 있었다. 나만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쩄든 내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좋은 점은 바로 이런 파트너가 생겼다는 점이다.
이제 나의 파트너와 함께 새로운 세계와 융화하러 떠나는 시점이 다가왔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을 해야한다니 예의 사이비 분리불안이 또 스멀스멀 기어든다. 자신의 결함을 감추고 장점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영어로 해야한다니 악몽을 계속해서 꿀 지경이다.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시드니 킹스크로스 그로써리의 호이호이 아저씨나 <프렌즈>의 조이처럼.. 약간 덜 떨어져 보이지만 신뢰가 가는 캐릭터로 말이다.. 아내는 벌써 두 달째 영어학원에서 청취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이제 며칠 있으면 하루에 한국말 5배수로 영어를 많이 듣게 될텐데.. 마치 내가 예전에 군대가기 전에 집중적으로 체력훈련을 했었던 것과 같다. 그렇게 뜀박질과 푸샵을 해봐야 군대에 가면 전혀 다른 종류의 하드 트레이닝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냥 그때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아내도 마찬가지 심정이겠지…
<우리 개 100배…>에서는, 주인이 나간다는 조짐을 미리 인지시키지 않고(예를들어 TV를 틀어둔다거나, 과자를 준다거나, 다정하게 얘길 한다거나), 그냥 슥하고 나가버리는 것이 개에게 분리불안을 주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나 역시 그래야할 것 같다. 새로운 세계에 나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옆집으로 이사가는 것처럼.. 이것저것 준비하지 않고, 그냥 늘 하던대로… 슥 하고 나가버려야 할 것 같다. 슥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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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 (2003-02-24 22:14:49)
낯선 곳에 가서 가장 잘 견디는 방법중 하나는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신세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