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제 이 집과도 작별이다. 시차에도 완전히 적응한 것 같고… 뒤척이다가 일어나보니 이미 9시에 가까워진다. 10시30분까지 체크아웃을 해야하기 떄문에 먼저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한다. 짐이란 것은 신기하게도 한번 옮길 때마다 새로 산것도 없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그래서 한번 푼 짐은 다시 그 가방에 싸넣기가 매번 난관에 부딪힌다. 아.. 이런 이사를 또 한번 해야한다니 갑갑..해진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의 모든 기준은 짐을 줄이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간단한 빵식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선배가 픽업을 올때까지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아프리코캣 비엔비는 유니온 스트리트라는 곳에 있는데 오른쪽으로 따라 올라가다보면 호크 스트리트가 나온다. 여긴 얼마전 뱅쿠버시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하는데, 과연 주변 광경이나 잘 정돈된 집들이 그럴 만하다. 호크스트리트를 따라 내려가면 항구 주변으로 길게 알렉산더 스트리트가 늘어져있는데, 한국에서도 항구 주변의 거리는 홍등가로 조성되어 있는 것처럼 이곳도 그리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와 낙서로 가득한 철거 직전의 건물들.. 그리고 그런 것들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 일본인 회관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캠비스트리트가 나온다. 바로 2년 전 여행왔을 때 묵었던… 빈대로 지독히도 고생했던 바로 그곳이다. 캠비 유스호스텔의 아래에는 꽤 규모가 큰 퍼브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랜빌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도 마셔볼 수 있다. 지난번 여행 때는 좀 마시려고 하면 너무 몸이 가려워져서, 반잔도 못마시고 일어나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서글퍼져서 이제라도 벌컥벌컥 마시고 가고 싶다. 흐음.. 그러나 팁을 주는 것이 너무도 아까운지라. 일단 참고.. 나중을 기약한다.
차이나타운까지 걸어올라와서 맥도널드의 햄버거를 하나 사 들고 (맥도널드는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가격을 책정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때문인지.. 한국에 없는 메뉴가 여긴 상당히 많다. 가격비교 불허다..) 근처 공원에 가서 점심을 해결한다. 이 나라에서는 한국처럼 점심시간 때 되어서 우-몰려나가 북적북적 밥을 먹거나 하지는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 떄의 이곳 푸드코트는 장사진을 이룬다). 그냥 자기가 편한 시간에 슥 나가서 먹고 오거나 빵을 사와 책상 위에 놓고 일하면서 먹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까마귀나 갈매기에게 나눠주면서 먹는다. 이런 모습이 겉에서 보기엔 매우 아름답고 평온해보이기는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도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저들도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일들과 할 일들을 얘기하면서.. 상사 욕을 늘어놓으며 같이 점심식사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숙소로 돌아와 약간의 오침을 즐긴다.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고.. 이곳은 정말 조용하다. 바로 몇 블록 건너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이 너무너무 조용하다. 매일같이 부수고 새로 짓고 그러는 서초구 양재동과는 딴판이다… 책 하나 들고 좀 읽어보려고 하다가 스르르 잠에 든다. 어느새 3시가 지나고 또 다시 짐을 들고 나섰다.
앞으로 렌트를 구할 때까지 한달간 살게 될 아파트는 <뉴웨스트민스터>라고 하는 최초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주도 였던 고풍스러운 도시이다. 카지노와 칼리지가 동시에 존재하고.. 바로 앞에 프레이저 강이 고고하게 흐른다. 전체적으로 좀 전의 숙소보다는 (1층이라서 그런지 심한 오르막이라서 그런지) 차들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러운 편이지만.. 그래도 집 자체는 깔끔하고 주택가로 구성된 동네도 마음에 든다.
짐을 풀고 나서 랭리에 있는 차선배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랭리는 광역뱅쿠버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주로 교육기관과 주택가로 구성된 그림 같은 도시다. 커다란 하우스들이 널찍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죄다들 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대중교통은 척박하다. 마을버스가 다니기는 한다는데 1시간에 한 대 꼴로 있다나?
집.. 참 좋더만.. 오늘 새로 입주한 아파트를 보고도 느꼈던 것인데.. 기본메뉴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다. 요새 우리나라 신규 아파트들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사람이 살 때 기본적으로 누려야할 인프라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아파트는 방 1개 짜리.. 거의 독신자용 아파트에 가깝다. 하지만 거실과 부엌 공간의 넓이를 봐서는 양재동 우리집보다 넓어 보인다. 차선배가 살고 있는 하우스는 집 앞 정원과 뒷 뜰을 가지고 있다. 이 땅 넓은 나라에서는 이 정도의 공간이 사람 사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한국의 시골에만 내려가도 기본적인 주거공간은 상상외로 넓다. 문제는 서울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간만에 먹는 곱창전골은… 정말.. 맛있었다. 게다가 며칠간 퓨전 중국요리로 속을 채웠더니 이렇게 얼큰한 무언가가 너무도 속에서 간절했던 모양이다. 잭다니엘에 곱창전골을 실컷 먹고 나서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온다. 고맙게도 쌀과 김치 부식들까지 챙겨주셨다.
TV를 좀 보고 나서 씻고 짐정리를 마저 한다. 이제 짐을 풀 때마다 이걸 다시 싸서 또 이사를 다닐 생각을 하니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