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카드..


SIN 카드를 받고..

뭐 하는 일도 없는데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가는 것 같다. 며칠 전.. 아내와 같이 TV를 보던 중.. 엇! 그러고 보니 엊그제가 이민 온지 한달 되는 날이었네.. 하며 뒤늦은 축하를 나눈 적이 있는데.. 요새 생활이 죄다 그런 식이다. 만사가 편하고 너무도 잘 적응하다 보니까, 오히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불안해진다. 그러다 보니 뭘 한 가지를 하려고 해도 내심 철저해지려고 긴장하고 조급하게 행동하는데, 곧 이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벼락을 맞은 듯이 뜨끔해지면서 ‘뭐.. 천천히 하지..’하고 돌아서게 된다. 결국 아무것도 안하게 되고 마음만 바쁜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한가함을 즐기며 산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어쩌면.. 자가용을 아직 구입하지 않은 채 비싼 대중교통을 계속 이용해야 하기 때문인가?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새 집에 이사 가기 전에 입주하자마자 당장 필요한 몇 가지를 사려고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널찍한 베란다 난간을 막아 둘 그물망이다. 바로 밖으로 뚫려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딸기가 뛰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홈디포>라고 하는 주택/건축/인테리어 전문 할인마트에 가서 마음에 드는 모델을 알아본다. 그러다가 가격을 최고로 중요시 여기는 내 입장과 디자인을 중요시 여기는 아내의 입장이 상충해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다가 마음이 상한다. 이럴 즈음이면 정작 새로 입주할 집의 베란다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크기가 얼마인지는 전혀 기억이 안나는 상태다. 결국 아내가 선택한 그물로 샀지만 이게 그 집에 갖다붙혀 보면 어울릴지, 길이가 맞을지는 누구도 장담을 못한다. 따지고 보면 그냥 그 집에 입주한 후 잘 요모조모 따져본 후에 천천히 준비해도 되는 거였는데도 말이다.

이러다 보니 영양가있는 일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결과가 벌어진다. 한번 티켓을 끊으면 한시간 반 동안은 무료로 환승할 수 있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더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쇼핑마트라도 갈라치면 시간 안에 쇼핑을 마치기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 시간 계산을 해서 무사히 쇼핑을 마치고 나더라도 버스가 시간안에 안와주면 티켓이 무용지물이 되는 수가 있다. 당연히 마음이 조급하고,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눈에 잘 안들어온다. 젠장 차라리 차를 사버릴까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당장 고정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고정지출만 늘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차를 구입할 경우, 월부금을 공제하더라도 연료비와 보험료 도합 월 300불은 넘게 나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남아돌다 보니까, 더 조급해져서 시간운용을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놈의 백수생활은 벌써 경력이 몇 년째인데.. 이렇게 적응이 안되는지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사를 가면 빨리 정리를 마치고 학원이라도 부지런히 다녀야 할 셈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민자 대상의 영어시험을 본 결과, 나는 이곳에서 무료 영어교육을 받을 수준이 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긴.. 사실 이민와서 이제껏 의사소통에 별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남들은 무료로 받는 영어교육을 돈내고 학원을 다니려니 왠지 억울하다. 이민자 프로그램은 조금 할인이 되긴 하지만…)

며칠 전.. 드디어 SIN 카드를 손에 넣었다. Social Insurance Card.. 말 그대로 사회보험 카드라는 것인데, 이 나라에서는 국민연금, 고용보험, 실업급여, 육아보조금, 이민자 영어교육, 자녀 교육비 등등에 필요한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게 되어있는데(물론 월급쟁이를 하면 급여에서 자동공제된다) 그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하는 카드이다. SIN 카드에 있는 번호, 즉 SIN 넘버는 각각 개인에 따라서 고유의 번호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지만, 그 번호를 가지고 정부가 주로 어디에 사용하는지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좌우간.. 이 나라의 영주권자라는 신분을 증빙할 수 있는 한가지 증명서는 획득한 셈이다. 이 나라는 정말 … 모든 것이 느리다. 한국 같으면, 귀화신고 하자마자 주민등록증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SIN카드도 딱 보면 대한민국 공중전화카드보다 훨씬 너절하게 생겨 먹었다. 플라스틱 카드에 숫자를 인쇄(돌출 같은 것도 없다)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근데.. 이런 걸 한 달이 지나서야 보내준다. 이민 온지 한달이 되어서야, 드디어 뭔가 하나를 받은 것이다. 이게 있어야지만 집도 살 수 있고, 차도 살 수 있고, 영어학원도 할인을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반대로.. 나름대로 철저하게 일 처리를 하기위해 느린 것이라면.. (아마 아니라고 보지만.. 워낙 놀며놀며 일하는 족속들이기 떄문에)뭐 이해해줄 수도 있다. 아니.. 뭐 차라리 더 낫다고 할 수도 있다. 카드에 쓸데없이 화려하게 치장하느라고 돈 들이지 않은 것도 귀엽게 봐줄 수도 있다. 그래.. 이렇게 좋게 좋게 이해하면서 살아야하겠다. 어짜피 내가 선택한 나라이고..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살아보려고 여기에 왔으니.. 여기 법을 따라서 내가 맞춰가면서 살아야 하겠지..

얼마 전, 차선배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데 이민온지 6년된 어떤 분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문득 느낀 몇 가지가 있는데, 일단 부부동석 모임이 되다 보니까(여기선 저녁 초대는 무조건 가족초대라고 봐야한다) 분위기가 온화하고, 술도 적게 먹고 이야기가 딴 곳으로 안 새서 좋았고, 그리고 이야기의 주제들이 정원 가꾸기, 실내 인테리어 등등.. 한국에서 남성들 저녁 약속의 대표격인 삽겹살 모임에서 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어서 신선했다. 아영씨 입장에서는 바비큐 파티이다 보니까 별로 준비할 것이 없어서 여성들에게 부담이 안되어서 좋다고 얘기를 한다. 그래.. 뭐, 이래 저래 따져보다 보면 나 한테 잘 맞는 부분이 더 많은 나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민 온지 한 달 남짓..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이 나라의 이 많은 여유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반대로 한국, 서울에서의 그 답답함과 스트레스는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나름대로의 답의 꼬리의 꼬리를 물고 뜰어가다 보면.. 결국 땅덩어리의 크기 차이가 결코 무시 못할 이유가 된다. 지금 한국에서는 몇 억을 투자해 어학연수와 MBA를 수료해서 대졸 실업자군에서 탈출한 신입사원들은 이제 미국 공인회계사 준비에 야근에 철야까지 한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은 토익시험준비에 밤을 새운다. 그래야지 살아남을 수 있고, 그래야지 남들보다 우월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도 그런 엘리트들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엘리트들의 몇 천배가 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소박하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나라가 이곳인데.. 그것은 역시 땅이 넓고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 많다. 아무리 첨단기술산업의 시대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삶은 땅에서부터 추출되는 1차 자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석유를 뺏기 위해 첨단 무기로 수만명을 죽이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라!) 한국의 경우 인구밀도가 워낙 높지만, 수도권에 편중되어있기 때문에 더욱 스트레스가 심하다. 여기에 김영삼 정권부터 농업을 공공연히 포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광물산업을 퇴출된지 오래되었다) 더욱 더 일반 국민들이 골고루 생활보장을 받을 수 있는 길과는 멀어졌다. (서구 유럽 중에 최고의 복지 국가들은 모두 농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한보다 땅이 더 좁은 네덜란드조차도!!)

난 아직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좁은 땅에서 복닥거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미래를 피곤하게 할 수 있는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수한 대졸 인재들이 실업자로 묻혀가는 것 보다는 어떻게든 전 세계에 퍼져서 자기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나은 것이 아닌지..(물론 한국적 가치관에서 봤을 때, 가족적으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개인보다도, 국가보다도, 가족이 최고의 순위에 자리하는 가치기준이다.)

에고… 남 걱정은 그만하자.. 이제 앞으로 1년간 살게 될 집에 들어가 새로 살림을 꾸리고,앞으로 몇 년을 더 하게 될지 모르는 비디오 가게 운영 준비를 하면서, 앞으로 평생 내게 도움이 될 영어공부를 하며 열심히 생존 터전을 마련하는 일만 남았다.

IP Address : 24.76.150.13

석진 (2003-04-12 14:10:57)
이민간지도 50일이 되어가는구나.. 고국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많이 있구나.. 캐나다의 생활을 그대로 즐기렴..^^ 잘 적응하는 걸 보니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MADDOG Jr. (2003-04-12 14:36:21)
후후 그런가??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