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때는 하고 쉴 때는 쉰다

한국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 귀에 못이 박혔을 단어 중 하나이다. 할 때는 하고 쉴 때는 쉰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마인드가 도출되었는지 몰라도, 학창 시절에 선생이 항상 하는 얘기였고, 군대에서 고참이나 간부들이, 직장에서 상사들이 항상 주지하던 가치관이라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지던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진보를 자처하는 누구라도 이런 마인드에는 굳이 저항할 필요를 못느꼈을 것이다. 열심히 그리고 빨리 일을 해치우고 푹 쉬자는 매혹에 쉽게 벗어나지 못할 수 있고 일종의 업무스타일로 치부할 수도 있기 떄문이다. )
여기에 대척되는 표현은 아마도 “하는 둥 마는 둥”일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슬렁슬렁(설렁설렁)”이라고도 한다. 일을 집중해서 하지 못하고 놀며놀며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 표현들은 대단히 관찰자 입장에서 판단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쩄건.. 막상 이곳에 오니 캐나다 사람들의 모든 업무 스타일은 “하는 둥 마는 둥”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내의 업무 스타일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역시나 군대의 경험 때문일까? 나에게 “할 때는 하고 쉴 때는 쉰다”라는 가치관이 더 깊숙히 박혀있는 것은..??

여기 사람들은 뭐든지 한번 하는데 오래 걸린다. 우리 집 카펫이나 몇가지 시설에 상처가 있는 것을 관리인이 확인하러 오기로 했었는데 결국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우리가 직접 사진을 찍어서 관리인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녀는 너무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그랬다. 미안하다는 얘기를 연신 해대지만.. 가끔 단지 내에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 딸네미를 데리고 다니며 동향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모습만이 보인다. 쇼핑마트에서도 계산대에 줄이 줄어들지 않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계산대를 확인해보면 여지없이 캐셔와 구매자가 수다를 떨고 있다. 별 내용도 아니다. 먼저 캐셔가 바코드를 잘 찾지 못하거나 바코드 판독기가 인식을 못한다. 그럼 구매자가 그걸 보고 기계가 고장이 났는지 몇 년 된 기계인지를 묻는다. 그럼 캐셔는 자기가 무슨 일이 있어서 피곤했다든지, 오래된 기계를 주인이 안바꿔준다며 주인 험담을 하든지.. 하며 수다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백인들이나 라틴계 사람일수록 심하고, 중국인들은 거의 이러는 법이 없다. 어쩄건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열통이 터질 지경이다.

근데.. 이를 두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열흘 전 새 집에 우리가 한국에서 부쳐온 짐들이 도착했을 때에도 참신함을 느꼈는데… 여기선 짐을 나를 때 “달리”(일종의 카트인데.. “ㄴ”자에 두 바퀴가 달려있는 구조로 짐 나를 떄 쓰임)를 사용하먀 “슬렁 슬렁”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베란다를 통해서 (우리집은 1층이다) 박스를 휙휙 집어 던져서 30분안에 끝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여기선 절대 무리하는 법이 없다. 등에 짐을 짊어지거나 하는 법도 없다. “달리”위에 박스 3개 싣고 카펫 깔린 복도 위로 슬렁슬렁 다니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4번 왔다갔다 하고는 음료수 한 잔 마시고 또 말을 건다. 첨에는 좀 답답했는데, 이 친구들과 이 얘기 저 얘길 나누다 보니까 재미가 있다. 징그럽게도 이사를 많이 다녔던 나로서는, “이사”하면 그 팽팽한 긴장감이 돌면서 정신없이 일이 처리가 되는 그런 광경만 상상했었는데(정말이지 난 한국에서 한번도 유쾌하게 이사를 해본 적이 없다. 이삿짐 센터 직원들은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인상을 쓰면서 일을 하는지…), 여기선 그야말로 슬렁슬렁 농담하면서 유쾌하게 일을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혼자 했어도 1시간 30분이면 다 날랐을 이삿짐을 3시간에 걸쳐서 끝낸다. 사실 나로서는 유쾌하게 이사가 진행되는데 뭐 싫을 것은 없다. 이 친구들에게 이 동네 사정이나 여기 생활에 대해서 듣는 것도 좋다. 교민의 관점과 또 다르다. 하지만 이 친구들 사장은 대단히 불쾌할 일이겠지.. 한국에서 조건부 사업이민 온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또 다른 사례는 며칠 전 초고속 인터넷..(그래봤자 한국 케이블 인터넷의 1/10 수준이다) 설치를 해주는 사람이 왔었는데.. 이 친구도 매우 재미있게 일하는 친구다. 슬렁슬렁 농담해가며.. 케이블 선도 정리해주는 법이 없다. 그냥 벽에 있는 단자에 띡 꽂더니 소파 뒤로 케이블 선을 휙 넘겨서 컴에 연결한다. 그렇게 해서 인터넷이 연결되는 걸 끝까지 확인하고 가는데(내가 겪었던 한국의 인터넷 설치 직원들은 일단 케이블 연결만 하고 1시간 후에 인터넷 연결이 될 거라고 하면서 휙 가버린다), 연결될 때까지 이 얘기 저 얘기 수다를 떤다.

“뱅쿠버 온지 얼마나 되었냐?”
“음… 한 달 좀 넘었다”
“여기 날씨는 어떠냐?”
“날씨? 매일 비오는데?”
“킬킬.. 그래도 좀 센티멘탈하지 않냐?”
“센티.. 음.. 근데 여기 사람들은 왜 우산을 안쓰고 다니냐?”
“글쎄..후후”

이렇게 수다를 떨다보면 마침내 인터넷이 연결된다 (원래 ISP에서 모뎀을 등록하는데까지는 좀 오래 걸린다) 그리고 나면 아웃룩익스프레스 편지함 설정이라든지.. 고장발생시 신고요령이라든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는 집을 나선다. 나가면서 이 친구 툭하고 질문 하나 던진다

“한국에서 왔으면 너도 태권도 검은띠냐?”
“물론 한국남자들은 군대에서 다 검은띠를 딴다”
“맞다 나 학교 다닐 떄 한국인 친구 있었는데.. 걔가 그러더군.. 근데 그 친구 한국에 돌아가더니 하루에 20시간 일한다고 하던데 사실일까?”
“(비참한 심정을 만지며) 휴우… 아마 사실일 거다.. 어 그리고 그거 아냐? 한국에서는 회사에서 술마시는 것도 업무의 연장이다”
“(깜짝 놀라며)술마시는 것도 일이라고?”
“그렇다니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밖으로 나가면서) 걱정 말아라. 여기선 하루에 8시간 밖에 일 안한다. 아! 그리고 여기서 술마시는 건 대개 일 안하는 사람들이다.”

글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일하는 것이 더 맞는 방법인지는 … 일본인들은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자기가 맡은 시간에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손님이 없을 때는 청소라도 한다고 한다. 그것이 일본인이 생각하는 고용계약이다. 한 떄는 나 역시 이런 업무 스타일을 더 좋아했다. 만약 사람 사는 세상이 발전하는데 필요한 생산량이 100이라면.. 그리고 사람의 기술이 점점 발전해서 100만큼 생산하는데 하루에 2시간만 일해도 된다면.. 그 2시간 동안 바짝 일하고나서 6시간 동안 푹 쉬거나 다른 자기 발전을 꾀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왜.. 군대에서 그러지 않던가? 분대마다 업무 할당량이 있으면.. 일 잘하는 분대는 30분 만에 끝내고 20분간 드러누워 쉰다…

근데.. 사회로 막상 나와보니 그렇게 할당량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항상 더 하게 되어있었다. 하는 사람은 항상 하고 쉬는 사람은 항상 쉰다.(대개 피고용자가 일하고 고용주가 쉰다) 기술이 나아져서 2시간만에 생산량 100을 이룰 수 있으면 나머지 6시간에 300을 더 만들라고 요구받는 것이 사회였다. 그러고 보니 나 같은 프리랜서들은 2시간만에 100을 해내고 6시간동안 “일을 하는 척”만 하는 잔머리도 발생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과학적인 분석보다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논다”마인드의 더 큰 문제점은 자잘한 세심함을 놓친다는 것이다.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놀고 싶을 때,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가 더 많이 노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 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에 초점이 두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업무 스타일은 “빨리빨리”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업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보이는 것은 일단 제껴둔다. 굳이 배려를 하지 않아도 되어 보이는 것도 제껴둔다. 재빨리 목표만 달랑 달성하고 끝을 맺는다. 규정이나 지침에 제시되어있지 않으면 안전이나 호환성, 기타 다른 문제들은 신경 쓸 필요도 없어진다. 결국 “할 때는 하고 놀 떄는 논다”라는 마인드는 천민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점은…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놀다보니까.. 정작 놀라고 하면 노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한민국 남자들의 80%이상이 “논다”라는 단어를 “드러누워서 TV본다”와 연결시킬 것이다. 모든 것이 목표중심적이기 떄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직장내 접대나 회식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아내와 쇼핑을 가더라도,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가더라도 남자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 가장 싼 가격에, 효율적인 동선을 이용해서, 시간낭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산책”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 그냥 동네 한 바퀴 돌고 나면 “산책”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다 보니 머릿속에서 긴장이 풀어질 때는 오직 아무 생각없이 TV가 주는 정보만 받아 먹고 있을 때다. 그것이 남성들이 가지는 최고의 휴식이다.

나 역시 업무 스타일 때문에 처음에는 아내와 갈등이 심했었지만 이내.. 그것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내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려면.. 아내와 같이 살아가려면.. 점차적으로 변하게 되겠지만..

며칠전 PR카드(영주권카드)를 받고 운전면허를 신청했다. 일단 임시면허를 받았고 몇 주 후 운전면허증이 송부된다고 한다. 한 달 전에 신청한 의료보험증이 아직 안 온 걸 보면, 운전면허증도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다. 이 모든 걸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슬렁슬렁 업무처리를 해도, 누구 하나 피해보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어릴 적에 TV에서 본 외화 “천재소년 두기”에서 두기가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간 에피소드가 있었다. 병마에 저항을 포기한채 시달리고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고 두기는 숙연한 마음과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는데, 그곳에 상근하고 있던 선배 의사들은 수술실에서 조차 킬킬대면서 슬렁슬렁 일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서 두기가 수술실을 뛰쳐나오게 되는데.. 결국 알고보니, 두기의 숙연함과 긴장은 관찰자나 관광객의 마음가짐이었고 선배들의 느긋함은 현지에서 생할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었다는 얘기…… 그래, 조금씩 긴장을 풀어나가야 겠다. 어짜피 사람사는 곳이고,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어딜가나 자신의 삶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환경을 최대한 즐기면서, 유쾌하게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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