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로 이민을 오기 한달 전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정신병에 관한 상담 프로를 보게 되었는데, 프로그램의 자문 역할로 초대된 정신과 전문의가 재미있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정신분열’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합의하는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 경우 발생한다는 것으로, 예를 들어 부의 축적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그것을 경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역시 정신분열이라는 것이었다. 이 방송을 본 나는 (그야말로 알러지처럼) 벌떡해서 ‘그럼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 대로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데, 그 교과서들이 죄다 정신분열 책이냐..’하며 광분한적이 있는데, 어쨌든..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그 전문가가 공공 방송에서 내뱉은 말이 다시 주워담아지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양반도 ‘좀 심하게 비유를 하자면…’이라는 단서를 붙였고, 나에게 누군가가 정신분열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서 뭐 그리 화가 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유교적 엄숙주의를 바탕으로 시행되는 나라의 공교육이 현실적인 사회적 합의와 괴리감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왠지… 우리가 사회문제라고 (겉으로) 지적했던 사항들을 당당하게 지지하고 나선 것 같아서 노골적인 포르노를 보는 것처럼 구역질이 났었던 것 같다. 어쩌면 (습관처럼) 공자님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위선이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다.
까놓고 얘기하자. 나? 돈?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얘기를 해서, 돈이 해결해 주는 생활의 편의성을 좋아한다. 돈이 제공하는 고품질의 서비스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돌비 디지털이나 DTS 음향시스템을 즐기면서 대형화면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원한다. 내가 가진 디지털 카메라는 비교적 좋은 것이지만, 더더욱 비싼 고성능의 카메라와 렌즈가 있다면 내가 원하는 이미지에 더 가까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생 생활을 일구어야 할 걱정 없이, 그냥 이 공부 저 공부만 하면서 살고 싶은데 돈이 많다면 해결될 수 있다. 내가 돈이 많다면 저질 물건에 말도 안되는 값을 붙여서 사탕발림을 해서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돈이 많다면 내가 좀 더 너그러워지고 착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착해지기 위해서 돈이 많이 필요하다면,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착하게 살 수만은 없는 사회라는 점이다. 이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핵개발 등 군비 경쟁을 해야 한다는 냉전시대 논리의 모순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 돈을 벌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럼 부자들은 모두 경멸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인가? 글쎄… 100%는 아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적어도 내가 30년 이상 몸 담았던 한국사회에선 그렇다.
사실 돈을 벌기 위한 방법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자유시장 경쟁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선 최우선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승자가 되어야 돈을 벌 수 있다. 직장에 다닌다면 경쟁자를 물리치고 승진을 해야 한다. 사업을 한다면 경쟁업체가 망하면 망할수록 돈을 더 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업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수익을 최대한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알고 있던 한국사회 사업체나 기업들의 모습은 수익 증대보다는 항상 비용 절감에 더 관심이 있었다. 말하자면, 직원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주지 않는 다든지 건설업체가 규정대로 재료를 쓰지 않고 날림공사를 한다든지,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도록 회계 조작을 한다든지 하는 방법들이다.
물론 이렇게만 하다 보면 경쟁력에서 뒤쳐질 수가 있다. 따라서 발주기관이나 감독기관에 향응을 접대하거나 뇌물을 제공하는 음성적인 면으로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흔히 우리가 얘기했던 ‘술상무’니 ‘접대영업’같은 것들을, 내가 단지 낭만으로만 취급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란주점, 룸살롱, 매매춘과 같은 한국의 밤문화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씨랜드 수련장을 건설할 때, 건설업자가 향응 접대가 아닌 건설 그 자체에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면, 그리고 공정한 심사와 감독으로 건설이 이루어졌다면 어이없는 어린 희생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뇌물을 주고 날림 공사를 한 사람, 뇌물을 받고 감독을 소흘히 한 사람, 뇌물을 수수할 때 장소와 性을 제공하고 그 수수료로 부를 축적한 사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극히 당당하게 이루어지도록 묵인한 사회 전체가 그 어이없는 죽음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용 절감은 그렇다 치고 수익창출에 있어서도 그리 유쾌하지 만은 않다. 시장경제에 있어서 수익창출이라는 것은 결국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인데, 부단히 품질개발에 노력을 경주해서 뛰어난 상품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킨다든지, 새로운 틈새 시장을 만들어내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내가 빨리 달려서 승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경쟁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것이 훨씬 쉽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전매특허인 대자본을 투입해서 가격을 터무니 없이 떨어뜨려 시장을 장악하고 중소기업을 말살하거나, 정치적인 공작을 통해서 경쟁기업을 쓰러뜨리는 일이 너무나 허다하게 일어나왔다. 당장 캐나다 밴쿠버에 1만 가구 가까이 되는 한인 사회에서도 그런 모습들은 여지없이 나타난다. 누가 무슨 장사를 해서 재미를 보면 당장 그 앞에 더 번듯하게 동종업을 벌여서 상대가 애써 일궈놓은 텃밭은 가로채는 일이 흔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의 축적 이후에 발생한다.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안주고 경쟁자 다리를 걸어서, 그야말로 개처럼 벌어서 모아놓은 돈들은, 어느 정도 벌어두면 그 뒤로는 자기가 알아서 불어나게 된다. 부동산, 주식 및 사업에 대한 투자들이 부의 재확장과 집적에 공헌하게 된다. 여기서는 몸을 쓰는 물리력보다는 정보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물론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 뇌물 수수나 향응제공이 또 일어난다. 하지만 이 때부터는 사실 도둑놈이나 나쁜 놈이라는 욕을 먹지 않더라도 돈이 지들이 알아서 무럭무럭 자라주니 우아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단계까지 올라오면 남들한테 피해를 안주고 돈을 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부가 특정 계층에게 계속해서 모이는 집적의 악순환이 벌어지면서, 서민들이 희망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6일씩(지금은 5일인가?) 직장에 나가서 수당 없는 잔업까지 해가면서 일하고 꼬박꼬박 나라에 세금을 낸 일반서민들이, 인건비용을 줄이고 경쟁에서 승리한 부자들 정도의 부를 축적하게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중산층에 진입한다고 볼 수 있는 기업에 취직을 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내세울 수 있는 대학교육을 마쳐야 하는데, 사교육이 공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그렇게 되기란 역시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자유시장경쟁 체제’라는 체제의 기본 개념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부자들은 대대로 부자로 살고, 가난뱅이들은 대대로 가난을 물려받게 되는 논리가 사회적 합의로 형성이 된다.
그래도 캐나다의 이 밴쿠버에서는.. 인간들이 게으른 건지, 아니면 그런 사회적 합의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달고 있지 않는 것인지.. 가난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기들의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다. 물론 그런 인프라를 제공하는 사회 안전망이 이런 안정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린 몇 억짜리 보트나 캠핑버스가 없더라도, 1600cc짜리 리오에 텐트를 싣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캠핑을 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게 시골 동네 슈퍼에서 일했던 이민 1세대인 우리가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런 정도의 인생의 여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굶어 죽거나, 전기가 끊겨서 촛불 켜고 지내다가 화재로 숨지거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식의 다리를 잘라내는 일이 그래서 이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렇게 터무니 없는 불평등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대물려진 가난이, 사람들에게서 마음의 여유를 앗아가게 된다. 부자 자식은 부자로 자라서 부자로 교육받고 착하게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집 자식은 평생 자신과 부모와 사회를 원망하면서 삐뚤게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스럽다. 삶의 희망을 앗아가게 된다. 앞서 말한 ‘내가 돈이 많다면 착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역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희망을 앗아가게 된다. 그리고 부의 사회적 분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게을러서 그랬든, 대물림 받은 것이든) 가난한 사람들의 기초 생존권 보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부자들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방조하는 사회에 대한 일방적인 적개심이 발생하게 된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심이 지하철에 불을 지르고 고급차 유리창을 깨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부의 축적 이후 발생하는 악순환이 이 사회의 시한폭탄들을 양성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시한폭탄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교화를 시키면 좀 더 사회가 안정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한폭탄은 10개 중 한 개만 터지더라도 피해가 막심하다. 때문에 좀 더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하다.
주저리주저리 길게 떠들었지만, 한국사회에서 부자들이 욕을 먹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돈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자들을 싫어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 어느덧 내 주위에는 부자들이 많아졌고, 그들과 어울리고 친하게 지내면서 살고 있다. 때로는 부러워한 적도 있고 때로는 시샘을 한적도 있지만, 그것이 그들과의 인간적인 교류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기본적인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말이 좀 안 통한다는 것 뿐…
언젠가부터, ‘부의 축적을 우선시하는 삶’을 우리는 ‘현실적인 삶’이라고 얘기를 하게 되었다. ‘철들고 나서 현실적으로 사회를 알게 되었다’는 등의 표현이 그런 것이다. 어쩐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온 ‘리얼리즘’과는 완전히 상반된 의미인 것 같지만, 이곳 영어권 사회에서도 ‘부의 축적’ 또는 ‘생계유지’에 대한 얘기를 할 때 reality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사람 사는 것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서 ‘현실적 real’이라는 것은 ‘비현실적 unreal’과 상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일 게다. 다시 말해서, ‘부의 축적’을 중시하는 것을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부의 축적’이 아닌 다른 것을 중시하는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부의 축적’을 현실적인 삶이라고 일컫는 것은, 돈이 아닌 사회적 정의, 인간의 도리, 개인의 꿈을 중시하는 것들을 모두 비현실적이라고 말하게 되는 셈이다. 정말인가? 그런 것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정글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싸워 승리해야 살아남는 다고 하는 것이 현실인가? 그렇다면 만일 내 꿈이 착하게 살기 위해 10억을 만드는 것이라면, 10억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꿈과 현실이 일치하는 삶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정신분열이 되는 것인가?
간혹 심심찮게 신문을 보면 50 평생을 떡볶이 장사를 해서 모은 1억을 대학교에 기탁하는 할머니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 할머니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1억을 모으는 것? 장학금을 만드는 것? 맛있는 떡볶이로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 무엇이 꿈이든 무엇이 현실이든, 그 할머니의 삶은 (실제 생활은 지지리도 힘들었겠지만)멋지게 꿈과 현실을 다 만족시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과연, 남의 나라에 건너와서 사는 나의 삶도 꿈과 현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