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가슴을 뜨겁게 뛰게 하던 글…

예전에 읽던 글인데… 오랜만에 다시 발견했습니다. 김규항님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혁명은 안단테로
사회주의는 이론이나 사상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에 타오르는 연민과 분노와 만나 태어난다.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궁핍이, 또 한쪽엔 견딜 수 없는 노동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다.”(레옹 블룸) 연민은 자선을 낳고 분노는 싸움을 낳으며 다시 그 둘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자선도 싸움도 별 소용이 없다는 깨우침을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가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정서가 생략된 과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연민이나 분노가 사라진 이론과 사상은 강퍅하고 차갑다. 사회주의는 그 최대 수혜자여야 할 인민에게 무섭고 살벌한 얼굴로 다가가곤 했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론의 역사는 과학이 정서를 지배할 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예술가와 얼마나 소중한 창의성들이 그 앙상한 과학적 예술론의 손에 목졸려 죽어갔던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80년대 중후반 한국의 인텔리들은 사회주의에 열광했다. 그것은 부르주아 인권운동이라는 정서적 재료가 민중민주 혁명운동이라는 과학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텔리들은 본 회퍼를 덮고 그람시를 읽었으며 이내 레닌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인텔리들이 80년대 중후반의 불과 몇 년 동안 마치 펄펄 뛰는 연어처럼 네오맑시즘에서 맑시즘으로 사회주의 이론사를 거슬러 오를 수 있었던 건 대개 군사파시즘이라는 절대적인 억압상황 덕이었다. 군사파시즘이 완화되고 동구가 무너지자 그들의 열정은 구멍난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사라져갔다. 사회주의의 길에 인생을 걸겠노라 맹세하던 수많은 한국의 인텔리들은 일제히 청산을 선택했다.

그런 어이없고 질서정연한 청산은 그들이 변명으로 삼는 상황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앙상한 사회주의 때문이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80년대 후반 한국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몇몇 영재아들의 경제학 리포트의 지배하에 있었다. 80년대의 한국을 19세기말의 러시아와 같다고 보는 정도의 앙상한 과학이 세상의 변화와 그 변화에 관련한 정서의 무게를 감당할 방법은 없었다. 카드섹션의 카드들처럼 일제히 사회주의자가 되었던 인텔리들은 다시 카드가 뒤집히듯 일제히 사회주의에 침을 뱉었다. 오늘 그들은 자신들이 관여한 사회주의 편향의 문제를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로, 자신들이 관여한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사회주의 자체의 실패라고 강변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시민운동단체에 얼마간 돈을 내고 <한겨레>를 구독하며 홍세화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노래방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며 한편으론 신문에 팔짱을 끼고 돼먹지 못한 얼굴로 대문짝처럼 서있는 펀드매니저들에게 정신을 판다. 그들은 지울 수 없는 그들의 사회의식의 흔적을 마스테베이션하며 삶을 위무한다.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의 전적인 생산자이자 그것을 자정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본주의가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체제라면 인류는 이쯤 해서 지구를 (자연의 자정능력을 가진) 동물들에게 돌려주는 게 낫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과 지성에 대한 모욕이며, 오늘 인류가 미래를 희망하는 일이란 바로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리멸렬해온 한국의 인텔리들은 이제 그 동안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사회주의의 비전을 모색해온 옛 동료들을 다시 찾을 때가 되었다. 동구를 말할 필요는 없다. 대체 우리가 새로운 사회주의를 처음 시작할 자격을 갖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과거의 실패가 짐스럽다면 사회주의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임을 잊지 말고 느리게 안단테로 가면 된다. 안단테라면, 우리가 혁명을 회피할 이유는 정말 적어진다. 안 그런가. | 씨네21 1999년_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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