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에 썼던 ‘밴쿠버에서 살아가는 법’이라는 글에서, 우리 세 식구가 한국에서 생활했던 수준으로 살려면 월 4천불 정도 소득은 있어야 하고, 여기서 세금 공제하고 3천불 정도의 실소득으로 주거비용 및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선 둘이서 각각 시간당 12불 정도는 받는 직장을 잡아야 월 2천불은 벌 수 있는데, 이민 1세대로서 이런 직장을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로서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민 1세대로서 현지 직장에 취업하여 온전하게 월급받아 먹고 사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으며, 이곳에서 드는 생계비가 한국에 비해 만만치않게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퍼다 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겠지만)
좌우간, 그 글을 쓴지 2년이 지나고, 그동안 이삿짐도 날라보고, 정육점에서 고기도 날라보고, 섬에 들어가 맥주 및 각종 와인 박스도 날라보고… 뭐 이런 일들을 하다가, 섬 밖으로 나와 6개월 간의 혹,독,한, 취업활동 끝에 지금의 작은 일자리를 하나 얻어서 살고 있다. 뭐… 회사가 크다해도 결국은 소매업종에다가 고객서비스 업종이고, 윗대가리들은 할일없이 쓸데없는 생각(주로 직원들 쪼는 방법)이나 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다가 크게 내세우기 좀 민망스럽지만, 그래도 덕분에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살고, 2년 전에 내가 불가능하다는 급여의 1.5배를 좀 넘게 받으면서 안짤리고 잘 버티고 있으니 나로서는 별로 불평할 처지가 못되는 형편이다.
물론 처음 취직을 했을 때만 해도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6개월 이상 버텨낼 수 있을지가 나로서도 의심스러웠는데, 문제는 당연스럽게도 “영어”!!!. 아마도 런던드럭 전체 직원을 통털어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인간이 아니었을지… 무리도 아닌 것이, 이민 오기 전까지 30년을 넘게 살면서 영어 학원이란 곳에 단 한번이라도 간 적이 없었고, 이민 올 작정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인생을 살면서 영어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을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대학다닐 때조차 영어와 관련된 교양과목들은 죄다 C,D로 마감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담당해서 일하고 있는 “컴퓨터 수리기사”라는 직급이, (음침한 구석에 쳐박혀서 하루종일 컴퓨터 분해와 조립, 그리고 수리를 묵묵히 반복하는 일상이라는 환상과는 달리) 하루종일 전화로 고객과 원격 기술지원도 해야하고, 자기들이 고장내놓고 바꿔달라고 따지러 오는 고객들을 상대해야 하기도 하고, 마치 의사들이 수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증상을 잘 들어야 하듯이, 컴퓨터 증상을 꼼꼼하게 알아들어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는 입사 초기에 정말 심각한 것이었다.
고객들이 덩치 큰 물건을 살 때는 매장에서 물품을 채우는 다른 직원들에게 사내방송을 해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그거 하기가 민망해서 직접 고객이 구입한 물건을 운반해주기도 하고, 똑같은 물건을 세일즈를 하는 경우에도 내가 할 때는 갸우뚱하던 고객들이, 입담이 좋은 친구들이 ‘구라’를 풀고 나서는 제꺼덕 제꺼덕 사는 경우를 몇 번이나 봐야 했고, 고객이 요청하는 사항을 못알아듣고 그냥 ‘오케”오케’하다가 황당한 실수를 한 적도 많았으며, 가장 주눅이 드는 경우는 전화를 받았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사람 바꾸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때였다. 그럴 때마다, 아.. 내가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자문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렇게 한 두달 지나고 나니까.. 뭐 이제..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현지인 직장에 근무하려고 했던 것은.. 한번이라도 도전조차 해보지 않고 한인 사업체에서만 일한다면 나중에 후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때문이었고, 만일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고 말도 잘 통하는 직장 동료들과 같이 재밌게 일을 할 수가 있다면 뭐가 나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고객들의 불평들을 듣고 있노라니, 정말이지 이가 갈리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뭐… 막상 다른 직장을 찾아 보려니..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일단 한번 눈이 높아지고 난 다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말이 통하고, 급여 및 대우도 좋고, 일도 조금하고 많이 놀 수 있고, 스트레스 덜 받는… 그런 일 찾기가 쉽겠냐고.. 그러다 보니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처음에 마지노선으로 생각했던) 6개월이 후딱 지나가 버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객들 불평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다. 괴상망칙한 발음으로도 사내방송을 떳떳하게 해내고, 다른 사람 바꾸라는 고객전화가 있으면 주눅들기는 커녕 (그 고객의 불평으로 부터 해방된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며 동료들을 바꿔주기도 한다.
만일.. 누군가 우리처럼 현지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얌전히 월급받고 사는 것이 이민 1세대로서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면… 뭐 좋다. 그런 거겠지… 하지만 (본인들이 가지고 온 돈이 있어서) 시작부터 소규모 사업을 벌이고… 거기에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누가 더 우위에 있고 누가 더 열등한지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거리이다. 애초부터 일대일로 비교할 일이 아닌데다가,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제일 좋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 나와 같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장래계획이 있다면 자본금을 모아 자기 사업을 벌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나름대로의 기록을 위해서, 그리고 장차 밴쿠버에 맨손으로 이민와서 현지 직장에 취업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몇 마디 남기자면, 사실 취업클럽 같은 곳에서 가르치는 이력서 쓰는 법, 인터뷰 하는 법 등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취업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점, 다시 말해서 회사 입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력서를 얼마나 인상적으로 쓰고, 인터뷰를 얼마나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 회사에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어느 회사에서 지금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하는 정보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라 온 사람들도 그런 정보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이곳에서의 구인구직은 대개의 경우 아는 사람 연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직접적이 소개가 아니더라도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어떤 회사에서 어떤 사람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정보 취합을 위한 활동이 취업의 제 1순위가 된다. 자원봉사 또는 현지인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임시직장(우리의 경우 보웬섬에서의 친구들이 많이 도움을 주었다)을 얻어서 인맥을 쌓는 것이 가장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지만, 가장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당연스럽지만, 모든 매체 및 인터넷에 공개되는 구인정보에 매일매일 관심을 가져두는 것도 중요하다. 가장 지루한 작업이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이다. 이렇게 닥치는 대로 모든 정보를 모으다 보면, 쏟아지는 정보에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 반드시 생긴다. 때문에 자신의 목표를 미리 몇 단계로 좁혀두는 것도 중요하다. 제 1지망 제 2지망..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목표를 세울 때에는 당연히 자신의 적성과 경력등이 고려된다. 취업지원단체등에서 시행하는 적성검사등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되고, 캐나다 노동부나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그 직업의 전망 등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기까지가 지당하신 말씀이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밴쿠버에 집중해서 말을 해보자면, 밴쿠버는 정말이지 1차, 2차 산업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동네이다. 기본적으로 돈이 많은 인간들이 소비하면서 사는 동네이고, 따라서 모든 산업들이 소비 중심으로 돌아간다. 관광, 외식업, 소매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밴쿠버의 주력산업이다. 따라서 만일 자신의 최종목표를 위해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한 첫 직장을 고려한다면, 무슨 직업이 자신의 목표라 할지라도, 소매업이나 외식업과 같은 고객서비스 업종을 벗어나서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거나 졸업한 친구들 조차도, 이런 업종에서 첫직장을 쉽게 찾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 중요시여기는 자질들이 바로 ‘팀웍’, ‘신뢰도’, ‘현장 경력’, ‘일에 대한 열정’ 등인데, 많은 경우 이런 일반적인 자질들이 그 직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지식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자질들은 굳이 관련업종에서 훈련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반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쉽게 취업할 수 있는 업종에서 첫 직장을 시작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
그리고, 상대적으로 현지 인맥이나 영어 등의 문제로 열등한 이민 1세대의 경우, 보다 보수적인 직장에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방법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수적인 직장에서는 지원자 자체의 능력을 평가하기 보다는 지원자가 가지고 있는 학력이나 자격증 등, 서류에 근거를 남길 수 있는 것에 우선적으로 점수를 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출신 독립이민자의 경우, 서류에 남길 수 있는 경력이나 학력을 봤을 때는 현지에서 대학 갓 졸업하고 취업하는 애들에 배해 전혀 꿀릴 것이 없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라도 작고 내실있는 기업보다는 덩치가 큰 공룡같은 기업에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첫 직장으로 고객서비스 업종을 선택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Shaw 케이블과 같은 TV와 인터넷 서비스를 하는 대형회사에 있는 직종 중에서도 전화상담직업을 먼저 택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이렇게 언어능력이 필요한 직업을 먼저 선택해야 하는 사실이 마음에 크게 걸리긴 하지만, 결국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그래도 영어를 조금이라도 하지만, 경쟁자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취직이 쉬운 부분이 얼마든지 있다.
물론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기업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어느 기업의 고객 상담실에 전화를 하더라도 한국어 서비스를 먼저 문의하는 것도 전략적으로 한국힌의 취업 가능성을 열어두는 좋은 방법이다. 반대로, 지역 주민들과 밀접한 친분을 유지해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지는 독특한 악센트에 빨리 적응하도록 하는 것도, 나중의 취업 기회를 넓히는 것에 전략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란계, 인도계, 중국계 악센트의 경우 뭘로 봐도 한국식 악센트보다 훨씬 알아듣기 힘들지만, 오랜 세월 동안의 지역주민들과의 융화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어떻게든 취업이 되었다면, 적어도 처음 몇 개월 간은 ‘여기가 한국 회사다..’하고 생각하는 것이 앞으로의 평가에 매우 도움이 된다. 쉬는 시간, 퇴근 시간 칼 같이 지키고, 원리원칙 그대로만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라는 막연한 기대는 실제 회사생활을 해보면 무참히 무너진다. 이곳도 칼퇴근 하는 사람들 별로 좋게 안보고, 다른 사람들 일 하고 있는데 자기 일 마쳤다고 노는 사람들 역시 좋게 안보고, 근무시간 조정하려고 할 때, 쉽게 조정이 되는 사람을 더 좋게 보고.. 그렇다. 물론 늦게 퇴근 한다고 해봤자 5분 정도일 뿐이고(더 이상 오래 머무는 것은 사규로 금지), 다른 사람들 눈치 보거나 하는 것들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한국에 비해 훨씬 편하지만, 그래도 너무 서구적인(우리가 서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고방식대로 행동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내가 예전에 들었던 취업과정 수업 중 강사가 한 말 중에 기억이 남는 게 있는데.. “밴쿠버 직장 생활에서 적당한 출근 시간은..?? 남들이랑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우리 동네 주의원이 가게에 와서 컴퓨터에 대해 물어보고 갔다. 5년 전에 산 컴퓨터로 어떻게 최신 기능을 사용할 수 없냐는 것인데, 한국으로 말하자면 광역지방의원 정도 되는 양반이 동네 슈퍼에 직접 와서 컴퓨터 쇼핑을 하는 것도 신선해 보였지만, 5년 전에 산 컴퓨터를 어떻게든 써먹으려는 그런 검약 정신이 나름 좋아보였다. 이제 이민온지 3년이 지났고, 몇 주 후면 내 집을 갖게 된다. 한국에서 누가 우리에게 2억이나 되는 돈을 꿔주겠는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다시한번 이민 오기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