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아래의 아내의 글처럼… 우린 .. 적어도 나 만큼은 이제까지 바라던 소망이 다 이루어진 셈이다. 물론 어릴적에 꾸었던 과학자의 꿈(줄기세포를 만드는 과학자가 아닌, 거대로봇을 만들어서 나쁜 놈(!)을 무찌르는)은 오래 전에 접었지만..
중고등학교때에는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찌는 바람에 좀 ‘날씬’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대학교에 와서 술을 폭음하는 바람에 별안간 이루어지게 된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셔서 매일 같이 토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심지어는 토하고 나서 다시 술을 마셨으며), 토하다 토하다 녹색물(아마도 위액이 아닐지)이 나온 적도 서너번에 한번꼴로 있었으며, 한번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시면 적어도 3일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으니(몸도 몸이었지만 술 마시고 저지른 행각이 부끄러워 쥐며느리처럼 있어야 했다), 제 아무리 변강쇠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 지경이 되니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는 남성복점에 가서 내 허리 26인치에 맞는 옷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근육은 없고, 성장기 때 한번 늘어난 체세포는 줄지 않아서 옆구리 살은 여전히 늘어졌지만, 그래도 어딜 가도 날씬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에는 영화계에서 일한다든지,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 산다든지 하는 꿈을 가졌었는데, 어찌어찌하여 미대나 혹은 영화전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우여곡절끝에 영화판에서 일하게 되었고 일 잘한다고 인정도 받았었고, 그림을 그리면서 사는 꿈(애니메이션 계통에서 일했으니 적어도 두가지 꿈을 한 번에 이룬셈이다)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이루게 되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뭔가 대작을 남겼다거나 하는 일을 없었지만, 애초에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는 게 꿈이 아니라, 그런 환경에서 일하면서 사는 게 꿈이었으니…
그 밖에도 연애를 많이 해보는 꿈도 그럭저럭 이뤘던 것 같고, 서울을 벗어나서 사는 꿈도 춘천에서 몇 달 살면서(중간에 축출되긴 했지만) 이루었고, 한국사회에서 탈출해서 사는 것도 (그야말로) 불현듯이 이루어졌다. 3년 전 우연히 노스밴쿠버(당시만 해도 우린 그 동네가 으리으리 부자들만 사는 동네로 생각했다)를 산책하면서, 우리가 언제 이런 동네에서 살 날이 있을까..??라고 생각했지만, 별안간 그 동네에서 1년 넘게 살게 되었고, 그 동네에서 살면서 둘 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한 때는 밴쿠버의 부동산 열풍을 지켜보면서.. 우리 인생에서 집을 살 날이 오게될까? 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 역시 별안간 사게 되었고, 이 조용하고 아담한 건물을 나름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어찌 그런걸까? 꿈은 꿈일 뿐이고.. 소망은 소망일 뿐.. 현실에 충성하면서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이리 소망하기만 하면 제꺼덕 이루어지는 걸까? (물론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있다. 앞머리가 다시 풍성하게 자라서 테리우스가 되는 꿈은 절대! 절대! 이루어지는 날이 없을 것이다.) 단지 남들보다 지국히 현실적인 꿈들이기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계에서 일을 하게 된다던지, 이민을 간다던지.. 하는 꿈을 누가 현실적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남들보다 단지 욕심이 많고 소망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중에 몇 가지 이루어 진 것만 기억이 남는 것일까? 뭐 이건 그럴지도.. 남들보다 인간성이 독하기 때문에.. 흐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서 이룬 일들이 많다. 떄로는 거의 행운이다 싶은 기회를 잡기도 했지만,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그래도 나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만이 이렇게 바라던 것을 죄다 누리고 사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누리며 살 고 있지만.. 어쩌면 그렇게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잊고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살면서 많은 기회가 오가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잡아야 할 기회는 아마도 사소한 주변에 감사할 기회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살면, 자신이 뭔가로 부터 특별하게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면, 조금이라도 사는게 재밌어지지 않을까 싶다.
한국 땅에서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고 싳은 일을 한다는 것에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지지리도 전근대적인 인간들(애니메이션 판 노땅을, 지원해준다고 나서는 정부 책임부서)의 사고방식에 지겨워졌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법이 없고(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도 만족시키지 않고) 단지 나만을 위로하기 위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내 힘이 닫는대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고 싶었는데, 그게 컴퓨터/가전 수리 일이었다. 뭐 능력이 닿으면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컴퓨터 고치는 의사 만으로 만족하려 했다. 학원을 마치고도 한국에서는 나이가 많아서 취직하기가 힘들었고, 이민가서 그 일을 하겠다고 했더니 모든 사람들이 어려울 거라며,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며 만류를 했다.
어찌 어찌 하다보니.. 또 내가 바라던 대로 되었다. ‘이민’와서 ‘컴퓨터 수리’를 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고치기만 하는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고장상담을 해야하니까.. 언어소통능력에 문제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백인 및 많은 비한국인 고객들의 꼬장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도 많았으며, 큰 회사에서 바쁜 일정으로 순식간에 일을 처리해야 하다보니, 그 동안 내가 정말 싫어했던 (5분만에 환자를 관찰하고 진단을 해내는) 한국 의사들의 나쁜 관행을 그대로 복습하는 것 같아서 암담해지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가슴 한 켠에 있는,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내 영화를 만들고 싶고 아니면 영화계에서 다시 일을 하고 싶은 꿈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뭐.. 살다보면.. 꿈을 잃지 않고 살다보면,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꿈을 간직한다고 해서, 뭐 모든 사람들이 그 꿈을 이루게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결국 꿈을 이룬 사람들은 끝끈까지 그 꿈을 간직한 사람들 뿐인 것이다.
얼마 전 김광석 라이브 공연 앨범을 듣는데, 그 사람의 꿈은 40이 되어서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며(실제로 돈도 모으고 있다고 했다), 60이 되면 멋진 연애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을 하고도 왜 2년 후에 33의 나이로 스스로 목을 매야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자기에게 ‘애닲은 양식’이었던 노래를 하면서, 누구에게되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공연을 하면서.. 그러고도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고 싶어하던,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는 재미를 주고있는 노래를 부르던 그 사람이, 왜 죽음을 택해야 했는지 여전히 알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어느 순간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의 꿈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건강하게 재미있게 사는 것이다. 비록 나라를 등지고 떠나오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서 재밌게 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린 적은 없었다. 시민권이 가을 즈음에 나오면 곧바로 가족 초청의 순서를 밟으려고 한다.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일이고, 부모님들이 말이 안통하는 캐나다에서 사는 것을 달가와 하실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