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87년이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였을 거다. 당시만 해도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나머지 인생이 줄줄 풀리는 시대였고, 어린 나이에도 그런 세상의 이치를 깨닫았는지, 아니면 부모님의 사주를 받았었는지, 대학 보내는 공장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매일 밤 2시까지 영어, 수학을 공부하던 범생이였다. 하지만 그런 범생이에게도, 그리고 그 범생이네 가족이 구독하던 동아일보에서 조차도,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신문들 표지 헤드라인엔 마치 정권의 몰상식을 조롱하듯이 ‘턱!’, ‘억!’을 반복해서 싣고 있었는데, 어느날 가족들과 함께 외출을 하다가 지하철 가판대에 늘어놓은 신문 표제를 본 그 범생이는 객기에 한마디를 했다. “아니.. ‘턱!’하고 쳤는데 ‘억!’하고 죽었다는게 말이 돼? 누굴 바보로 아나?” 순간.. 그 주변엔 영원할 것만 같은 정적이 흘렀고, 사람들이 모두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며, 사색이 된 어머니는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고 저편으로 질질 끌고 나가셨다. 

아직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재는 잣대로 즐겨 사용하는 것은 바로 “공권력”에 대한 공포심이다. 실제로 혁명이란 걸 전혀 겼어보지 못한 채, 반상의 구별이 나뉘어졌던 시대에서, 내지인과 반도인으로 구별이 되던 시대를 거쳐, 줄기차게 한번 제대로 엎어보지도 못한 채 권위주의 시대를 겪어왔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바로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게슈타포 같은 비밀 경찰들이 공안기관이라는 이름 하에 암암리에 불순분자들을 색출했었고, 며칠 후 군대에 끌려가거나 감옥에 가거나, 심하게는 실종되는 사건들도 바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그런 정신병적인 공권력에 대한 공포심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어처구니 없이 남용되는 공권력이 민주주의를 막는 근본원인이 아니듯이, 빽 없고 소탈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공권력의 권위가 조금 낮아졌다고 해서, 공무원들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하철 역에서 주둥아리를 틀어막혀 질질 끌려가던 그 범생이가 대학에 들어가자 더 걍팍해져서 세상에 불평불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대통령 직선제라는 떡고물을 챙긴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야 이 자식아.. 요즘 같은 시대에 데모할 일이 뭐가 있냐?”라고 야단을 쳐댔다. 몇 년 후, 때 마침 군사정권이 소멸되고 3당 통합으로 그 정통성을 이어받은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들어섰다고 자부했으며 똑같은 “야 이 자식아.. 요즘 같은 시대에 데모할 일이 뭐가 있냐?” 잔소리를 놀어놓았다. 그 문민정부가 세계화.. 세계화 하면서 외채로 잔치를 벌이다가 나라를 말아먹고 나서도, 그래서 돈 없고 뺵없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생존권을 위협당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좋은 세상이 왔는데도 철 없이 데모와 파업을 일삼던 불순세력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우리들에게, 어쩌면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동산 투자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나라, 모든 아이들이 자유롭게 영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 그래서 내 아이 만큼은 남들보다 부자로 살 수 있는 사회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 그럼 파업을 더 하겠다는 노동자 정당을 지지할리가 있었겠는가? 단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예측을 벗어난게 있다면… 바로 공권력과 공무원 들의 태도가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마치 지난 10년간 좆만한 딱따구리같은 알량한 시민들이 함부로 바득바득 개긴 걸 보복하듯이 말이다. 
현재 초등학교 1학년 갓 입학한 내 조카마저도 “에이 맹바기”하며 조롱하는 현 정권에게, 사람들이 가지는 반감의 80%이상이 바로 공권력과 그 권위에 알아서 기는 언론들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노통장을 코미디 케릭터로 만들어 즐기던 사람들에게, 정권의 마름들이 다시 완장을 차고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으니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명박씨에게 권위주의자라고 몰아부치고 서울대 교수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일어서서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고 주장한다면, 그래서 이명박씨가 갑자기 맛이 가서, 정부 홍보정책의 주안점을 권위주의 타파로 세우고..경찰 및 공권력들에게 시민들에 대한 봉사를 최우선으로 하자고 하는 등.. MBC에서 정권 비난 방송을 해도.. 그러던지 말던지 하고, 그래서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면 밖에 나와 맞장구도 쳐주고 그런다면, 지금 이명박씨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감이 80%이상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지금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이명박씨에게 바라는 모든 것일 것이다. 그냥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고분고분해지고, 자기들이 광화문에 나서든 서울 광장에 나서든 간에 같이 웃어주고, 그리고 자기들이 부동산 투자를 하든 주식 투자를 하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권리를 보장 받고, 자기 아이들이 새벽 7시부터 11시까지 쉴새없이 공부해서 남들 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 것 말이다. 재개발 때문에 어이없이 삶의 터전을 뺴앗겨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든 없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한국인들은, 공권력의 권위주의로 인한 참혹한 과거를 지녔다. 그 부분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것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치를 스스로 낮출 이유는 없다고 본다. 현정권의 권위주의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날 지하철역에서 입이 틀어막혔던 나로서는 “이만하면 좋은 세상이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거리에서 맘껏 정부를 비난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좀 덜 피곤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오는가? 모든 인민들이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연 당신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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