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소비

일단 이런 종류의 행동은 모두 자기 만족에 기반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그런 행동의 가치를 손상시키거나 왜곡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자선행위나 모든 종류의 선행, 혹은 양심선언 등 역시 자기 기준으로 옳은 일을 자기 만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런 행위들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고 있고, 또 그게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자기 만족이 “자기 자신의 지식” 범위 내에서만 행해지기 때문에 많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비활동이라는 속성 때문에 종종 과장되고, 혹은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알려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정 무역’ 커피를 생각해보더라도, 생산자에게 공정한 보답을 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일단 지구 일부 지역에서 전 세계가 소비하는 커피를 플랜테이션으로 대량 재배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토지 오염을 야기 할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된 작물을 수송하는 데 사용되는 화석연료를 고려하더라도, 절대 지구의 건강에 윤리적이지 못하다. 
‘동물실험’ 제품을 거부하는 것도 그렇다. 안타깝게도 인류 문명이 쌓아지는 과정은 그리 윤리적이지 못했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의료술이나 약품들이 그런 실험 없이 발명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자사에서는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회사에서, 혹은 인류역사에서 행해진 많은 실험 결과들을 바탕으로 제품들을 만들진데, 어찌 그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답답했던 부분은 바로 ‘윤리적 채식’이다. 윤리적 채식주의자들은 종종 현재 영양 기술의 발전으로 대부분의 육류 단백질을 콩 및 기타 보조제로 섭취가 가능한데, 왜 굳이 동물을 살해하거나, 육류용 가축을 기업”경영”함으로써 토지를 황폐화 시켜야 하는가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일단 많은 연구 결과를 통해서 식물도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작물과 식물의 대량 생산이 토지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미미하지 않으며, 유전변이나 비공정 무역이 가장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은 오히려 농작물 시장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미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많은 작물들은 Monsato 라는 대형회사에서 독점적으로 배급하는 유전자 변이 종자로 “제조”된다)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이 살면서 생존요소를 갖춘 후 발생하는 “생활의 여유”에서 비로소 발전되었다고 볼 때, 다양한 식생활이야 말로 가장 문명의 초기 형성단계에 가깝고, 이런 식생활의 발전이라는 것의 성격 자체가 기본적으로 결코 윤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 하지 않을지. 문제는 채소든 육류든 식량의 과잉 생산과 그에 따른 생명 경시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지.
그렇더라 해도.. 이런 문제 제기는 남는다.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조금씩 실천하는 것이 세상을 조금씩 나아지게 하고 있다고. 아니면 무슨 다른 실천적 대안이 있느냐고.
딱히 없다. 사실 맞는 말이다.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일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 가면 버젓이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이렇게나마, 하나 하나에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며 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윤리적 소비라는 표제를 내세워 또 하나의 시장이라도 더 만들어보려는 거대 회사들의 농간에 넘어가고 있다는 찝찝함을 지울 수 없던 차에.. 무릅팍 도사에 출연한 “아마존의 눈물” 제작진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전해준 아마존 부족의 생활을 정말로 경이로웠다. 예를 들어 저녁거리를 구하러 사냥을 나간다. 아무래도 민첩성과 근력이 필요한 일이다 보니, 노약자들은 열외가 되어서 마을을 지킨다.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해야 하는 사람들(아무래도 대부분 수유가 가능한 여성들)도 빠지게 된다. 그렇게 몇 시간의 사투끝에 양을 한마리 잡아왔다고 치자. 그런 그 때부터 몇 시간의 회의가 또 시작된다. 잡은 고기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관한 것인데, 사냥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마을에 남아 아이를 키우고 그러는 것이 과소평가 될 수는 없기에 고민이 많아지고 난상토론이 이어진다. 당장 나 같으면 그렇게 고민할 시간에 몇 명 더 끌고 나가서 한 마리 더 잡아 오겠구만, 일이 그렇게 연결되지 않는다. 괜히 과소비를 하는 것 자체가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마을에 대한 공헌도에 따른 분배의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 진정한 윤리적 소비란, 제일 먼저 소비를 줄여나가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과잉 생산을 막아내고, 제대로 된 분배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생각하는 일이었다. 당장 인도네시아 근처 작은 섬에서 특산물로 만든 가방을 공정 무역으로 사는 것보다, 갖고 있던 가방을 더 오래, 만든 사람과 그 가죽 주인을 존중하면서 쓰는 것이 더 윤리적 소비인 것이다. 가능하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연비 좋은 차를 새로 사는 것 보다 자가용도 최대한 잘 관리 해가면서 오래 타는 것이 윤리적 소비이다. 
가능하면 공산품의 경우 중고품이나 재활용품으로 구매하고(중요한 것은 재활용품을 쓰는 것이지 쓰던 것을 재활용품으로 내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좋게 말하더라도 그냥 기부행위에 가깝고, 사실상 새로운 소비를 위한 자기 합리화로 사용되고 있지 않는가), 고기나 채소를 먹더라도, 조금만, 인근 지역에서 기르고 재배한 것을, 가능하면 살고 있던 동안 좋은 환경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보살핌을 받고 자란 고기와 채소를, 조금 비싸더라도 그렇게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 진정한 윤리적 소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소비를 최대한 줄여나가고, 조금이라도 문명을 거부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장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 진정한 윤리적 소비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갑자기 그렇게 소비를 줄여가면, 그야말로 공황이 오는 것 아닌가. 모든 생산시설이 중단 또는 긴축되면 엄청난 실업자가 양산 될텐데, 그건 어떻게 하나?
전세계 모든 인류가 갑자기 그렇게 순식간에 소비를 줄일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지만,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때야 말로 진지하게 분배를 걱정해볼 기회가 아닌가? 쓸데없이 많이 가진 소수의 소유물들을 나눠가지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벌써 60년대 초반에 인류 문명은 하루에 2시간만 일해도 전세계 인류 소비를 충당할 만큼 생산량을 발전시켜 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과 시장개척을 막아내지 않는 한, 결코 진정한 윤리적 소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아이패드를 질러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대가리와 주둥아리만 시끄러우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정말이지 대가리가 욕구를 통제를 못하고 있으니 심각하게 치료를 받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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