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plash 단상

‘올해의 교사상’을 받은 자상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앤드류’는 전미 최고의 음악학교 ‘셰이퍼 컨저베이터리 스쿨’에서 꿈을 키우는 신입생입니다. 딱 봐도 전형적인 너드 캐릭터에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눈도 못마주칠 정도로 수줍음 많이 타는 찌질이였지만, 엘리트 전문 양성 교수 (노다메의 에토교수?)인 ‘플레처’의 잔인한 훈육과정을 통해서 광기어린 음악가로 변신하게 되면서, 결국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낸 닥터 프랑켄슈타인과 충돌하게 됩니다.

Whip-lash의 사전적 의미는 (홍보사에서 말하듯이 채찍질이 아니라) 채찍자국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특별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 단어를 본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 되었죠. 보다 관용적인 의미로는 급격한 물리적 충격 (일반적으로 가벼운 교통사고) 후에 목이나 척추 부근에 남아 있는 후유증 같은 의미로 많이 쓰이죠. 말하자면 접촉사고가 나면 죄다 목을 붙들고 차에서 내리는데, 전형적인 위플래쉬입니다. 그렇게 보면 정말이지 근사한 제목이 아닐 수 없네요. 영화상 주인공에게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음악의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가학적인 플레처의 교육방식도 은유하면서, 앤드류에게 남아 있는 플래처식 교육의 PTSD를 표현하기도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예고편을 극장에서 봤을 때부터, ‘개같은 내인생’과 ‘정복자 펠레’, ‘빌리 엘리어트’를 잇는 내 인생의 성장영화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간절히 개봉을 기다려 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제가 거주하는 밴쿠버에선 개봉을 건너 뛰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하게 DVD 출시만 기다려 왔는데, 마침 한국 방문 기간동안 이런 대박 시사회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익무 관계자분들께 감사)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나니… 이건 왠걸, 완전 음악판 ‘풀 메탈 자켓’이네요. 닥터 프랑켄슈타인 역할을 국가가 아니라 호랑이 선생님이 하는 걸 제외하곤 말입니다.

근데 왠지.. 앤드류가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일단 앤드류가 목표지향적 인물이었다는게 충분한 설명이 없었구요. 사실 이런 강압적인 훈육 과정이 순진한 서구 아이들에겐 정말 충격적인 간접경험이겠지만, 한국 사람들에겐… 뭐 그럭저럭 귀여운 수준 아닌가요? 저희 세대 때엔 국민학교 시절부터 원산폭격을 하고.. 중, 고등학교 때엔 엉덩이가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다녔으니까요. 군 시절은 말도 못하죠, 뭐. 게다가 ‘교실이데아’가 고발하듯이 옆자리의 친구들을 밟고 성공하라는 경쟁 시스템은 아직도 친숙하구요. (하긴 요즘엔 어린이집에서부터 풀스윙으로 싸대기를 맞긴 하더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풀 메탈 자켓’에서 ‘파일’ 이병이 미쳐가는 과정은 우리가 봐도 소름이 끼칠정도로 생생했었거든요… 어찌 되었든 앤드류가 변화하는 모습은 좀 비약이 심해보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여전히 스파르타식 감금 교육이 세일즈 포인트가 되는 한국에서는 플레처 교수 앞으로 돈다발을 들고 자식들을 맡길 지도 모를 일입니다.

뭐 이런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주는 작품이었네요. 먼저.. 매 순간을 전투하듯이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많은 (소위) 예술가들에게 말이죠. 특히 한국의, 특히 영화판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증상인데요. 이게 헤어조크 현상인지, 아니면 집단적 드라마타이즈인지 모르겠지만, 왜 그리 악으로 깡으로 부딪히며 살려고 (혹은 살라고) 하는지 지금의 저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깟 영화가 뭐라고 말이죠. 얼마 전에 한예종 관계자 분과 얘길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연극원 학생들은 술 취하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영상원 학생들은 왜 그리 싸우고, 울고, 집기 부수고 그러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러더라구요.

다음으로 공감 백배였던 건, 플레처의 자기 분열적 변명은 우리에겐 익숙한 엘리트 지향의 교육의 모순을 대변하는것 같았다는 겁니다.

플레처 : 찰리 파커가 ‘버드’가 될 수 있었던 건…
앤드류 : 조 존스가 심벌을 던져서 그렇죠.
플레처 : 그래… 난, 그냥 학생들을 몰아붙힌 게 아니야. 그들이 한계를 뛰어넘도록 도와준거지.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찰리 버드 파커는 나올 수 어. 정말 거지같은 말이 뭔줄 알아? ‘Good job’이야. 만일 연주를 마치고조 존스가 찰리 파커에게 심벌을 던지지 않고 ‘Goog job’이라고 하고 말았다면 찰리 파커는 버드가 될 수 없었을 거야.
앤드류 : 하지만 정도가 있죠. 너무 심하게 몰아붙히면 좌절해서 그만두는 학생이 나올 수도 있어요.
플레처 : 찰리 파커라면 좌절하지 않겠지. 불행하도 내 수업에선 찰리 파커가 없었다.

(요즘은 기억조작이 심해서 대화내용이 어느 정도 맞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의 엘리트 교육 시스템의 변명과 너무 닮지 않았나요? 스파르타식 훈련이 막시무스를 만든다고 주장하다가, 막상 피해자가 생기면 그 놈은 어짜피 막시무스가 될 재목이 아니었어.. 라고 합리화하는 정신분열이라니 말예요. 플레처의 다음 대사에 ‘그래도 나중에 보면 학생들이 고맙다고 찾아오는 건 엄하게 가르친 선생님이야’라고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었습니다. (뭐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자기 자식을 벼랑으로 던진 후 살아 올라온 놈만 키운다고 하는 사자의 교육방식은 사실 교육이 아니라 필터링일 뿐인 거죠.

플롯에서 좀 비약이 느껴진다거나, 연주 연출이 너무 전형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짧은 상영시간 내내 흥분시키는 작품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플레처 캐릭터도 아주 훌륭했구요. 감독은 듣기 싫어할지 몰라도 저로서의 찬사를 보낼까 합니다.

Good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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