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광기의 왕국

혹시 주변에서 퉁명스럽게 선문답을 내뱉는 영감님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이 다큐애서 나오는 미야자키옹의 모습이 제 주변의 누군가와 너무나 꼭 닮아서 시종일관 웃으며 봤습니다. 영화는 크게 보면 바로 “바람, 불다”의  제작기를 딤은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작 과정 중에 미야자키옹의 은퇴 선언이 있다보니, 당시 그의 심경이 어땠는지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되었죠.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지부리 박물관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일상을 잔잔히 스케치 해 나갑니다. 미야지키옹이 주 6일 10시간씩 출퇴근 근무를 한다는 것, 일요일 마다 아침에 강 청소를 하러 다닌다는 점도 나오고.. 그리고 나서 “바람, 불다”와 “카구야 공주 이야기”의 제작 분투기가 소개됩니다.
1.JPG

해질무렵이 되면 옹기종기 옥상에 모여 낙조를 구경하는 스튜디오 스탭들

2.JPG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강 청소를 다닌다는 미야자키옹

19.JPG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원전 반대 구호

 고집쟁이 노인네들 덕택에 스트레스를 받는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의 애환도 보이구요. 특히 스즈키 프로듀서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고 있자니, 스튜디오 지브리가 애니메이션 창작 사업을 중단한다는 현실이 뭔가, 일본 사회에 있어서 건대한 전환점으로 보이더군요. 마치 전후에 일본의 번영을 이끌어 온 세대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성실함을 뒷세대에 넘기지 못한채)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는 것 같은 것 말이죠. 무엇보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 지금 변화해 가는 세상과 일본의 현실, 그리고 그런 변화와 창작 작업 자체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는 미야자키옹의 참담한 심정을 엿보고 있다보면, 한 노인네가 왜 50년 넘게 해오던 일을 그만둬야 하는 것인지 공감하게 됩니다.
3.JPG

2008년 부터 만들었다는 “대불황” 사진첩

4.JPG

오늘날, 인간의 꿈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은 저주 받았다

5.JPG

말하자면, 영화를 만든다는 게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가? 단지 비싼 취미활동에 불과한 것 아닌가?

6.JPG

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쓰레기들이다

14.JPG

세상이 미쳐가고 있어

15.JPG

우리도 조금씩 제제를 받는 것 같아

16.JPG

17.JPG

NHK부터 시작해서, 특정 소재에 대해 건드리지 말라고 하고 있고.. 정부 뿐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마찬가지..

18.JPG

창작 자유의 시대는 끝이 난 것 같아

그리고 미야지키 고로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라면 가게가 되었든 정치가가 되었는, 이 시대에 있어서도 아들이 가업을 잇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본식 정서에 스트레스를 받는 고로의 모습에서, 그동안 그의 졸작들이 고로가 안고가야 할 책임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7.JPG

담당 PD가 새 프로젝트 얘기를 꺼내자 고로는 그걸 왜 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PD가 널 위해서라고 하자 발끈한 고로, 속내를 털어놓는데..

“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냐”

8.JPG

내 능력이나 경험이 불안할 때도 많고, 지브리가 아니라면 애니메이션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9.JPG

난 회사를 위해서 연출을 하는 거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다고, 아주 무겁고 진지하기만한 다큐멘터리는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미야자키옹이 아주 귀엽게 나와요. 오타쿠들을 그냥 뭔가에 집착하는 페티시스트 정도로 몰아부치면 자신은 절대 오타쿠가 아니라고 단언하더니, 바로 다음 컷에서는 오타쿠들의 아버지, 안노 히데아키와 다정하게 비행기 장난감을 들고 논다든지, 원화 컷으로 만든 라인테스트 위에 선녹음 하는 걸 보면서, (자신이 짠 콘티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든지 하는 것 말이죠.  스튜디오 지브리 근처의 강둑에 일요일 아침에 가보면 미야자키옹을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10.JPG

11.JPG

12.JPG

13.JPG

한 사람이 반평생 하던 일을 그만둔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죠. 미야자키옹 본인은 “지브리는 뭐… 어떤 비행기 이름을 따서 지은 거야.. 별 다른 의미는 없어. 이름일 뿐이라고”라며 얘기를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에는 쓸쓸함이 깊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뭐.. 다른 것 바라는 건 없고, 본인이 “원령공주”나 “바람,불다”에서 주지해온 것처럼, 살아만 계셔주면 고맙겠어요.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