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토피노 3

놀 땐 아침잠이 별로 없는 편인데, 어쩐지 이날은 화장실이 아주 완전히 급박해질 때까지 침낭 속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그래도 어젯밤엔 따끈하게 매우 잘잤다.덕분에 감기가 뚝 떨어진 느낌. 아내는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난 지난 며칠을 다시금 정리해 본다. 엊저녁을 문자 그대로 배 터질 때 까지 먹다가 곧바로 잠에 든 터라 아직 시장기는 없는 것도 있지만.. (사실 허기를 못느끼는 것이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다른 사이트로 옮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아침에 최대한 느긋하게 일어나서 천천히 브런치를 즐기러 가보기로 한다. 대충 의관을 정리하고 나서 향한 곳은 토피노 롱비치 리조트에 있는 Great Room 식당. 참고로 롱비치 리조트는 Long Beach에 없고 Cox Bay Beach에 있다. 저녁에 가게 될 위카닌니시 Wickaninnish 리조트 레스토랑 The Pointe 역시 위카닌니시 비치나 위카닌니시 섬에 있는 게 아니라 채스터맨 Chesterman 비치에 있는 것도 같은 상황이다. 사실, 이 롱비치 리조트가 수십년 전에 세워졌고 그 당시에는 서퍼들이 이 주변 해변을 죄다 롱비치라고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물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붙인 이름일지도 모른다.

식당에 도착하니 웨이트리스가 창가 자리를 곧 치워줄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한눈에 봐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고맙다. 이 리조트는 서퍼들이 종종 묵는 것처럼 보이는데 (해변까지 곧바로 진입로가 있고 서핑 보드 수납장도 같이 있다), 리조트 바로 옆에도 Public accessible beach가 있어서 파도를 즐기러 온 서퍼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음식은 … 그냥 흔한 브런치 메뉴였고, 아쉽게도 11시 전에는 점심 식사 주문을 받지 않았다. 해변 창가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지리적 장점에 비해 가격대가 밴쿠버의 일반 브런치 식당 가격 정도( 20불 내) 라서 처음에는 매우 고마웠으나.. 음식 퀄리티도 딱 그 정도라서 덜 고마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이렇게 간을 못 맞추는가. 치킨 와플에 뿌려진 그레이비 소스도 맹맹하기 그지 없고, 조식 샌드위치에 빵 대신 사용한 비스킷 역시 말할 수 없이 밍밍하고 퍽퍽했다. 최신 트렌드를 연구하는 자세는 되어있으나.. 요리에 소질은 없구나..

식당 아랫충으로 내려와 해변 진입로 쪽으로 가 보니 이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beach bar가 있다. 멕시코에선 사방에 이런 식의 비치바가 널려 있는데, 토피노에 와서 보고 있자니 반갑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 여름이 아직 완전히 간 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영업은 2시부터..

해변을 걷고 있자니 많은 서퍼들이 파도를 타려고 바닷물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날씨가 우중충해서 그런지 저 멀리에서 오는 파도는 시커먼 것이 제법 무섭다. 어릴적, 개인 적으로 무슨 일을 겪고 나면 왠지 드라마 주인공 처럼 속초나 경포대 밤바다를 보러가는 청승을 떨고는 했는데, 정작 가보면 바다는 생각만큼 보이지 않고 저렇게 시커먼 뭔가가 저 멀리서 쿠르릉 쿠르릉 울곤 했었다. 그건 파도를 여기 청춘들은 잡아 타겠다고 저렇게 동동 떠있으니 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엔 아내가 감기기운이 있는 건지, 저녁 약속을 가기 전까지 숙소로 돌아가서 낮잠 좀 자자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주변 해안이나 볼 거리에 잠깐씩 정차했는데, Kapyông Memorial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가평 메모리알? 에이 저 가평이 그 가평이겠어? 무슨 원주민 언어겠지.. 생각하면서 올라가봤는데.. 그 가평이 저 가평 맞았다. 추모비에는 한국 전쟁때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유엔군이 처참한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호주군 및 타국 군대들이 하나둘씩 후퇴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분투했다고 적혀있다. 다른 나라의 평화를 지킨다는 심정으로 이역만리 가난한 아시안 땅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인 젊은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또 자식을 그렇게 멀고 먼 사지로 보낸 부모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때만 해도 2차 대전이 끝난지가 얼마 안된 때라서, 착한 나라들끼리 힘을 합쳐 악을 무찌르고 정의와 평화를 지켜낸다..라는 개념이 남아있을 때라서, 본인이나 자식의 용기를 자랑스러워 했을까? 그렇게 목숨 바쳐 지킨 나라의 대통령이란 작자가 사실, 북한을 침공하자고 매일 선동을 한 사람이며, 전쟁이 나자마자 시민들을 뒤로 한채 자기만 살려고 도망간 후 한강철교를 파괴하고, 전후에는 거대한 부정축재를 해왔으며,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하고, 그걸 규탄하는 학생, 시민들에게 총질을 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얼마나 원통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추모비 말단에 끝까지 싸운 캐나다 중대의 용기가 (한국 대통령도 아니고 캐나다 총리도 아닌) 미국 대통령의 찬사를 받았다는 말이 적혀 있는 걸 보자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추모비가 저 멀리 태평양의 수평선까지 시야가 뻥 뚫린 곳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 같았다. 저 수평선 너머에 당신들이 싸워서 지켜낸 나라는, 지금도 더 나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다.

추모비 옆에는 한국의 한려해상 국립공원과 이곳 퍼시픽 림 국립공원이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적혀있다. 그렇다고 무슨 쿠폰 같은 걸 주는 건 아니고.

가평 메모리얼을 지나 롱비치 해변에도 잠깐 들린다. 사실 롱비치라 하면 여기 밴쿠버 섬 서부에 가장 길다는 10km 정도 되는 이 해변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만, 막상 관광객들이나 서퍼들이 찾는 롱비치는 여기 Incinerator rock (소각로 바위?)와 Lovekin rock이 있는 이 해변이 되겠다. 소각로 바위라…… 게을러서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찾아보진 못했지만.. 왠지 옛날 원주민들 사이에선 용감한 전사들이 죽으면 여기에서 화장을 한 후 바다에 떠내려 보내는 전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비겁하거나 악한 사람의 경우 바위에 두 팔 두 다리를 묶은 후 뜨거운 태양과 독수리로 부터 고통을 받으며 죽게끔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쩄든 여긴 4번 국도에서 그냥 휙 들어오면 되고, 주차 시설도, 무료 공용 화장실에 샤워 시설까지 으리번쩍하게 잘 되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웻수트로 갈아 입고 보드를 들고 바다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2006년에 왔을 땐 저렇게 번쩍이는 화장실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그린 포인트 캠핑장 화장실을 개보수하면서 덩달아 한 듯 싶다. 암튼 토피노의 롱비치에는 해변 진입로 및 주차장이 몇군데 있는데, 여기 소각로 바위 주차장,  롱비치 주차장, Combers Beach, Wickaninnish Beach, 그리고 그린 포인트 캠핑장이 있고, 그중 그린포인트는 캠퍼들만이 입장할 수 있다.

소각로 바위에서 보는 전망

핫시즌이 끝나서 인지 아니면 일년 동안 여기 저기 순환해서 개방 및 정비를 하는 건지 몰라도 접근이 폐쇄된 곳이 몇 군데 보인다. 2006년에 왔을 때에도, 2016년에 왔을 때에도 그랬었던 거 보면 아마도 순환정비가 맞는 듯. 이번엔 Schooner’s cove 와 Grice Bay를 닫아 두었다. 그러고 보면 Schooner’s Cove는 지난번에 왔을 때에도 닫혀 있었던 듯. 

캠핑장에 돌아오니 햇빛이 난다. 해변으로 나가볼까…하다가.. 음.. 오늘은 잠깐 낮잠을 자기로. 사실 멕시코에 갔어도 이렇게 먹고 자고 바다 보고.. 그런 거의 연속이었을 테니까, 딱히 기념비적으로 놀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불안해 할 이유는 없다. 아내 말대로.. 이번 여행의 컨셉은 멕시코.

자명종까지 맞춰 놓고 아주 뿌듯하게 낮잠을 잔 후 일어나 슬슬 나갈 준비를 한다. 뭐 딱히 결혼기념일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위카닌니시 리조트의 The Pointe 레스토랑에는 예전에 슬픈 크랩케잌의 추억도 있고, 이번 가을 휴가 주제 중 하나가 멕시코 리조트에 가는 것보다 더 근사한 음식을 먹는 것이라 조금 부담이 되더라도 이 식당에서 이번엔 좀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보고 싶었다. 요즘은 토피노니 유클렐레니 젊은 세프들이 창의적인 요리를 하는 식당도 많아져서, 반드시 이 식당이 이 근방 최고의 식당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체스터 비치 주상절리대 위에 자리잡고 360도 창을 통해서 해변과 노을을 같이 볼 수 있다는 점 만큼은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워낙 유명하고 전통있는 곳이라 서비스도 만점이라 하고.. 그래서 결혼 기념일 식사를 무리를 해서라도 여기서 하고 싶었다. 어제 예약 전화를 하면서 창가 테이블로 부탁을 했는데 특정 테이블 위치 예약은 호텔 숙박 손님만 가능하다고 한다. 결혼 기념일까지 들먹이면서 좀 해달라고 땡깡을 부렸으나 (이게 아직 캐나다에선 종종 먹히긴 한다), 최선의 테이블로 안내하겠지만, 그래도 호텔 규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줸장. 일단 갔다가 테이블이 안좋으면 그냥 나올까 등등을 고민하면서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근데.. 식당에 들어서자 식당 입구에서 부터 음식 한 차례 서빙할 때 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설때까지  결혼 기념일 축하한다고 계속 반복하는데 정말 귀에 딱지가 앉는 줄 알았다. 심지어 우리에게 준 메뉴판 위에 커다랗게 Happy Anniversary 라고 써놓기도 했다. 아이쿠 내가 정말 대단한 사실을 누설 했구나. 뭐.. 덕분에 창가 자리를 획득하긴 했다.

위카니니시 호텔 앞 해변

모처럼 기분을 내러 온 것이니 식당에서 추천하는 와인 테이스팅 메뉴를 먹어보기로 한다. 일설에 의하면 The Pointe 식당이 BC주에서 가장 큰 와인 셀러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글라스 와인 프로모션을 할 때 최고의 셀렉션으로 한다는데, 이 기회에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 웨이터에게 와인을 이만큼 마셔도 운전할 수 있을까 물어보았더니, 6온즈로 5잔 정도 나오는 건데 원한다면 와인 한 코스를 2명 분으로 나눠서 서빙해주겠다고 한다. 식당에서 이런 작은 배려를 받을 때마다 왠지 그 식당의 클라스가 확 달라져 보인다. 북미에서는 소매업이나 식당 처럼 고객 서비스를 하는 업종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담당자가 재량껏 할 수 있는 권한의 폭이 넓은 경우가 많은데, 그런 상황을 겪게 되면, 아니 실제로 서비스를 받지 않더라도, ‘잠깐만.. 내가 뭘 해줄 수 있나 한번 찾아볼게’라는 립서비스 조차 쇼핑을 쾌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무슨 아트웍 같은 조그만 요리들의 연속으로 이렇게까지 배가 불러질 줄은 몰랐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첫번째 전채 와인으로 나온 리즐링은 매우 상큼한 향기가 확 피어 나와 입맛을 돌게 했고, 두번째 보르도산 화이트 (소비뇽 블랑 70% 세밀리옹 30%) 역시 훈제 오리고기 (거의 생햄과 같은 질감) 요리의 풍미를 도와주었다..그래도 최고의 조합은 첫번째 메인으로 나온 은대구 sablefish 요리와 피노누와의 조합이었다. 와인 자체가 너무 복잡한 향기를 품고 있어서 과연 생선 요리와 맞을까 싶었는데, 허클베리 – 루밥 소스와 절묘한 배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두번째 메인 와인으로 나온 2012년산 GSM은 100년 넘은 고목에서 만든 와인이라던데.. 처음엔.. 응? 너무 밍밍한데 싶었다가 안심 스테이크와의 조화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게 마리아주인가..싶었다 (안심 스테이크는 좀 질겼지만).  그리고 디저트로 나온 시나몬 빵은… ㅋㅋ 보자마자 웃음이 빵 터져 나오는 귀여운 플레이팅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3시간 동안 풀코스 식사를 마치자 창밖은 어둑어둑해졌고, 안타깝지만 날씨가 흐린 탓에 석양을 볼 순 없었다. 게다가 빗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지기 시작. 마지막으로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면서 나온 초콜릿은 뭐 그래도 이해가 가더라도, 오늘 식사 메뉴판까지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로 주는 건.. 음 나름 이 식당의 프라이드라고 봐줘야 하는 건가? 아님 이 메뉴판을 보면서 일년간 또 열심히 돈 벌란 얘긴가? 암튼 서비스 하나하나가 귀엽다. 생각해보면 어떤 근사한 식당에서 멋진 요리를 먹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이벤트를, 어떤 테마 여행을 다녀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오늘밤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게끔 해주는 자상한 서비스가 너무 고마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칠흑같은 밤길을, 더우기 악명 높은 4번 국도의 커브길을 운전하려니 좀 피곤했는데, 막상 캠핑장에 도착하자 여긴 비가 온 흔적이 아예 없다. ㅎㅎㅎ 이 동네는 무슨 날씨가 이런가? 하긴 캠핑장에서 식당까지 20km 가까이 되니 밴쿠버랑 코퀴틀람의 거리라고 생각하면 밴쿠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아.. 오늘도 물을 너무 안마셨네…하며 집에 오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더니 벌써부터 새벽에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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