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변화 – 90년대 한국영화 이야기 #3

아마도 그냥 늘 있었던 정례 보고 혹은 내각회의였을 겁니다. 오인환 (전) 공보처장관 자신도, 1993년 어느 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그 한 마디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회자될 줄은 몰랐겠죠. “영화 <쥬라기 공원>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현대자동차 150만 대를 수출해서 얻은 수익과 같다”라는 말은, 그 후로 30년 가까이 컨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마다 사용되는 잠언 같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을 때에도, 해외에서 한국이 문화컨텐츠 강국으로 성장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저 발언에 주목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 당시를 회상하면 저 얘기가 나오면서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부 각 부처에서 ‘한국형 문화 컨텐츠’를 개발하자는 명목으로 예산이 편성되었으니까요. 문화체육부뿐만 아니라, 정보통신부, 과학기술처, 영화진흥공사에서 컨텐츠 진흥 지원금을 예산에 책정했고, 서울시나 부천시, 춘천시와 같은 자치단체에서도 개별적인 진흥책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애니메이션 회사나 영화사 기획실 직원들은 그런 지원금 (눈먼 돈)을 꼬박꼬박 타 먹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무분별하게 업데이트되는 정부 정책을 수시로 검색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예산들이 개별 컨텐츠 제작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건 좀 더 먼 얘기가 됩니다. 사실 “오늘부터 ‘죽여주는 이야기’ 하나 만들자.”라고 해서 그게 그렇게 금방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정부 관료 입장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아직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던 때였죠. 그리고 “전시행정”의 습관이 사라지기 전이었으니까요. 정부부처의 예산들은 주로 ‘컴퓨터 그래픽을 만들기 위한 장비 구입’과 같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향해 집행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른 하드웨어 필요사양도 그만큼 고사양이 필요해지기 때문에, 당시 구입했던 컴퓨터 그래픽 장비들은 대부분 1~2년 후에 고철로 변하게 되었죠. 저 역시 <쥬라기 공원>을 만들었다는 SGI 인디고 컴퓨터 본체를 스캐너 테이블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이후엔 컨텐츠 진흥 정책의 집행기관도 일원화하고 집행 부문도 좀 더 상식적인 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한국영화의 폭발적인 발전의 원인을 모두 정부 지원으로 돌리기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지난 두 편동안 연재한 얘기를 다시 정리하자면, 먼저 그 발전을 받쳐줄 만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토대라고 볼 수 있겠죠. 재밌는 영화를 돈 들여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걸 소비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이 성숙되지 않았다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테니까요. 다행히 기존의 헐리우드 영화 감상을 통해 곽객들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 정책과 이후에 가정용 홈 비디오 시장까지 열리면서 이런 시장의 토대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충무로 시스템에 새로운 제작 인력들이 점차적으로 유입되면서 완성품의 품질이 향상될 수 있었던 것도 정부의 컨텐츠 진흥책이 단순한 세금낭비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주요 공신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하자면, 한국영화의 때깔이 바뀌게 된 과정에는 제작인력 외에도 숨은 공신이 있었으니 바로 ‘기획실’의 등장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영화사마다 기획실은 있었죠. 그리고 극장들도 기획실을 두고 있었구요. 주로 영화 광고 및 포스터를 광고업자들과 같이 제작한다든지,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만들어 보낸다든지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주먹구구식이긴 했었지만, 80년대 초중반에 <화천공사> – <황기성 사단>에서 이장호 감독의 영화를 제작하고, 또 한국영화 뉴웨이브를 같이 이끈 배창호 감독의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하면서, 영화사 기획실의 홍보 활동들도 점차 조직적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한국영화 산업의 분기점이 되는 영화가 나오는데 ‘신철’ 기획과 ‘김의석’ 연출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신철 대표가 기획해서 영화사에 판 영화가 <결혼 이야기>가 처음은 아니었어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같은 작품은 흥행에 꽤 성공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결혼 이야기> 만큼 영화의 완성과 흥행이 완벽하게 기획/관리된 작품은 처음이었던 거죠. 후문으로는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새로 만든 익영영화사에 4,000만 원 받고 기획을 팔았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서울에서만 52만의 관객 (현재 기준으로 천만 관객에 필적합니다)이 관람을 했으니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제작비 6억 원 중에서 삼성에서 비디오 판권 선구매 방식으로 1억 5천 투자도 했고, (아마도) 한국 영화 최초의 영화 속 PPL 광고까지 성공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실제 수익은 더 컸을 거라고 봅니다. 이 영화 이후로 모든 한국 영화의 기획서에서 PPL 광고 전략 항목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한국 영화에 끼친 영향은 <백투더퓨처>에서 나온 나이키 신발보다 크다고 해야 하겠네요.

당시 영화 기획서의 일반적인 형태를 보자면 먼저 1) 시장분석을 통해서 어떤 스타일, 어떤 장르, 어떤 내용의 영화가 잘 먹힐 것인지 예측을 하고, 2) 소구 대상층을 설정한 다음 거기에 합당한 아이템을 발굴하고, 3) 여기에 맞춘 이야기를 개발해 나갑니다. 4) 그런 후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게 되죠. 5) 시나리오 작업과 함께 제작 예산을 세부적으로 잡는데, 사실 예산 규모는 시장분석과 아이템 발굴 단계에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갈지 결정을 하고 시작하는 거죠.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좀 더 구체적인 규모가 나오게 됩니다. 6)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주요 배역들에게 보내고 연기자들을 결정하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서 주연 배우가 제일 먼저 결정될 수도 있겠죠. 그래야 투자가 결정될 테니 말이죠.  7) 투자 유치 및 마케팅 계획이 만들어집니다. 비디오 판권과 같은 메인 스폰서는 미리 결정되는 경우도 많지만, 보통 투자자들은 주연 배우가 안 나오면 안 움직이더군요. 8) 동시에 감독, 연출팀과 함께 주요 스테프가 구성됩니다. 9)그리고 이 단계까지 오면 세부 예산과 예상 흥행 수익까지 나오게 됩니다.  

이렇듯, 영화 한 편이 세세한 계획대로 만들어지면서 세련된 완성도와 흥행 수익까지 다 관리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기획서의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당연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결혼 이야기는 그 해 최고의 흥행 성공과 함께 평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이야기>의 성공 이래로, 이 정도 구체적인 기획이 없으면 대기업에 비디오 판권을 사전 판매할 수 없게 되었죠. 책(시나리오)과 주연배우만 보고 투자를 하는 도박과도 같던 기존의 한국 영화 산업들이, 철저하게 계획된 돈벌이가 되는 현재의 제작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도 바로 <결혼 이야기>의 공훈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시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나 서울시내 극장 기획실에서 근무를 하던 수많은 씨네필들이, <신씨네>, <명필름>, <영화세상>, <기획시대>, <씨네월드>, <씨네 2000> 등으로 한국 영화 기획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충무로의 <기획실 영화> 들은 “신인감독들을 소모품으로 쓴다”라든지  “유사한 장르 영화의 답습한다”와 같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전에는 지방마다 다른 소주업체가 있었고 그에 따른 주류 배급 시스템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 배급에도 그런 독점적인 지방 배급 구조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죠. 서울 개봉관 배급과는 별도로 서울 변두리, 경기-강원, 부산-경남, 광주-호남, 대구-경북, 대전-충청, 이렇게 6대 지방에서 독점적인 배급권을 가지는 지방 배급 구조는, 아마도 1950년대부터 형성되어 이후 2000년대까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말은 거창하게 배급 구조라고 했지만, 말하자면 지방 영화관들인 거죠. 하지만 90년대부터 시작된 대기업 계열 멀티 플렉스 영화관들이 지방에 있던 극장들도 사들이면서, 한국영화는 이제 제작자가 극장 배급과 팝콘 판매까지 하고, TV 방송 2차 판권까지 가지는, 세계에서 유래 없는 최고의 대기업 독점 구조가 된 셈이네요.출처 : 김미현 외, <한국영화 배급사 연구>, 영화 진흥위원회 연구자료집, 2003

사실, 50~60년대에서는, 한국 영화 제작 투자에 있어서 6대 지방 배급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했습니다. 보통 제작비 50% 이상을 투자하고, 출연 배우에 따라서 90%까지 투자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제작자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돈만 가지고, 혹은 자기 돈은 한 푼도 안 쓰고 영화를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방 흥행사가 영화 제작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 만큼, 그들의 입김도 세지게 되었었죠. 배우 캐스팅이나 시나리오 수정까지 직접 요구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지배적인 투자 관행은 70~80년대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지는데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서울의 거대 도시화, 그리고 서울 / 수도권 경제의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지방 경제가 몰락하게 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 하더라도, UIP에서 전국 직배를 시작하고 난 한참 후인 90년대 중반까지도 지방 배급권 선매는, 한국 영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씨드 머니 역할을 했습니다. 10억 규모의 영화를 기획할 경우, 3억은 비디오 판권, 3억은 지방 판권… 이런 식으로 대충 예산을 잡는 것이 가능했었죠. 그리고, 95년 즈음에 <삼성영상사업단>, <일신창투>, 그리고 <시네마서비스-서울극장>에서 전국적인 직배망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6대 지방 배급권들의 권세는 무너지게 되죠. 그리고 이후 96년에 <제일제당 CJ>에서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 (Golden Harvest)>, 호주의 <빌리지 로드쇼 (Village Roadshow)>와 같은 다국적 메이저 극장체인과 합자해서 만든 <CGV 극장체인>이 전국적으로 설립되게 시작하면서, 6대 지방 배급망과 함께 소도시 소극장들의 생명은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대기업 체제의 극장체인들이 들어서면서 개선된 점이라면, 그나마 흥행실적의 투명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 통합 박스 오피스 결산 (금액으로 환산된 흥행 기록)이 안되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극장마다 통합 전산망이 설치되어 있어서 몇 명이 관람을 했는지 정도까지는 파악이 되는 셈입니다. 2000년에 있었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 기록의 경우, 실제 관람객을 집계한 기록이 아니라, (정확하다고 보기 힘든) 지방 매출을 관객 수로 환산해서 나온 기록이기 때문에, 그 전년도 (‘삼성영상사업단’이 지방 관객 수를 실제로 집계한) <쉬리>의 흥행 기록과 일대일로 비교하기 어려운 기록이라서 “한국영화 역대 흥행 순위”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촌극이 발생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주로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 가정용 비디오 컨텐츠 회사들을 중심으로 충무로 진출 분위기가 생겼던 건, 93년 오인환 공보처 장관의 브리핑의 역할이 컸겠지만, 그보다 1991년 제정된 <종합 유선 방송법>에서 1995년부터 케이블 방송국을 설립할 수 있게 했으니,  웬만한 대기업에서는 컨텐츠 제작역량을 그 이전부터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겠죠. 그리고, <결혼 이야기 (1992)>가 이끌어 준 ‘충무로 기획영화 경향’을 통해서 “영화도 제조업 만큼이나 철저하게 품질이 관리되고 수익을 예측하게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에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모든 게 다 잘 풀린 것은 아닙니다. 일단 기획실 중심의 영화 제작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국 영화 제작은 여전히 주먹구구식 예산 집행이 너무 많았던 거죠. 그도 그럴 듯이, 보통 영화 제작비에서 스테프들 인건비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게 얼마나 나가는지 알 수 있는 표준 계약서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었어요. 연출팀, 촬영팀, 조명팀 이렇게 크게 구분하고 그냥 각 팀 리더에게 뭉칫돈을 주면 그 리더들이 알아서 분배하는 도제 시스템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중간에 영화가 엎어지면, 중도금이니 잔금을 못 받는 경우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행이었죠. 그리고, 충무로에서 관행적으로 행해졌던 스테프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든지 (한 식당을 정한 후 스테프들이 자유롭게 외상을 달고 식사할 수 있게 하는), 시나리오를 쓸 때 여관방을 잡아서 작가나 감독을 감금(?)시켜 쓰게 한다든지 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예산을 잡기가 너무 힘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여전히 영화 제작은 예측이 안 되는 난관이 너무 많았습니다. 호주 현지 로케이션으로 찍어 왔는데, 도무지 편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장면 연결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현장에서 배우와 스테프 간에 난투극이 벌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대기업 입장에서 보기엔 아직 덜 문명화된 시장에 진출한다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가끔은, 촬영장 사고로 인한 참혹한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구요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29558). 이 사고로, SK 계열이던 <미도영화사>는 한동안 한국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기도 했습니다.     출처 : 황동미 외, <한국영화산업구조분석>, 영화진흥위 연구보고, 2001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한국영화에 뜨거운 구애를 보냈던 대기업 진출은, IMF라는 결정타를 먹고 나서 완전히 충무로에서 사그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철수하기 직전에 터진 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 <쉬리>였습니다).  CJ만 제외하고 말이죠. 당시 CJ는 다른 대기업에 비해서 여러 다양한 방면으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훨씬 더 대규모의 자금을 투자하면서 시작했었거든요. 마치 기업의 사활을 걸었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내고 내실을 다졌기 때문에,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1994년에 설립되어 전 세계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스필버그’, ‘카첸버그’, ‘게펜’의 <드림웍스 SKG>에 투자하여 2대 주주가 되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국내에선 ‘송지나 작가’와 ‘(고) 김종학 PD’를 영입해서 <제이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성공한 투자는 결국 1996년에 설립한 CGV 극장사업이 되겠네요. 물론 극장업이 생각보다 수익이 얼마 남지 않는 장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한국영화 제작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충무로에서 대기업이 빠져나간 자리는 별 무리 없이 다른 돈줄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금융자본인 ‘창투사 (창업 투자 회사)’의 진출입니다. 96년부터 <은행나무 침대>의 <일신창업투자> 등에서 시작한 한국영화 투자는, IMF 이후 폭발한 ‘코스닥 빅뱅’ 시기와 맞물려 우후죽순 등장한 여러 창투사들에게 유혹적인 상품이 됩니다. 보통 창투사들의 수익 환수는 벤처기업들이 IPO (기업공개)와 주식시장에 상장을 하면서 비로소 시작되는데, 빨라야 4~5년 걸리는 IPO에 비해서 영화 제작은 보통 1,2년 안에 결과가 나오니까 매력적인 투자상품이 아닐 수 없었던 거죠. 게다가 금융자본의 경우 포트폴리오 투자나 투자조합 등을 통해서 리스크를 분산하는데 능란했었고요. 또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진행비 결제 맡을 때마다 잔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했던 대기업보다, 투자만 딱 하고 나서 수익을 챙겨가는 창투사들과 궁합이 더 잘 맞았기 때문에, 쌍자가 서로 만족한 상태의 투자 형식은 그 뒤로도 오래갈 수 있었습니다.  

90년대 후반을 거쳐 2000년대까지 이어진 창투사들의 한국영화 제작은, 이후 2005년부터 시작된 “한국벤처 투자”의 “정부 모태펀드 (개별 투자 자펀드의 자금이 되어주는 펀드)”를 바탕으로 한 투자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 연구에 의하면 전체 한국영화 제작 투자액의 77.6%가 정부 모태펀드의 자펀드 자금이었다고 하네요.    


얼마 전에 이정재 씨와 정호연 씨가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배우조합상을 탔더군요. 미국의 메이저 영화 배급사가 투자 / 배급한 한국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90년대 영화인들 중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1989년, UIP 직배에 반대하면서 당시 <레인맨>과 <인디아나 존스 3>를 상영하던 극장에 뱀을 풀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불을 지르고 했던 사람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52817) 역시, 한국영화가 수많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아 가면서 결국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룰 거라는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예술이자 동시에 산업의 얼굴을 하고 있는 영화는, 여전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진정한 발전인지 의문이 있습니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스크린이 수십 배로 늘어난다고 해도, 그 모든 스크린을 할리우드 산 히어로 무비들이 죄다 장악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이게 과연 발전인가 싶을 때도 있죠, 물론. 또 한 때, 한국 자금으로, 한국 스테프들이 모여서 만들고, 한국 배우가 한국말로 연기를 하는 영화들이 국내 극장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을 때조차, 죄다 그 나물의 그 밥 격인 조폭 영화나 최루탄 멜러물들만 가득했던 상황도 과연 이게 한국 영화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말, 정부 주도 한국산 컨텐츠 개발에 큰 힘을 보태준 이른바 “신지식인” 센세이션은, 지식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한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한국 사회에 ‘교양’이나 ‘인문학’이 멸종된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논란이나 비난들 역시, 자국 영화가 살아있을 때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 대사로 연기하는 영화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더 좋은 대안영화도, 자본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립영화들도 꾸준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반복되는 한국 영화의 위기 속에서도, 꾸준하게 작품을 만들어내고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한국 영화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종종, OTT 시장 등 현실의 변화를 못 쫓아가면서 그 옛날의 낭만을 그리워하는 순간을 마주치는 일이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밌는 이야기 들은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줄 요약 :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사회 민주화와 개방을 통해서 성숙해진 관객 눈높이, 새로운 영화 전문 인력들의 충무로 유입, 그리고 제작배급투자 시스템의 변화,  이 3박자가 극적으로 어울려져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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