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상품 소비자이자 예술 전유자로서 관객들의 눈높이는 한껏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영화의 품질은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는) 그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영화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어? 한국영화 같지 않은데?” 였거든요. 외화 수입쿼터를 받기 위해 (그나마 장사가 좀 되는) 애로물의 프랜차이즈만 계속 양산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화면 ‘때깔’이 다르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었죠. 후시녹음 퀄리티는 아예 차치하고라도 말이죠.
뭐, 말할 것도 없이 주 원흉은 낮은 제작비와 (관성적인 작업 방식에만 매몰된) 당시 충무로 영화인력 때문이었죠. 특히 화면 ‘때깔’이라는 건 촬영 / 조명 기술인데요. 모든 기술이 그렇겠지만, 촬영 / 조명은 수많은 수많은 렌즈 및 조명 기기를 실제로 경험해보고 나서야 능력치가 높아지는 것인데 (스튜디오 촬영이 아니라 주로 오픈세트나 야외 촬영이 많은 한국영화에선 기후 변화도 체크해야 하고요), 요즘처럼 디지털로 찍는 게 아니라 필름으로 작업할 때는 그게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촬영 카메라 릴 돌아가는 “따르르르르르” 소리를 돈 떨어지는 소리라고 하던 때이니까요. 가끔 촬영 스테프나 조연 배우 때문에 NG 라도 나오기만 하면, 필름 값 물어내라고 하면서 욕지거리 난무하던 시대였으니, 새로운 렌즈나 조명 시스템을 필름 테스트해보겠다는 발상은 아예 꺼내보지도 못했던 거죠.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 그렇겠지만), 전반적으로 영세한 한국의 영화사에서는 영화를 제작할 때, 보통 카메라나 촬영장비를 대여해서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기에, (자동차 폭파처럼 두 번 찍기에는 비용이 더 들어가는 씬을 빼고는) 일반적으로는 달랑 한 대를 대여해 가지고 촬영을 했었죠. 두 배우의 격한 감정이 오가는 대화 씬도 (맞은편에서 상대 역이 맞장구만 쳐주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찍은 후 컷을 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배우들 감정의 집중력이 그냥 도중에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죠. 2000년에 개봉된 <공동경비구역 JSA>의 메이킹 영상을 보면, 송강호 씨가 눈에 불을 뿜으면서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치던 장면을 여러 차례 나누어서 촬영을 하는데요. 송강호 씨가 어떻게 이렇게 감정을 퍼붓는 장면을 나눠서 찍냐고 불만을 터뜨리더군요. 이렇듯 한정된 제작 예산의 문제는, 단지 화면 때깔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작품의 퀄리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던 중, 이렇게 경직되어 있는 영화산업 현장에 급격하게 새로운 인력이 들어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이전에는 대학생 출신 영화인이라고 하면, 배우이자 감독인 하명중 씨를 빼곤 찾기 힘들었죠. 그만큼 영화판은, 뭐라고 할까… 야성적이고 거친 ‘딴따라’ 노동의 현장이었는데, 이장호, 이두용, 임권택과 같은 거장 들 밑으로, 영화를 진지한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특히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연출부 직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서,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과부춤>과 같은 한국 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나 <바보선언>과 같은 작품은 당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한국사회를 자성해보고 싶은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감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영화 특유의 도제 시스템은 새로운 인력들이 수급되면서 소위 ’80년대 뉴웨이브’를 낳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장호 감독과 배창호 감독은 한해에도 두세 편씩 본인 연출작을 개봉을 하기도 했죠. 방송사를 퇴사한 후로는 여성 서사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던 박철수 감독,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를 바라보던 장선우, 박광수 감독, 한국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재정립한 강우석, 장길수 감독, 그리고 한국영화 화면 때깔에 혁명을 일으킨 이명세, 곽재용 감독이 8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988년 <성공시대 (장선우)>,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개그맨 (이명세)>, <구로 아리랑 (박종원)>, <영구와 땡칠이 (남기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강우석)>, 1990년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황규덕)>,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명세)>, <남부군 (정지영)>,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곽재용)>, <우묵배미의 사랑 (장선우)>, <장군의 아들 (임권택)>,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장길수)> 등, 이렇게 개성이 다양한 작품들이 충무로에 쏟아져 나오면서 1980년대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 광주는 그걸 실시간으로 방관만 해야 했던 모든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에게 커다란 무력감과 부채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수치심과 죄의식 때문에, 그리고 공안정국의 검열 때문에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대체, 뭣 때문에, 저들은 시민들을 학살까지 해야 했을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학생,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식의 영화 제작과 배급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고발하자는 운동이 생겼죠. 장선우, 박광수, 황규덕 감독을 배출한 서울대 영화 써클 ‘얄라셩’과 고려대 ‘돌빛’, 이화여대 ‘누에’, 경희대 ‘그림자놀이’를 중심으로 ‘대학 영화 연합 (대영연)’이 만들어지고, 이들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또, ‘노동자 문화 예술 운동 연합 (노문연)’, ‘여성 영상 창작 집단 바리터 (바리터)’, ‘노동자 뉴스 제작단 (노뉴스팀)’, ‘서울 영상 집단 (서영집)’,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장매)’에 흡수 발전되었습니다.
이들은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 현장을 VHS 테이프로 공동 촬영해서 서로 영상 소스를 공유하며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장산곶매의 <파업전야>를 전국적으로 배급할 때에는 경찰이 상영장에 쳐들어와서 상영을 막고 필름을 압수하려고 했는데, 영화 운동 집단들이 같이 모여서 그걸 저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 사람이 여러 다른 팀에 같이 적을 두기도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충무로 현장에 같이 진출해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넣기도 했습니다. 한양대 영화 써클 ‘소나기’ 출신의 장윤현 감독과 공수창 감독은 이후 ‘장산곶매’에서 이은, 장동홍, 이용배, 홍기선 감독을 만나 같이 활동하다가, 지금은 한국 상업 영화계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식이죠. 이렇듯,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했던 8~90년대 영화 운동의 인력들이 충무로에 진입하면서, 한국 영화는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서영집’ 처럼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계속 활동하는 영화 운동팀도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 사회 7~80년대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영화 제작을 공부하기 위해서 ‘해외유학’을 가는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선진 기술을 배워와서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런 인식이 많았었죠. 그걸 떠나서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가족과 사회에 부채를 지는 인식이 있어서, 졸업하면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학생 운동을 진압하던 경찰들의 주된 레퍼토리가 “이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로 시작되었던 건, 바로 ‘대학생들은 사회와 가족에 빚을 지고 있고, 열심히 공부해서 갚아야 한다’라는 그 시대 인식을 반영했던 거죠. 하지만,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가고, 그걸 부모들이 지원해줄 수 있는 정도의 경제 능력이 한국사회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유학을 가서 연출을 공부하고 온 감독 (박광수, 홍상수, 임순례, 이광모, 이광훈, 곽경택) 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영화 기술 분야의 유학이 한국 영화의 때깔과 음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보통 영화 후반 작업 (편집, 녹음 등)이라고 하면 보통 ‘영화진흥공사’ 밖에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작사들의 선택지가 넓어지게 된 것이죠. 물론 ‘랏슈 편집’ 후 기술 시사를 한 다음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으로 최종 편집하는 전통적인 편집 방법에서, 컴퓨터에 캡처한 후 편집하는 Non-Linear (비선형) 편집 시스템으로 세계적인 추세가 바뀌면서, 비교적 저비용으로 편집 스튜디오를 만들 수 있었던 영향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A&D 스튜디오의 이규석 실장과 같은 유학파들이 한국영화 후반 작업의 수준을 한껏 올려놓은 건 무시할 수 없었던 거죠.
촬영 역시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프랑스 등 당시 영화 선진국에서 유학하면서, 그들의 제작 시스템과 제작 장비들을 몸소 배워온 사람들이 충무로로 돌아오면서 한국영화의 화면을 바꾸게 되었죠. 특히 AFI 출신의 김형구 촬영 감독은, 그 이전 세대 충무로 현장에는 없었던 DP (Director of Photography – 촬영과 조명을 통틀어서 영화 화면을 책임지는 사람) 시스템을 도입해서, <닥터 봉>, <비트> 등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때깔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존 충무로 촬영팀과 조명팀의 반발이 심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젠 충무로 출신 정정훈 감독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으니, 정말 세상이 달리지긴 했네요.
그리고, 1990년 <장군의 아들 (임권택)> 이 당시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그리고 그 전에 <영웅본색>이 전국적인 흥행열풍을 만들면서, 90년대에는 매해 꼬박꼬박 조폭 액션 영화들이 개봉하게 되었고, 또 그때마다 괜찮은 흥행결과를 내곤 했었는데요. 문제는, 보통 조폭 액션 영화들의 경우 기존의 멜로 드라마와는 달리 수많은 조연과 보조 출연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거였죠. 그래서 이때부터 충무로 감독들과 영화 제작자들은 대학로를 뒤지고 다니면서 괜찮은 연기자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물론 당장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거물급 신인배우가 탄생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래도 극을 이끌거나 한 장면을 장악할 수 있는 배우들이 이 때 많이 발굴됩니다.
물론 김명곤 씨 등, 그 이전에도 연극무대 출신 영화배우가 없었던 건 아니었죠. 하지만, 아무래도 영화계와 연극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던 시대였어요. 무대에서 연극하시는 분들 생활이 너무 처참할 정도로 힘들기도 해서, 연극 배우가 영화계에 진출하면 동료 배우들에게 배신자 낙인을 받기도 했고요. 그래도, 조폭영화와 함께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90년대 부터는 영화계와 연극계, 쌍자 모두 이익이 되는 연기인력 공유가 시작됩니다. 현재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송강호, 황정민, 설경구 배우들이 바로 90년대에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넘어와 한국영화의 퀄리티를 한껏 높혀준 배우들이죠.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 영화 아카데미를 빼놓을 수가 없겠죠. 현재는 학교 교사 위치도, 학제도 변경된 것으로 아는데요. 1984년 남산 영화진흥공사 청사 건물 구석방에서 개교한 후 90년대 초반까지는 연출과정만 있어서 감독 사관학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단 1년 동안, 집중적으로 영화 연출 기술만을 배울 수 있었던 거죠. 무엇보다 학비는 전액 무료였고, 지원자격에 나이 제한이 없어서 처음에는 영화 현장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 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한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허진호, 임상수, 봉준호, 김태용, 최동훈, 장준환 등.. 영화 아카데미 출신 중, 현재 한국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자면 끝이 없죠.
영화 아카데미가 성공하게 된 요인을 보자면, 일단 도제 시스템에서는 할 수 없었던 모든 걸 할 수 있었다는 걸 들 수 있겠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영화 제작현장에서 서열이라는 게 무척 엄격해서 새로운 의견이나 문화를 수입하는 게 불가능했었거든요. “스크립터를 3년 해야 세컨드(조감독)가 되고, 세컨드를 3년 하고 퍼스트, 퍼스트를 3년 하고 나야 비로소 감독 입봉을 한다”는 속설이 있을 때였죠. 90년대 초반만 해도 신인 감독이 경력이 많은 촬영 기사의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대는 건 용납받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감독은 연기자들을 보고 연출을 하곤 했어요. 감독 의자 앞에 아예 모니터가 있고, 세계에도 유래가 없는 현장 편집기가 돌아가는 이 시대의 한국 영화 촬영 현장을 생각하면, 저 시대 충무로에는 정말 웃기는 관습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이전에 현장 경험이 있든 없든, 영화를 배운 적이 있든 없든, 나이가 몇이든 간에, 모두가 같은 자격을 가지고 모여서 영화에 대해 논의를 하고, 최신 촬영 장비를 직접 만질 수 있었던 건, 당시 영화광 청년들에게 엄청난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 영화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어떤 조직 (사회)에서 차별을 없애고,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 그 조직 (사회)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요?
끝으로, 해외여행 자율화와 가정용 비디오 시장이 불러들인 대기업 덕택에, 충무로 영화 정보가 쉽게 공유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영화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영화 프로듀서 입봉을 준비하던 어떤 선배가, 어느 날 잔뜩 흥분해서는 제게 말을 하더군요. 이제 자긴 제작부장으로 입봉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서 엄청나게 두꺼운 명함집을 보여주는데, 그곳에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모든 관계자 및 업체들의 연락처가 빼곡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뭐… 사실 지금도 무슨 일을 하나 도모하려면,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내는 게 가장 힘든 일이긴 하죠. 그래도 예전의 충무로는 너무나 정보 공유에 폐쇄적이어서, 저 정도 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곧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대변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제작팀을 하나 구성하는 일에도 기존의 인맥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만 일할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대기업이 영화판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폐쇄된 사회도 어쩔 수 없이 주먹구구식 관행을 정리하고, 조금씩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부터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새로운 인력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죠. 굳이 도제 시스템에서 수업을 하고, 인맥을 만들고, 그렇게 자기 이름을 알리지 않더라도, 이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업 영화계에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듯, 영화운동, 한국 영화 아카데미, 그리고 유학파와 대학로 연극 무대 출신들이 기존의 한국 영화 도제 시스템에서 성장한 인력들과 서로 어울리고 보완해 가면서, 1990년대 한국 영화는 “한국영화 같지 않다”라는 칭찬이 무색할 정도의 품질로 성장하게 됩니다.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 (1992)>,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 (1993)>, <마누라 죽이기 (1994)> 까지는 긴가민가 했었던 장르적 완성도는, 1995년 <닥터봉 (이광훈)>과 1996년 <은행나무침대 (강제규)>에서 헐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기, 연출, 촬영, 후반 작업 등 모든 부분에서 월등하게 상향된 제작능력으로 인해, 연출가들의 참신한 시도가 실패로 이어지는 확률을 줄어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986년에 한국 영화 최초로 파나비전 카메라를 사용한 영화 <황진이 (배창호)>와 현재 세계적인 명성을 안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 (1992)>은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했지만, 2000년에 한국 영화 최초로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는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하게 된 것이죠.
기초적인 장르적 완성도를 확보한 한국 영화계는 90년대 중반 이후 <쉬리>, <여고괴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폭발적인 흥행 능력을 확인하면서, 좀 더 다양한 도전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2003년, 한국 영화 최고의 해를 만드는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로 칸 그랑프리를 거머쥔 <올드보이 (박찬욱)>, 스릴러 장르를 재해석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정통 멜로드라마 <클래식 (곽재용)>, 공포영화 장르의 품격을 보여준 <장화, 홍련 (김지운)>, 그리고 모든 장르를 혼합 재구성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받은 걸작’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그리고 ‘천만 영화’라는 수식어를 처음 갖게 된 블록버스터 <실미도 (강우석)> 등… 한국영화사에 남을 영화들이 한 해에 한꺼번에 개봉했던 해입니다.
함께 읽기 좋은 글 :
성하훈의 <한국 영화 운동 40년> http://omn.kr/1qg4k
씨네 21 <영화 아카데미 20년>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1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