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파쇼정권 타도”라는 구호를 여기저기서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귀엽고 순진하기만 한 소년이었던 저로서는 “파쇼”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찾아본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독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집단’ 혹은 ‘다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사전적 의미의 파쇼정권이란 어느 한 독재자가 철혈통치를 하면서 모든 민중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정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같은 선동꾼에 의해서 모든 국민들이 집단으로 꽁꽁 뭉쳐 다른 나라나 종교, 민족들을 적대하는 정권을 의미했던 거죠.
이런 사전적 의미를 보여주듯이, 이 영화의 시작은 제복을 입고 대열을 꾸려서 행진하는 독일군의 모습과, 타민족과 타국에 대한 혐오에 열광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다큐멘처리처럼 보여줍니다. 여기에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은 ‘비틀즈’의 <I wanna hold your hand> 함부르크 레코딩 버전인데요, 자신들의 아이돌만 배타적으로 응원하고 다른 아이돌에게 적대하는 빠순이, 빠돌이의 증상을, 파쇼정권에 환호했던 당시 독일 국민들과 등치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조조 래빗 (Jojo Rabbit, 2019)
제작 :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피키 필름즈, TSG 엔터테인먼트
배급 :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각본 / 연출 : 타이카 와이티티
원작 : 크리스틴 뢰넨스 ‘갇힌 하늘 (Caged Sky)’
주연 : 로먼 그리핀 데이비스, 토마슨 멕킨지, 스칼렛 요한슨, 타이가 와이티티
이렇게 첫 장면부터 감독은 자신이 각색한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을 숨기지 않습니다. 권력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고 열광만 한다면, 언제든지 국민 모두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처음 유겐트 캠프에서 조조가 토끼를 살해하는 걸 머뭇거릴 때 주변 아이들이 “Kill!”을 합창하는 장면은, 괴물은 (자신들의 상상 속에 있는) 뿔난 유태인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선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국민이라는 걸 강하게 웅변합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애초에 원작 소설 제목 자체가 <갇힌 하늘 (Caged Sky)>이었으니, 정치 선동에 세뇌된 어린아이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요하네스의 나이는 17살입니다)에게 보였던 세상이 사실 새장 속이었다는 걸 제목 자체에 함축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영화에서는 새장에 갇힌 토끼 그림 한 컷으로 보여주었구요.새장 속에 갇혀있는 토끼는, 나치의 거짓 선동에 사로잡혀 있는 ‘조조’일 수도, 인종청소를 피해 숨어 사는 ‘엘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생각 없이 국뽕에만 심취했던’ 독일 국민들에 대한 조롱만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바보 같은 광기에 휘말린 유겐트 캠프’나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아돌프’와 같은 설정은, ‘홀로코스트’를 독일인 시점에서 그리려고 할 때 의례히 따라올 비난에 대한 사전 방어일지도 모르겠어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서 피해자 입장에서 홀로코스트를 서술한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조차, 공개 당시에는 인류 역사의 비극을 소재로 코미디를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영화 초반에 나치 당원들과 유겐트 대원들이 책을 태우는 장면 역시, 선입견을 가지고 영화를 비난하는 것은 파쇼정권의 문화 검열과 다를 바 없다는 경고문으로 슬쩍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영화는 시종일관 정치가들의 선동에 휘말린 독일인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냅니다. 영화는 처음 “I wanna hold your hand” 시퀀스부터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이어가지만, 정작 나치 통치 하의 마을 ‘팔켄하임 (Falkenheim)’에는 거의 텅 빈 거리에 군용 트럭만 지나가고 있고, 전쟁을 홍보하는 포스터만 잔뜩 붙어있죠. 지난한 전쟁 속에서 마을은 죽어가고 가정마다 얼마 안 되는 빵을 쪼개서 먹어야 하는 형편이며, 시장도 파티도 없는 마을 한가운데 광장은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개 처형하는 장소로 쓰입니다. 엄마의 주검을 안고 오열하는 소년의 모습을 담은 장면과 함께 광장 주변 주택가 창문들 인서트를 차례로 나열하면서, 비극을 목도했더라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던 당시 현실을 반영합니다.
이렇듯 영화 초반부에 페럴리 형제의 화장실 유머와 미스터리,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관습들을 번갈아 보여주며 발랄했던 분위기는, 영화 중반부가 넘어서면서 독일 제국주의의 폭력이나 전쟁의 참사를 보여주는 묵직한 연출을 더 돋보이도록 만들어줍니다. 조조를 조롱하면서 전장으로 떠나던 유겐트 대원들은 부상병이 되어 돌아옵니다 (혹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영화 막바지, 팔켄하임 도시가 함락되는 시퀀스에서는 일반적인 (액션 영화 연출의 정석인) 액션-리액션 컷 배치를 배제한 채, 포격과 사격의 피해자들 만을 집중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바보같은 전장에 휘말린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기 전에 모두 살아남아야 한다 (Everybody’s gotta live before you know the reason why)”라는 가사가 들어있는 “Love”의 <Everybody’s gotta live>가 배경음악으로 흐릅니다.
사람들이 다른 민족이나 종교를 혐오하고, 협소한 자원을 두고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 대대로 독재정권들이 국민들을 손쉽게 통치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이용당하면서 다른 사람을 증오하다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의미 없는 피를 흘리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혐오와 반목을 그만 멈추고, 서로 사랑하는데 주어진 삶을 더 많이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맨 마지막에서 “포화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우리는 키스를 나눴지.”라는 가사를 담고 있는 ‘데이빗 보위’의 <Heroes>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이제 그만 반목과 분열을 종식하자는 감독의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주 1)
그래서, 지금 동유럽 땅 한복판에서 침입자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만큼이나, 영문도 모른 채 증오심만 교육받고 전장에 투입된 러시아 청년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하루빨리 총을 버리고 가족의 품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남는 것이 승리하는 거야 (You’re being challenged; they say you can’t live, that you won’t live. If that comes true, then they win).”, “삶은 우리가 받은 선물이라서, 축복하고 지켜나가야만 해. 우리에게 삶을 선사한 신께 감사하기 위해 춤을 춰야 해 (Life is a gift and therefore we must celebrate it, hold on to it. We have to dance to show God we are grateful to be alive).”와 같은 극 중 ‘로지’의 말은, 나치 정권의 인종청소에 부화뇌동하던 아리아인들에게도, 목숨의 위협을 받고 숨어 살던 유태인에게도, 침략자인 러시아 군인에게도, 조국을 지키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실 꼭 전쟁 때문 만이 아니더라도, 사실 삶은 내 맘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예상치 못했던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하루하루 넘겨 나가는 것도 벅찬 상황이 많죠. 물론 내 노력의 대가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 성과가 영원한 것인지, 혹은 반드시 기쁨으로 이어질 것인지조차 불확실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은 우리가 뭔가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아서 받는 처벌도 아니고, 우리를 미워하는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순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온 카우보이 인형 ‘우디’와 눈물의 이별을 하거나, 어릴 적부터 친구이자 멘토로 같이 해 온 ‘아돌프’를 창 밖으로 차 버리는 것보다, 더 진정한 ‘성숙’과 ‘독립’의 순간이 되는 거겠죠.
때문에, 이 모든 절망과 시련의 순간 속에서도 사람은 삶을 축복하고 춤을 춰야 합니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릴케의 싯구 “기쁨도 시련도, 그 모든 걸 맞이하라. 그리고 계속 살아가라.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계속 바뀌는 것이니까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Beauty and terror. Just keep going. No feeling is final).”가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노신’의 말처럼, “희망이란 ‘길’과 같아서, 원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계속 걷다 보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겠죠.
지금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응원합니다.
주 1) “통일이 되기 전인 1987년 6월 초 데이비드 보위의 ‘히어로즈 콘서트’가 예고되자 동독과 서독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공연은 서베를린 의사당 앞 야외광장에서 사흘간 이어졌다. 가까이 베를린 장벽이 있었는데 동독 젊은이를 위해 공연장 스피커를 동독을 향해 돌려놓았다.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동서독 젊은이가 〈Heroes〉를 열광하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출처 / 인용 : http://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3975&Newsnumb=2018043975)
당시 베를린 콘서트 상황을 기록한 뉴스 / 다큐멘터리
베를린 콘서트 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