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달랑 그거 하나

아내는, 자신이 감동했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걸 무척이나 즐기는 사람이라서, 자신이 산 상품이 마음에 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하는 것도 좋아하고, 다른 친구들과 같이 갔던 식당이 마음에 들었다면 반드시 나와도 같이 가보고 싶어 한다. 나 빼고 혼자서 한국에 갔다 오기라도 한다면, 이후 최소 일주일간은 아내의 한국 여행기를 들어줘야 하기도 했다. 그런 아내에게 있어서, 동생이랑만 같이 갔었던 2016년 ‘걸프 군도 (Gulf Islands)’ 캠핑 여행 일정을 남편과 복습하면서 가이드까지 해줘야겠다는 야망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캠핑 트레일러를 사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 계획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2018년 가을 캠핑 계획은 아예 연초부터 결정이 되었었다. ‘갈리아노 섬 (Galiano Island)’ 과 솔트스프링 섬 (Salt Spring Island)’ 을 거쳐서 밴쿠버섬까지 들어가는 일정이었는데, 이때에도 한국에서 처제가 와서 같이 동반하게 되었다. 밴쿠버섬에는 몇 해 전에 세계 일주 여행을 하다가 밴쿠버에 들렀던 대학 때 친구 부부와 같이 갔었던 라쓰트레버 해변 주립공원이 있는데, 아내는 그때의 즐거웠던 추억을 처제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치, 나에게 보여주려고 솔트스프링 섬 일정을 넣은 것처럼.

‘걸프 군도 (Gulf Islands)’는 밴쿠버섬과 광역 밴쿠버 사이에 있는 일련의 섬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인데, 밴쿠버섬과 BC 주 (혹은 미국 워싱턴주) 사이에 있는 바다를 ‘샐리시 바다 (Salish Sea)’라고 해서, 옛날 이 지역에서 살던 원주민 부족 이름을 딴 바다가 있고, 그 바다에 있는 섬들 중, BC 주 영토는 ‘걸프 군도’, 미 워싱턴주 영토는 ‘산후안 제도 (San Juan Islands)’라고 한다. 광역 밴쿠버 ‘트와슨 (Tsawwassen)’ 페리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페리 중에는, 밴쿠버 섬 빅토리아시 근처 ‘스와츠 베이 (Swartz Bay)’ 터미널로 곧바로 가는 직항 페리도 있는 반면에, 걸프 군도의 섬들을 돌아 돌아서 가는 완행 페리도 있다. 물론 BC 페리가 걸프 군도의 모든 섬들을 다 들르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네댓 개 섬에만 페리 항구가 있어서, 나머지 작은 섬들은 개인 소유의 배를 이용해서 가야 한다. 우리의 첫날 목적지는 ‘갈리아노 섬 (Galiano Island)’이었기 때문에, 트와슨 페리 터미널에서 완행 페리를 타기로 했다.트레일러를 끌고 페리에 탑승할 경우, 전체 길이에 따라서 승선료를 낸다

이 당시, 나는 회사 일이 무척 바빴기 때문에, 휴가나 캠핑 여행 일정에 대해서는 아내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있었는데, 사실 ‘갈리아노 섬’에 대해서는 도착 직전까지 잘 알지도 못했다. 그냥 아내가 가자는 대로 페리를 탔고, 가자는 대로 캠핑 트레일러를 끌고 다닐 뿐. 아니, 사실, 섬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우리가 이날부터 며칠 묵게 될 ‘몬테규 해상 주립공원 (Montague Provincial Marine Park)’ 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언젠가부터 BC 주립공원 홈페이지에 가면 기가 막힌 바다 노을이 보이는 사진을 걸어두곤 했는데, 그 사진이 바로 ‘몬테규 주립공원’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암말 않고 아내가 시키는 대로 운전을 하던 중, 우리의 도착지가 ‘몬테규 주립공원’이라는 걸 알고는 “엉? 우리 여기 가는 거였어? 와아아아… 근데 저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더라?” 하는 감탄과 탄식이 섞인 말을 반복하게 되었다.해상 주립공원의 경우 대개 선착장이 있고 배를 타고 올 수도 있어서 해안가에도 간판을 세워둔다

갈리아노 섬의 ‘스터디즈 항구 (Sturdies Bay Ferry Terminal)’에 도착했을 때가 오전 11시쯤. 아무래도 작은 섬이라서 그런지, 15분 정도 운전을 더 하고 가니 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 트레일러 세팅을 마치고 나서 피타빵과 야채 볶음, 허머스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캠핑장 주변을 살폈다. 첫날은 주로 캠핑장 근처 산책을 하며 보냈는데, 무엇보다, 이제는 왠지 몬테규 주립공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남아버린, 그 기막힌 저녁놀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자전거를 타고 캠핑장과 그 근처의 해안 절벽들을 천천히 살핀 후에 다시 상을 편 후 저녁 식사. 먹고, 마시고, 왁자지껄 떠들다 보니까 어느새 오후 7시가 되어 해가 뉘엿뉘엿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생동물들 때문에, 먹던 걸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일단 카라반과 차 안으로 순식간에 쑤셔 넣은 후, 캠핑장에서 가까운 서쪽 해안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호화찬란한 저녁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동해안 낙산사에서 본 일출처럼, 순식간에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게 물들게 되었다. 아… 주립공원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이 뽀샵질 하나 없는 사진이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차를 몰고 나서서 섬 북쪽을 향했다. 손바닥만한 갈리아노 섬에는 주립공원이 5개나 있어서, 사실 마음만 먹으면 가 볼 곳도 많고, 또 생각보다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는데, 이날 가 본 섬 북쪽 말단에 있는 ‘디오니시오 곶 주립공원 (Dionisio Point Provincial Park)’은 그냥 가벼운 등산코스 끝에 전망대가 하나 있는 것과 같아서, 기암절벽과 주상절리대가 오밀조밀 펼쳐져 있는 걸 기대했던 나로서는 좀 아쉬웠다. 그래도 아내가 여행 전부터 미리 찜해둔, 이 동네 주민들이 모두 사랑한다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푸짐하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칼로리를 소모해뒀다.

각종 SNS와 여행 전문 사이트에서 90%에 가까운 극찬을 받은 F 식당의 음식들은 생각보다 너무 평범했다. 십여 년 전부터 자연산과 유기농 재료를 전면으로 내세웠던 광역 밴쿠버의 외식 문화는 몇 해 전부터 로컬 재료를 사용하는 식단이라는 걸 주요 홍보전략으로 사용하는데, (자칭)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는 이곳 걸프 군도에 있는 식당도 마찬가지로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냥 그냥 밴쿠버와 비슷한 수준의 자연식 샌드위치나 팔라펠, 부리또가 나왔고, 2018년 기준으로는 서빙 양에 비해 가격이 꽤 높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식당 옆에 있는 길모퉁이 슈퍼에서는 술도 팔고 있어서, 저녁때 마실 와인도 몇 병 샀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류 판매는 주 정부에서 지정한 주류 전문 판매장에서만 팔게끔 되어 있었는데, 이런 도서 지역이나 외곽지역에는 특별 예외규정을 두어 일반 가게에서도 주류를 팔 수 있었다 (BC Liquor Rural Agency Store https://news.gov.bc.ca/releases/2021PSSG0006-000143). 이민 초기에 일했던 B 섬의 슈퍼에서도 이 면허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 ‘시마부장’ 등 일본 만화를 통해 와인 지식을 익혔던 내가 곧바로 와인 주문 담당자가 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물론 만화에 나왔던 프랑스 와인들을 BC LDB를 통해서 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길모퉁이 슈퍼를 운영하시던 분은 한국인이었는데, 나 역시 B 섬 슈퍼에서 일했던 적이 있어서 그랬는지 무척 반갑다는 생각이 들어서 금방 편하게 얘길 나누게 되었다. “어이쿠 이렇게 멋진 곳에서 살고 계시니 너무 부럽네요”라고 했더니, “아유.. 이 조막만한 섬에 뭐 볼 게 있어요… 노을.. 달랑 그거 하나 볼 거 있지..”라고 말하는 표정에는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식사를 마친 후, 식자재가 있는 큰 슈퍼에 가서 야채와 고기를 좀 더 사고, 더위도 식힐 겸 근처 공공 도서관에 들러서 구경했는데 최근에 만들어진 건지 모르지만 건물도 크고, 시설도 매우 깨끗하고, 소장 도서도 제법 많아서 마을 공동체 정보의 중추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이런 외곽지역에 와서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아내와 하는 “나중에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으이그. 또, 또, 또 그런다..” 하는 틀에 박힌 만담을 나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을 구경을 마치고 나서는 섬 남단에 있는 벨하우스 주립공원 (Bellhouse Provincial Park)와 절벽 공원 (Bluffs Park)를 차례로 들러 보았는데, 절벽 공원 역시, 그 이름도 무색하게, 아찔한 기암절벽이 아니라 완만한 등성이가 해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캠핑장으로 돌아와서 사 온 야채들과 소시지를 볶아 와인과 함께 먹으면서 또 해질 시간을 기다린다. 저녁을 너무 일찍 시작했는지 먹을 만큼 먹고, 떠들 만큼 떠들었는데도 해가 질 생각을 안 한다. 결국 음식들을 또 모두 치워놓고, 캠핑장 주변으로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했다. 몬테규 선착장에도 가보고,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이미 7시. 하늘이 슬슬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있었는데, 저 멀리 보이는 작은 틈 사이로 저녁놀이 집중적으로 새어 나와 바다를 비췄는데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노을빛의 샤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홀한 저녁놀의 잔상이 아직 남은 채로 카라반으로 돌아와서 마시던 와인을 마저 마셨다.

아내와 처제 둘 다 사행성 게임에는 별로 관심을 안 두는 편인데, 아내에게는 신혼 때부터 몇 차례 고스톱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원래 관심이 없는 건 금방 까먹는 법이었고, 그리고 이민을 온 후에는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고스톱을 치거나 하는 일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는 화투가 없어졌다. 그러던 중 아내가 좋아하는 웹툰 작가가 만화 캐릭터를 사용한 화투를 발매했다는 소식을 듣고 처제에게 부탁해서 사오게 했는데, 화투장 그림이 입맛에 맞게 귀여워졌다고 해서 금세 화투를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나 역시 또 금방 까먹을 것 새로 가르쳐주기 심드렁해 했다. 그러자, 아내와 처제는 둘이서, 이건 뭐.. 정체도 국적도 없는 자기들만의 규칙을 만들어서 게임을 시작했는데, 하루 종일 투닥거리다가도 저렇게 둘이 자기들만의 놀이를 만들어서는 깔깔대며 좋아하는 걸 보니, 자매는 자매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40년 전부터 저러고 놀았겠지.


몬테규 해상 주립공원 (Montague Harbour Provincial Marine Park https://bcparks.ca/explore/parkpgs/montague/) : 걸프 군도의 갈리아노 섬 서쪽 해안에 있는 주립공원. BC 주립공원 홈페이지나 각종 홍보 책자에 이 공원에서 찍은 저녁놀 사진이 들어가는 걸 보면, BC 주립공원의 얼굴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16개의 차량 진입 가능한 사이트와, 28개의 워크인 사이트가 있는 반면, 수세식 화장실이나 샤워시설은 없다. 갈리아노 섬에는 이 외에도 네 군데 다른 주립공원이 있으니, 우정 페리 값을 내고 와서 3~4일 묵으며 섬을 찬찬히 돌아보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5개의 주립공원 중 이 몬테규 해상공원에만 프런트컨트리 캠핑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가까운 시내 : 갈리아노 섬 시내

광역 밴쿠버로부터 접근성 : 1/5

이동통신 / 데이터 : 없음

프라이버시 : 2/5

수세식 화장실 / 샤워실 : 없음

시설 관리 / 순찰 : 1/5

RV 정화조 : 없음

RV 급수 시설 : 없음

캠핑 사이트 크기 : 2/5

나무 우거짐 : 2/5

호숫가 / 강변 / 해변 : 있음

햇볕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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