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헤딩 비긴스

그러던 중, 아내가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애견 미용 비즈니스를 열기로 했다. 너도 알다시피 울 마눌이 또 개들을 무지하게 좋아하잖냐. 그래서 줄곧 애견 관련 일을 하고 싶어 했었거든.

그래서 비즈니스 경영에 대해 우리가 정말 아무런 경험이 없었지만, 일단 ‘열정 페이’를 받아가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사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줄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자그마한 비즈니스에서 나오는 수익을 두 가구가 나눠 가져가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더라구. 잘 모르는 사람 간 동업에서 벌어지는 신경전보다는, 너무 벌이가 영 시원치 않았다는 게 첫 달부터 고난이었다.  

그나마 가게 내부에 나름 여유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케어(돌봄) 서비스, (미용 후) 기념사진 촬영, 맞춤 옷 제작 등으로 어떻게 사업 확장을 해보려 했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애견 옷을 수입해서 판매해 보려고 했었는데, 2000년 초반 당시엔, 아시안 인구 비율이 높은 밴쿠버에 조차 소형견은 찾기 힘들었고, 대형 견주들은 개들에게 옷을 입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더라구. 그러다 보니, 비옷이나 장화 같은 기능성 의류 외에는 애견 의류를 취급하는 곳이 거의 없었어

결국 은행계좌에 박아둔 돈을 한 푼 두 푼 까먹는 건 사업을 인수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었어.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나마 조금 있던 목돈이 사업 인수 자금으로 들어가 있어서 당장 응급상황이 벌어질 경우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전혀 없어졌다는 거였지. 이쯤 되자 주변의 지인을 총동원해서 가릴 것 없이 어떤 알바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한국의 지방 도서관 카탈로그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한국 보험회사 영어교재 번역, 유학원 컴퓨터 세팅 및 홈피 디자인 등등.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알바를 받아서 했었지.

아.. 하하하. 이삿짐 나르는 것도 하루 했었는데… 그러고 나서 완전히 뻗었지 뭐냐. 어릴 적부터 지인들 이사를 많이 도와주고 다녀서 나름 요령도 있었고 자신도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돈 받고 하는 일은 수준 차이가 확연하더라구. 그날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열량을 확보한답시고 쉴 때마다 뭔가를 쉬지 않고 먹었는데, 나는 쉬는 시간에는 너무 지쳤기 때문에 아무것도 입안에 넣을 수가 없더라. 그날 밤 열 시간 남짓 일을 마치고 120불인가를 현금으로 받았는데, 뭔가 기분이 복잡해지고 울컥하고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IMF 때 “아빠 힘내세요” 뭐 이런 식의 TV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치 그 마지막 장면 같았어.

여러 가지 알바 중, 도서관 카탈로그 번역 알바는 그래도 나름 괜찮았다. 물론 내 영어 실력은 통번역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당장 그런 것에 양심 가책을 느낄만한 상황이 아니었거든. “가난한 사람이 자기 양심을 건사하지 못하는 건 사회 전체에 책임이 있다”는 궤변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고는 목 디스크가 생길 정도로 집중을 해서 했었어. 그러다 보니 내 실력에 비해 과분한 인정을 받게 되어 일감을 더 받기도 하고, 또 벌이도 제법 괜찮아서, 아예 구직활동 포기하고 전문 번역가 되어볼까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초벌 번역은 퀄리티보다는 스피드가 중요했거든). 하지만, “을乙”도 아닌 “정丁”정도 되는 재하청의 재하청 입장으로 계속 일하는 걸 내 이민생활의 커리어로 선택하긴 겁이 나더라. 대학 1학년 때 갔던 농촌 봉사활동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고즈넉한 농촌 풍경이나 고된 농사일이 아니라, 사전 통지도 하나 없이 당일 아침에 후려쳐진 원유 수매 가격통보에 어이없어서 입만 뻐끔거리던 농민의 모습이었거든.

그리고, 뭘 하더라도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현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경력을 쌓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구직활동의 첫째 요건이었기 때문에, 번역 알바를 하는 도중에도 쉬지 않고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었어. 당시 영어 실력과 불안정한 직종의 특성상 애니메이션 회사 취업은 아예 취업 리스트에서 빼버렸고, 한인 컴퓨터 가게나 건설경기 활황을 틈 탄 페인트 공에도 지원을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 전자부품 조립공장의 라인 작업은 전화로 인터뷰까지 봤지만, 급한 번역 일이 마침 몰려 들어와서 내 쪽에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

사실, 캐나다에는 신규 이민자들의 정착을 도와주는 공공기관이나 비영리 단체들이 제법 많거든. 조금만 알아보면 다 찾을 수 있고 이들로부터 공식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많은 신규 이민자들이 교민 사회 내에 돌고 있는 정보에만 의존해서 생활하고 있는 상황이었어. 어쨌든 기약 없는 취업활동만 반복하고 있던 중에, 비씨주 ‘이민자 봉사회 (ISS BC)’에서 주관하는 실업보험 세미나에 참석을 했는데, 캐나다에서는 실업보험(EI) 수령 자격이 생기면 덩달아 국비를 지원받아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2003년 당시 기준). 여기서 국비 지원이란, 학비, 교재비는 물론이고 생활비까지 포함한다고 하는데, 중국인이나 이란인 이민자들은 아주 잘 이용하는 프로그램인데 한인 이민자들에게는 잘 안 알려져 있다고 하더라구 (이런 신규 이민자 지원 프로그램이나 실업급여 수령자 지원 프로그램은 계속 바뀌고 있으니까, 그때그때 새로 알아봐야 해).

이 정보를 얻고 나서는, “그래. 이제 종목을 가리지 말고, 정식으로 세금 및 4대 보험을 내고, 나중에 실업보험을 탈 수 있는 그런 직업이라면 무조건 구하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지. 일단 무슨 일이든 시작하고, 나중에 실업보험을 타는 상황이 생기면 그때부터 작심하고 공부를 하자는 계획이었어. 그러다가 지역 정보 신문에 실린 한인 정육점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해서 잠시 일하기도 했었어.

당시로서는 밴쿠버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장 고기 납품을 많이 하는 정육점이었는데, 특히 LA 갈비처럼 한식당이나 일식당에 특화된 정육제품은 다른 현지 정육점에서는 취급을 안 했으니 나름 경쟁력이 있었나 보더라구. 내가 하는 일은 고기 배달이었는데, 아… 그리 만만치는 않더라. 특히 정육점에 배달용 박스가 모자라는 날이면 두 겹으로 겹친 비닐봉지에 담아 다니곤 했는데, 그걸 한 손에 50 파운드(22kg?)씩 양손 가득 들고 다니다 보면, 저녁엔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 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은, 현지 사회에 어떻게든 적응을 하자는 마음으로 불평 없이 계속 하려고 했었어. 

크기에 비해 매출이 높은 정육점이다 보니까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제법 많았는데, 특히 갓 고등학교 졸업한 이민 1.5세대 들과 같이 일하는 건 꽤 재미가 있었다.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 본인들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려고 하는 아이들에게 감명을 받기도 했었고. 게다가 점심 식사를 직원들 모두 매장에서 같이 먹는 일도 나름 즐겁더라. 직장이 직장이다 보니, 그리고 하는 일이 육체노동이다 보니까, 직원식사로 무한정 공급되는 고기 섭취가 은혜로웠고.

또, 배달을 다니면서 납품되는 고기의 양을 보고, 각 식당들의 매출을 가늠하는 것도 재미난 일이었어. 당시만 해도, 당시 밴쿠버 한인 교민사회에서 성공한 비즈니스란, 새로 비즈니스를 창업한 후 매출실적을 많이 올린 다음에 고가의 권리금 (목돈)을 받고 팔아 넘기는 걸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때문에, 식당이 좀 잘 된다 싶으면 주인이 바뀌면서 품질이 저하되기도 했다), 장부 수치상의 매출보다 실제 고기 납품 현황이 더 확연하고 정확하게 매출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다.

그래도 배달 일 자체는 너어무 힘들더라. 특히 화물용 밴 적재공간 높이가 애매해서, 비스듬하게 허리를 숙인 채 짐을 정리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더라구 (이때 다친 허리 디스크가 아직도 종종 재발이 된다). 또한 화물용 밴 운전을 하는 일도 처음이어서 쉽지 않았는데, 마침 그 해 겨울은 밴쿠버 답지 않게 지독히도 눈이 많이 왔었고, 후륜구동 밴을 – 그것도 다 닳은 타이어로 눈길 운전을 하다 보니 식겁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리고 첫 일 년 동안에는, 통장 잔고 줄어드는 상황에 짓눌려 맘 편히 놀러 다니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밴쿠버 지리에 대해 많이 미숙한 상태이기도 했었거든. 슈퍼에서 산 종이 지도 책에 표시를 해가면서 더듬더듬 운전을 해야 했었다. 이리저리 접촉 사고도 몇 번 내고……

이렇게 몇 주째 적응을 못한 채 몸도 마음도 피폐해 가던 무렵, 그리고 아내 역시 벌여놓은 사업에서 한 푼도 못 건지고 있을 무렵 (오히려 공과금 등으로 손해를 보던 상태), 알고 지내던 지인이 구인광고를 하나 보여주더라. 웨스트 밴쿠버에서 배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인, B 섬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입주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였어. 무엇보다 부엌이 있는 사택이 제공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섬 생활이라니.. 나중에 돈을 많이 모으는 날이 오면, 그 돈을 쓰면서라도 해보고 싶었던 게 섬 생활이었는데, 앞뒤 잴 것도 없이 그 날로 전화해서 그 주말에 이력서 들고 찾아가 면접을 보았다.

한인 이민자 두 가족이 같이 운영하는 그 슈퍼마켓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매출도 아주 높아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네 가구나 되더라구. 소매점에서 일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잘할 수 있을지, 잘 적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현재 답답한 상황이 이걸로 타개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일이 그렇게 풀리려는지, 내가 겨울 빙판길 운전을 어려워한다는 걸 알게 된 정육점 사장님도 퇴직을 권유했고, 아내도 동업하던 비즈니스에서 투자금을 돌려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뗄 수 있게 되더라. 그렇게 이민 2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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