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섬에서의 일년

B 섬에서의 생활은… 지루하다면 지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또 평화롭다면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 생활이었어. 일단, 직장 (슈퍼마켓) 건물의 2층, 3층에 사택이 있었다. 원래는 단기 거주자용 모텔이었다는데, 거주용 아파트로 다시 허가를 받아 임대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구. 그 중에서 5채의 아파트를 가게에서 일하는 가족들이 쓰고 있었어. 뭐… 직장이 집 바로 아래에 있다는 점, 그래서, 출근 시간이 5초 걸린다는 점,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한 아파트에 같이 산다는 점, 직장 상사와 동료들과 밤낮으로 같이 마주친다는 점 등은 각기 장점도 단점도 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집에서 걸어 내려가 5분 내에 항구나 바닷가에 도착한다는 점. 밴쿠버와 연결되는 페리 도착 시간 외에는 찻길 통행량이 극히 적고 한가하다는 점, 섬 전체가 바다, 호수, 산, 숲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자연을 즐길 수 있다는 점 (게다가 곰이 없다는 점)은 내게 있어서 (그리고 키우던 강아지에게도) 항상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어느 날이든 기분 내키면, 아침 일찍 일어나 근처 뻘로 나가서 굴을 캐어 와 먹는다든지, 저녁엔 생선이나 게를 낚아 먹기도 하고, 냉동실은 항상 게로 가득 차 있고, 가끔 놀러 오는 손님들에게 게 요리를 해준다든지 게를 싸주기도 하는 생활이었지.

일하는 것도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이전에 일했던 정육점에서는 주로 10대, 20대 들이 많았었는데, 이 슈퍼마켓엔 30대 혹은 그 이후 연령대가 많아서 그런지 육체노동 강도의 기준이 그리 높지 않더라구. 아침 점심 이렇게 두 번 도매상에서 물건이 오면 그걸 다 함께 지정된 장소로 나르거나 진열하면 되는 일이었어. 비록 여름 관광철에 맥주를 냉장고에 채워 넣는 일은 제법 고되기도 했지만 (1시간마다 도착하는 페리 관광객들 수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맥주들은 그냥 냉장고에 스쳐 지나갔다), 전반적으로 이 정도 노동으로 이 정도 환경에서 집 값 걱정 없이 섬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었다고 생각이 들더라.

기본적으로 주 6일, 하루에 8시간을 일했는데, 중간에 2시간씩 휴식시간을 가졌었어. 그 시간 동안 점심도 먹고, 낮잠을 자거나 개 산책도 시키고 그랬었는데, 그러니까 아침 10시에 출근하면 4시간 일하고 휴식 2시간, 그리고 4시간 일한 후 오후 8시에 퇴근하는 그런 스케줄이었어. 사실 4시간은 눈 깜짝하면 지나갈만한 시간이라서, 잠깐 일하면 쉬고 잠깐 일하면 퇴근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6일을 일하고 각 가정에게 지정된 휴일 (우린 수요일에 쉬었다)에 배를 타고 나가 밴쿠버에 가서 한국시장 쇼핑을 한다든지, 친구들을 만난다든지 하게 되는 시스템이었는데, 한 주에 단 하루 쉬는 날도 우린 주로 섬에서 놀았었어. 그리고 이렇게 2주가 지나면 급여를 받게 돼 (캐나다에선 보통 2주마다 급여를 받지만, 이 가게에서는 한 달에 2차례 급여를 주었었어. 아마도 사택 사용료 월 렌트비를 공제하는 회계 업무 편의를 위했던 게 아닐까 해). 확실히 섬에서 살아서 돈 쓸 일이 없고, 웬만한 식자재는 가게에서 조달이 가능한 데다가, 렌트가 안 나가다 보니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더라구. 하하. 이민 와서 줄곧 “돈돈돈돈” 하며 걱정을 했었는데… 어쩐지 당장 숨통이 트이는 것 같더라.

한국에서는 그 놈의 회식이나 직장 내에서 인간관계 같은 것들이 정말 싫었는데, 오랜만에 한국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일 마치고 모여서 같이 술 마시고, 직장 상사 험담하고 하며 웃고 그러다 보니 사는 게 어느 정도는 재미있어졌던 것도 같아.

섬에서, 그리고 슈퍼에서 일한다는 것에서 얻는 여러 가지 혜택 중에서 가장 고마웠던 건, 이곳 캐네디언들의 생활 스타일을 보고 어느 정도 습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어. 당시 캐나다에는 LINC라고 해서 신규 이민자들을 위한 무료 초급영어 교습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수업에서 언어뿐 아니라 캐나다 사회 문화나 생활에 관해서도 많이 배운다고 하거든. 이 프로그램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레벨 테스트를 봐야 하는데, 쓸데없이 시험 잘 보는 기술만 있다 보니 아내나 나나 초급영어 수준을 넘는 성적이 나와 버려서 LINC를 들을 기회를 놓쳤지 뭐냐.  

그 뒤로도 국비 지원 중급 ESL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번번이 “제도권 교육은 어쩔 수 없어…” 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만두곤 했었는데, 사실 너무 재미없더라. 그리고 “과연 내가 뭘 배우고 있기는 하는 건가?” 하고 갑갑할 정도로 아주 한심한 과정도 있었고. 그러고 나니까, 돈을 쓰더라도 괜찮은 곳이라고 소문난 사립 학원에서 배워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가정 경제 상황의 압박으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거든.  

근데, 인구 99프로 로컬 원어민이 사는 섬에서 슈퍼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싫어도 보수적인 캐네디언 생활 문화를 저절로 알게 되더라구. 이 사람들은 아무리 최신기술을 쓴 신제품이 나와도 – 예를 들어 Lo-Carb (탄수화물 저함량) 아이스크림이 유행한다 하더라도,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직접 만든 딸기, 체리, 크랜베리 조림 등을 얹어 먹는 사람들이었거든. 그리고 캐네디언, 특히 비씨주 인간들이 대개 그렇지만, 섬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정말 느긋하더라. 매일매일 지루한 삶을 즐기고 살고 있다가, 처음 본 아시안이 눈을 반짝이면서 뭔가를 배우려고 하니, 오히려 오버를 해대면서 친절하게 자신의 경험을 나눠 주더라구.  

당시 슈퍼에서 내가 하는 일 중 하나가 공병을 접수하고 환불 티켓을 써주는 일이었는데, 돈을 주는 입장이 되니 더더욱 기고만장해진 적도 있었다. 완장을 찬 관리처럼 공병을 가지고 온 손님들에게 “제대로 정리해서 줄 세워놔라”, “잘 씻어 와라”, “계산을 제대로 하라”고 갑질을 하기도 했다. 한두 푼 맥주 값이라도 벌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공병을 모아 온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 싫으나 좋으나 한국식 억양에 한국식 표현을 알아들으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모든 종류의 갑질은 부끄러운 일이네)

B 섬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수가 자신을 예술가라고 (알고 보니 이는 딱히 B 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씨주 다른 모든 섬에도 예술가 마을로 자칭하고 있었다) 소개를 했는데, 그들의 작품이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예술가라고 불리어 질 수 있는 수준인지는 차치 하고라도, 낮에는 타지 사람들의 섬 별장 관리를 하거나 다른 육체노동을 하고, 오후가 되면 섬 자연을 즐긴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삶을 최대한 풍요롭게 하려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감동스럽더라구

하지만 숨가쁜 여름 휴가철이 지나고, 일들이 조금 한가해지니까 점점 딴 생각이 나기 시작하더라. 하루하루가 너무 한가롭고, 편하고 하다 보니까 정말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불안감이 생겼어. 섬 생활은 평화롭기 그지없고 사람들도 다 좋았지만, 십 년 후 40대가 되어도 이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B 섬엔 딱히 산업이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어떤 직종 변경 기회도 없었거든. 섬 자체가 웨스트 밴쿠버로부터 20분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그것도 하루에도 열댓 번씩 페리가 있어서 그런지, 굳이 섬에 따로 산업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겠지. 대부분의 섬주민들이 페리를 타고 웨스트 밴쿠버나 다운타운 밴쿠버로 출퇴근을 했거든. 다른 섬주민들은 요식업 등 섬 내에서 작은 비즈니스를 운영하거나, 거기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 (미국 시민 포함) 소유의 별장을 관리하거나 하며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래도 사는데 큰 어려움도 없고 해서인지, 내가 섬에서 사는 동안 있었던 범죄사건은 딱 하나였어. 어떤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모은 공병을 훔치다 걸렸는데, 작은 섬이다 보니까 섬주민 모두가 금세 알게 되더라.  뿐만 아니라, 누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식의 어떤 사람의 세세한 사생활까지, 주민들 모두 금세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시골 살이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익명성의 부재 역시 종종 나를 불편하게 했었어.

계절이 또 바뀌고, 생각이 차츰 정리되면서, 아내와 섬 생활 일 년을 채우고 나면 다시 밴쿠버로 나가서 학교를 다녀보자고 결정했다. 그 와중에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등 북미 사람들 명절이 모여있는 겨울을 슈퍼마켓에서 일하며 이들의 명절 문화를 알아나가는 일은 또 재미가 아주 좋았었어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고 1월이 되니까 가게가 참 한가해지더라. 밴쿠버의 위도는 블라디보스톡보다 북쪽에 있는 데다가 겨울철에는 햇빛 쨍한 날 하루 보기도 어렵고, 서머타임도 끝나고 나니 오후 4시 전에는 벌써 어둑어둑해겼던 거지. 그러다 보니 가게에서도 이럭저럭 고용규모를 줄여가려는 계획도 있고 해서 결국 섬을 떠나기로 했다. 운 좋게 예전에 계획했던 대로 실업보험 대상자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섬에서 나오자고 결심을 했을 때, 사실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으면서 나온 건 아니었어. 가게 사장님으로부터 반복되는 만류를 들었고, 이후엔 또 다음 직업이 잡힐 때까지 파트타임으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오퍼를 받기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한 다리 걸쳐서 희망고문 하는 건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 당장 연말에 섬 밖의 다른 회사에 면접을 봤었는데, 크리스마스 때는 이 슈퍼에서 일해야 한다고 했더니 바로 거절당한 적도 있었고. 뭔가 새로운 걸 손에 넣기 위해선, 다른 하나로부터 냉정하게 돌아서야 하는 건 어디서든 통용되는 법칙이었어,

섬에서 나오기 며칠 전, 20년 넘게 쓰고 모아 온 일기장들을 버렸다. 내 과거를 팔면서 “내가 왕년에는…” 하며 떠들지 말자는 각오와 동시에, 더 이상 창작일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앞으로는 나 자신을 소개할 때, 그냥 이민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로 했다. 재활용 폐지를 묶어내는 컴팩터에서 찌그러져가는 50여 권의 일기장들을 보니 왠지 비장한 마음이 다 들더라구. 하하하. 그동안 정이 들었던 섬주민들과 작별인사를 했고, 몇몇 친구들은 선물에 송별회까지 열어주었다. 정말이지, 딱히 착하게 산 것 같지 않은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받고 있자니 황송스럽기까지 하더라.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민을 와서 첫 해엔 꽤나 좌충우돌을 했었는데, 이렇게 환송을 받으며 섬을 떠나는 날이 오자, 왠지 대단한 성장을 했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섬에 들어갈 때는 캐나다 동전 구별하는 것도 어려웠었는데 (사실 지금도 어렵다), 이젠 일 년의 로컬 직장생활 경력을 가지고 나서게 된 거였지. 어떻게 보면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만, 이번엔 그냥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