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과 트레이드

캐나다에서는 이런 트레이드 직업을 사회 중산층의 뼈대를 이루는 핵심 직종으로 고려해서, 각종 지원이나 세제혜택을 통해 다양한 인구의 유입을 유도한다는 말을 했던 적 있지? 그렇다면, 트레이드 (Trade)란 뭐라고 해야 할까? 한국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산업 기능직’이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어른들이 “야.. 공부하기 싫으면 그냥 기술이나 배워..”라고 종종 말했는데, 이 ‘기술’을 사용하는 직업이 바로 트레이드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산업 기능직’이라고 불리는 만큼 건설, 산업에 관련된 직종 (전기, 배관, 엘리베이터, 용접, 항공, 자동차 등)이 많지만, 적어도 캐나다에선, ‘미용사’ 혹은 ‘요리사’와 같은 다른 종류의 기술을 쓰는 직업 역시 트레이드에 속해 (https://itabc.ca/discover-apprenticeship-programs/ search-programs 참조). 그리고 역시나 이런 모든 트레이드에는 어프랜티스 제도가 있는 거고.

요즘처럼 모든 기술을 유튜브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시대에 과연 어프랜티스 제도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지만, 사실 실제로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특히 손님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훌륭한 기술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을 종종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 현장 경험이 많은 선임 기사들의 조언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아무튼, 2021년 현재로, 이런 트레이드 직종에 참여하고 어프랜티스에 등록하고 났을 때 정부로 받게 되는 금전적 지원을 보자면 일단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을 따져 보자면;

  • BC 어프랜티스 진입 장려금 – 최대 $13,000 (공구 구입, 이사 비용 등 지원)
  • 연방정부 어프랜티스 장려금 – $2,000 (여성의 경우 $6,000)
  • 연방정부 어프랜티스 졸업 격려금 – $2,000
  • BC Training 세금 환급 – 공구 구입 등 다양한 부분에서 사용한 금액을 세금 환급
  • 연방정부 세금 환급 – 어프랜티스 학교에 가는 기간에 대한 세금 환급
  • 연방정부 실업 급여 – 어프랜티스 학교에 가는 동안 임금 보전 (최대 50%)

(https://www.workbc.ca/training-education/finance-your-education/apprenticeship-financial-supports.aspx 참조)

여기에 어프랜티스 기간 동안에는 갚지 않아도 되고, 어프랜티스를 마친 후에도 아주 낮은 이자율로 갚을 수 있는 (그리고 원금이 아닌 이자금 지불에 대해선 또 세금 환급이 된다), 어프랜티스 융자를 최대 $20,000까지 받을 수 있는데, 이자가 없거나 아주 낮아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구입이나 주택 모기지를 갚는데 대신 사용하고 있는 편이야. 이렇게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더라도, 캐나다 정부가 트레이드 직종을 이용한 중산층 유지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 수가 있지.

물론, 훨씬 더 오랜 기간 공부와 연구를 해야 하는 과학자나, 의사, 엔지니어, 변호사, 인문학자들에게도 지원금이나 세제 혜택이 있겠지. 단지 내가 모르는 것일 뿐일 테고. 게다가 엔지니어나 의사 등 전문직의 경우 일단 급여의 시작점부터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훨씬 높은 금전적 보상을 받게 될 거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전문직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공부도 물려받는 재능이라서 누군가는 달리기를 훨씬 더 잘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공부하고 시험 보는 걸 더 잘하는 법이니까.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하고 연구에 전념한 전문직들의 경우, 사회의 전체적인 디자인에 있어서 더 많이 관여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다던가, 특정 기업의 이윤 획득에 더 많이 공헌해서 또 거기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직이 못된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생활고에 허덕이게 만들 수는 없는 거지.

마침, 한 사회가 굴러가는 데에 있어서, 많은 종류의 다양한 직업이 필요하게 되고, 각 분야에서 그 직업이 안정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또 숙달된 기술자가 필요하게 되는 법이니까. 이런 이유로 기능직 – 트레이드 직업이 그 사회의 생산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고, (이번 팬데믹 동안에 잘 증명되었듯이) 실제로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는 거야. 때문에 바로 이 트레이드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어느 수준까지 맞춰지는가에 따라서, 그 사회 경제의 허리를 구성하는 중산층으로의 유입이 더 활발하게 되고, 동시에 (사회경제가 비트코인 등 사행성 돈벌이로 이탈되지 않고) 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보는 게 캐나다의 경제 시스템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어.

이전 A 냉동에서 일할 때에는 R 사장과 거의 매일같이 함께 다니면서 일을 배우곤 했는데, 이곳 D 식품에서는 처음부터 일을 혼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사실, 요즘엔 다른 분야의 고장 수리 서비스의 경우에도, 회사에서 (물론 비용 절감의 이유로) 어프랜티스 혼자 딸랑 보내는 경우가 많고, 문제가 생기면 선임기사들에게 전화로 물어보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이런 경우엔 어프랜티스나 선임기사 양쪽 모두, 전화 통화를 통해 서로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지만, 이런 일로 늘어나게 되는 서비스 시간에 대한 부담은 물론 그 회사를 고용한 손님이 부담하게 되는 거고 (서비스 업체에서 손님에게 비용을 청구할 때, 근무시간을 바탕으로 청구한다), 결국엔, “새파란 어린애가 와서는 몇 시간을 전화통화만 하고 있던데, 이 돈을 나보고 내라고?” 하며 극대노하게 되는 상황이 많이 생기는 거야. 때문에, 서비스 업체를 고용할 때에도, 가능하면 어프랜티스 숫자가 적고 저니맨이 많은 회사를 고용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비용을 아끼는 경우가 많지.

나 역시 이렇게 민망한 상황이 많았는데, 뜻하지 않게 D 식품에서 첫 일 년을 거의 에스프레소 기계 설치 및 수리 전문가로 보내는 바람에, 막상 회사의 주력 서비스 분야였던 T 냉동 아이스크림 기계나 밀크셰이크 기계에 대해선 일 년이 지나도록 경험이 없었던 거야. 이럴 때, 누군가 한 명이라도 옆에서 ABC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는데, 이미 그런 기초 트레이닝에 참여할 짬밥이 지나버렸고, 서비스 매니저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일반 냉동 기술에 대한 지식이 월등하니 굳이 트레이닝을 받지 않아도 될 거라고 설득하더라구. 뭐.. 맞다. 냉동에 대해선 경험치가 높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장 사용법도 모르는 밀크 셰이크 기계를 어떻게 고치라는 말인지… 자동차 운전도, 아니 시동 거는 법조차 몰랐는데 자동차 수리를 나간 격이었어.

하루는, 밀크셰이크가 차가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서비스를 나갔는데, 나는 애초에 어떻게 밸브를 열어서 셰이크를 컵에 담는지도 몰랐거든. 아무거나 이것저것 누르다 보니 엄청난 압력으로 밀크셰이크가 뿜어져 나와 컵을 퉁겨내고 그 바쁜 맥도널드 주방 바닥으로 뜨거운 밀크셰이크가 콸콸 쏟아졌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밸브를 잠그는 건지 몰라서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어. 결국 기계 전원을 내려버렸고, 맥도널드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바닥 청소를 다 해야 했어. 그리고 나서, 밖에 서비스 차량에 올라타서는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십여 년 전에 끊었던 담배가 다 땡기더라.

 그러고 나서 유튜브를 통해 밀크셰이크 기계의 기초 사용법을 배웠지. 이렇게 바보짓으로 한 시간을 보냈지만, 회사는 뭐 딱히 불만이 없었어. 회사 입장에서는 내가 바보짓으로 날린 한 시간은 어차피 맥도널드로부터 다 챙겨 받을 돈이었거든.

이외에도 세븐일레븐 슬러시 시럽 펌프 조작을 잘 못해서, 마치 호러영화의 살육 장면처럼 세븐일레븐 매니저 사무실 천장과 벽에 시뻘건 시럽 범벅을 만드는 등 바보짓을 무진장 거듭했지만, 2016년 여름 동안 잘리기는커녕 그런 문제로 매니저로부터 어떤 질책도 듣는 일 없이, 약속대로 어프랜티스 2년차 수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던 수많은 실수 들이라는 것들이, D 식품에게 있어서나, 맥도널드 혹은 세븐일레븐 매니저 입장에서나 그렇게 크게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아니지 않았을까 싶어. 뜨거운 밀크셰이크나 슬러시 시럽이 매장 손님들에게 튀어서 법적 공방이 생겼다면 모를까.

2년차 수업은 BCIT가 아니라 JARTS라는 곳에서 받았는데, 지역 냉동 노조 (UA5*6)와 연결되어 그들에게 위탁을 받아 운영을 하는 위탁교육기관이라 하더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수업료가 BCIT에 비해 무척 저렴했고 (물론 그 수업료도 수료 후 D 식품에서 보전해 줬지),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들이 교육으로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느끼게 해 줬어. 또, 강사진들도 바로 얼마 전까지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라 교육 내용도 더 알찼던 걸로 기억해. 뭐.. 물론 가끔은, 유튜브를 틀어주면서 (강사도 처음 보는) 최신 정보를 나누는 시간도 있었지. 이후에 JARTS는 냉동 노조와 예산에 대한 협의점을 찾지 못해서 완전히 해체되었고, 현재는 노조가 직접 운영하는 RTI (http://www.rtia.ca/)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하더군.

2년 반 만에 돌아간 학교였지만, 첫 주에 강사의 빠른 영어를 따라가지 못해서 버벅댔었던 걸 제외하면 그럭 저럭 잘 쫓아갈 수 있더라. 일반 냉동/공조 일을 안 한 지 꽤 오래되어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을 좀 했었는데,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들의 60% 정도만 일반 냉난방 / 공조 회사에서 왔고, 30% 정도가 (슈퍼마켓) 냉장고 전문회사, 그리고 나머지 10%가 D 식품이나, 아이스링크 설비관리처럼 특수 분야에서 왔더라구. 사실, 모두 다 자기 분야 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애초에 2년차 수업이라 하더라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분야가 기초과정의 반복이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당시 학급의 대부분이 지역노조 소속 회사를 다니다가 온 사람들이라서 노조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정보를 간과해서 나중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지), 예를 들어, 2014년부터 지역노조에서 급여 시스템을 변경해서 어프랜티스 1, 2년 차의 급여를 더 낮추고 4, 5년 차와 저니맨 급여를 대신 인상시켰다는 점 등은 아주 흥미롭더라. 이곳 노조가 저니맨의 혜택만 중시하고 어프랜티스의 생계는 등한시한다는 점에서, 비정규직의 복지를 무시하는 건 전세계 대형 노조들의 공통점인가 싶기도 했어.

그리고, 지역노조에서 공개한 급여 테이블에 있는 금액이 ‘모든 금전적 보상의 총 합산 (Total Compensation)’ 이어서, 실제 시간당 급여로 통장에 꽂히는 돈은 생각보다 낮았고 (휴가비, 공휴일 급여, 건강보험, 연금 등등을 모두 시간당 금액으로 나눈 후 급여와 합산한 금액이었다), 오히려 D 식품의 급여 수준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학기를 마칠 때 즈음, 성적이 제법 잘 나왔었는지, 2년차 학급 담임 강사로부터, 자기가 얼마 전까지 일했던 직장 (노조 소속)에서 일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어. 바로 몇 년 전에 그렇게 많이 지원을 했지만 대답 한번 없던 회사였는데 말이지… 이렇게 이 바닥에 연줄이 생기는 건가 싶더라. 그동안 D 식품에서 느꼈던 불만에 앞서 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헤드헌팅이라서 너무나 감사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지난 몇 주간 노조 소속 급우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은 결과 구미가 확 당기지는 않더라구.

특히 급우들과 얘기하는 동안 A 냉동에서 겪었던 경험이 한참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고되게 몸을 쓰는 일이나 지붕에서 비를 맞을 일이 적고, 비교적 정통해야 하는 기계의 종류가 적은 D 식품이 그래도 더 나은 게 아닌가 싶더라. 게다가 따져보니 급여 수준도 제법 괜찮았었고 말이야.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또 수많은 에스프레소 기계 설치 일과 서비스 콜이 쌓여있더군.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또 훌쩍 한 해가 지나갔고, 어느새 노조의 3년 차 수준에 맞춘 급여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 낮은 급여를 받고 일했을 때엔, 가만히 쉬지를 못하게 하며 하루에도 네댓 군데 서비스 콜을 보내오는 걸 보고, 이것들이 싼 값이라고 날 너무 굴리는구나 싶었는데, 급여가 올랐다고 해서 좀 한가해지리라 했던 건 엄청나게 큰 오해였더라구. 수리기사의 급여가 높아지고 그만큼 회사에서 떼어먹는 수익률이 낮아지니까, 그만큼 일을 더 시켜야지 회사의 평균 수익률이 나오는 셈이었어. 결과적으로 선임 수리기사가 되었든, 주니어 기사가 되었든지,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회사는 버는 것이 많아지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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