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굳은 살 (1)

어우. 너무 마셨다.

몇 년 만인가? 아니구나. 두 달 전에도 이렇게 겔겔 거린 적이 있었구나. 20대 때에도 항상 술 마신 다음 날에는 이런 생각을 반복했었지. 이렇게 마시다 결국 길바닥에서 죽지… 하고 말이야.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아직 천장이 빙글빙글 돈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겠다. 심장이 느리게 뛰고 식은땀이 난다. 숨을 쉴 때마다 내 날숨에 남은 역한 술 냄새를 다시 들어마신다. 그 와중에도 마른침을 계속 넘겨서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래. 살 만큼 살았나? 어차피 남은 인생도 시시하긴 마찬가지일 거야. 이렇게 가만히 누워서 옛 추억을 반추하면서 천천히 죽어 가는 것도 꽤 축복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 근데… 이 집에 라면이 남았던가?

발이 갑갑한 걸 보니 양말을 신은 채 잠이 들었나 보다. 근데 셔츠는 왜 벗고 있는 거지?  토했나? 이 나이 먹고? 길에 토했나? 아니면 택시? 그럼 지금 목이 아픈 게… 토하다가 신물이 올라와서 식도가 다친 건가? 아… 이 와중에도 고장진단을 하려고 하다니, 난 이과생 체질이긴 한 것 같긴 해. 그러고 보니 고딩 2학년 때 이과 전공을 선택했더니 담임이 어지간히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우격다짐으로 반대를 했다면 나로서도 고집 피우기 좋았을 텐데, 그 인간은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었던 거지?

아내는 잔뜩 볼멘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야단을 치고는 아침 일찍 처가 식구들과 집을 나섰다. 결코 언성이 높거나 하지는 않지만 오래 같이 살아온 시간 때문인지 아내의 잔소리는 보통 날카롭게 꽂히는데, 오늘 아침엔 뇌가 알코올에 절여진 상태였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비실비실 웃으며 애교를 떨었던 기억은 나는데 먹혀 들어간 것 같지 않았다. 맞아. 내가 잘못했어. 그래서 죽을게. 난 참 쓰레기인 것 같아. 빨리 유기농 비료로 다시 태어나는 게 지구에 도움을 줄 텐데. 유기농 인증을 받기엔 나쁜 걸 너무 많이 먹었어. 이것 봐. 이 와중에도 죽을힘을 다해 라면 찾으러 찬장을 둘러보고 있잖아. 내가 미안해.

서른다섯을 넘고 나니 확실히 회복이 느리다. 이렇게 마시고 나면 다음 날 하루를 완전히 날린다. 장모님 수술 일정 때문에 휴가를 얻어 모국 방문을 했는데, 숙취 때문에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야 한다니 비행기 표 값이 어지간히 아깝긴 하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아내와 계획한 일정도 완전히 망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려고 하긴 했었지. 근데 아무리 일어나려고 해도 머리의 한 부분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걸 어떡하겠어. 술이라는 건, 마시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깨는 데 걸리는 시간은 철저하게 기초체력에 달려있다. 운동할 걸… 이런 후회도 이제 지겹다. 시계 시침이 오후 3시를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설마… 정말 토한 건가? 20대를 끝으로 술 마시고 토하는 일이 없어졌었는데… 위가 튼튼해진 것이 아니라 토하기 전에 정신을 먼저 잃게 됐던 거였지. 다리가 먼저 풀리거나 말이야. 뭣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나서부터는, 취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버티거나 할 일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중간에 몰래 빠져나가 속을 게워내고, 우유를 마시고, 뭐 그런 다음 또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합석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민 와서 모든 인간관계가 리셋된 이후부터는 내가 기분 좋아질 때까지만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일차는 동동주랑 파전, 두부김치를 먹었고, 이차 가서는 맥주랑 골뱅이를 먹었던…. 아아아… 씨이발 골뱅이… 맞다. 토했구나. 골뱅이 파 무침의 고추가룻물이 올라왔기 때문에 코가 엄청 매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 처음 딱 10분만 반가웠던 것 같아. 학교 다닐 때는 매일 동아리 방에서 다 같이 뒹굴며 바보 같은 헛소리에도 깔깔거리고 웃었었는데, 이제는 다들 먹고살기 바빠서 서로 얼굴 볼 일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몇 년마다 한 번씩 한국에 들어갈 때나 되어야 핑계 김에 자리를 만드는 사이들이 되었다. 하긴 이제 뭐.. 편지 한 번 보내려면 몇 달씩 기다리는 시대도 아니고,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면 문자나 톡으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니까. 이렇게 몇 년 만에 만난다 하더라도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회포를 풀고 하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다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냥 살다 보니 사는 거고, 회사 안 다니면 장사를 하고, 그렇게 짤막한 근황을 10분간 나누고 나서, 각자 자식들 자랑을 좀 하고, 그러고 나서 곧바로 주식 투자와 부동산 투자에 대한 정보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화가 좀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니 화가 났다기보다는 슬슬 지겨워졌었다. 말들은 뭐… 다 노후대책이라고 얘기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얘기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돈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그게 저렇게까지 첫사랑에 빠진 여중생의 눈빛을 가지고 떠들 일이겠어? (내가 잘 모르는) 친구의 연애담을 들어주는 건 언제나 무척 고단한 일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 간의 덕담, 아니 손님을 환송하는 가게 종업들의 인사말 조차도 “부자 되세요”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그 인사말이 불편하다. 모든 어른들이 한 가지 동일한 꿈 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차라리 써드임팩트라도 일어나서 모든 지구 인류가 하나의 거대한 의식 덩어리로 진화하는 게 낫지 않나 싶다. 그러면 나무들이 제일 즐거워하겠지? 아… 왜 난 이럴 때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돼지로 변해 쳐묵쳐묵 하던 치히로 부모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데?

슬쩍슬쩍 시계를 보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내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모인 거라서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쉽지가 않았다. 뭐, 이미 내 이민 얘기나 각자의 생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서로의 재테크 방식에 대해 화제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뒤늦게 나타났었지… 아이… 씨.. 진짜… 그러고 보니 결국 그 새끼 땜에 꼬라지게 마신 거였구나.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뭘 한참 떠들긴 했었던 것 같긴 한데… 좌우간 술 마시고 말을 너무 많이 하면 미친 속도로 취하게 된다. 그 새끼가 뭐라고… 왜 난 아직 그 새끼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거지?

그나저나, 이 집은 라면을 아예 안 먹나? 처갓집은 아무리 자주 와도 여전히 낯설다. 반걸음 걷고 쉬고, 또 한 걸음 걷고 쉬고를 반복해가며, 주방 찬장과 다용도실을 죄다 뒤져봐도 라면은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있는데 내 눈에 안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지. 아직도 내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니니까. 이렇게 두 발로 서있는 것만 해도 인간승리야. 다행히 냉장고에서 물은 찾았다. 목으로, 위 속으로 찬 물이 넘어가는 게 아니라 송곳이 후벼 파는 느낌이 든다. 아… 씨발… 진짜 이러다 죽지. 뭐, 술 때문에 죽기 전에, 이렇게 컵 안 쓰고 물병에 입 대고 마시는 걸 마누라한테 들키면 먼저 맞아 죽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정신이 좀 들었는지 다용도실 뒤편으로 서랍장이 하나 더 눈에 들어오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너무 험난해 보인다. 그래도 라면에 대한 일념으로 조심조심 주변으로 정신없이 쌓여있는 짐 들을 피해 맨 윗 서랍을 열었더니… 어제 입었던 내 셔츠다. 근데 뭔가 붉은색으로 흠뻑 물들어 있는데… 피네… 이건 피 맞는데…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의 피야. 하아아아아아 씨이. 이게 뭔 일이지,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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