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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데이즈

마침내 6년간 사람들의 기대를 끌어 모았던 한국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를 보게 되었다. 장장 6년이다. 6년!! 6년동안 뼈 빠지게 고생해서 만들어낸 작품이 올 여름에 개봉하게 되었고 2주만에 전국 26만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기고 극장에서 내려오게 되었단다. 제작사에서는 제작비를 오히려 줄여서 발표하는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120억 제작비(마케팅 포함)를 계산하더라도 6년 동안 공들여(정말 공들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100억 가까이 손해보는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전에 2003년은 1995년 겨울 이후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풍년이었다. 1995년~1996년이 1994년부터 급작스럽게 치솟던 영상산업의 부가가치에 대한 유행 때문에 급조된 애니메이션 풍년이라면, 금년은 그동안 차분히 갈고 닦아왔던 진정한 실력들이 발휘되던 해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이 때 나는 한국에 없었지만 멀리서 나마 그 결과를 알게되어서 글로 남기자면, 먼저 올 여름 만들어진 작품은 모두 5편… <망치>, <오세암>, <엘리시움>, <원더풀 데이즈>, <강아지 똥>인데, 이중에서 <오세암>이 제일 먼저 5월 가정의 달을 시점으로 개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 제일 큰 패인은 작품이 후졌다는 거였다.

<오세암>이라는 원작 자체가 워낙 까다롭고 어려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영상화하는데 아무런 연출없이 그냥 글을 그림으로 옮기는 데만 급급했고, 그마나 그걸 제대로 풀어나가지도 못했다. 사실 너무 지겹고 한심해서 제대로 볼 마음도 없었는데 기본적으로 극장판 퀄리티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캐릭터와 효과 및 애니메이션 수준이 낮았으며(<소년병 바우>보다 형편없다. 특히 스님 캐릭터는 80년대 초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상하게 했다. 전혀 특징없는 대머리에 회색 승복을 입은 캐릭터라니.. 애니메이터나 페인터들은 기분이 째졌겠지만 돈 내고 볼 관객들은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헤어스타일로도 의상스타일로도 특징을 살릴 수 없는 위험을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안이한 발상으로 작품을 투자를 받고 극장에 걸겠다는 생각을 했다니 정말 인간적인 실망이 앞선다.), 그나마 그 작품으로 극장을 잡게 된 것이 용할 따름이다. 아마도 Executive Producer의 탁월한 능력 또는 명성에 힘입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제작중반에 개봉관수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투자자의 염려에 대해, 일단 극장 한 군데를 잡고 입소문을 통해서 점차 개봉관 수를 넓혀나가자는 전략를 밝힌 바 있는 제작진들에게 어디 그게 처음부터 가당키나 한 말이었는지 묻고 싶다. 그런 사기행위들이야 말로 장기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부터 극장주와 투자자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주범이 아닌가 말이다.

<망치>는 사실 보지 못했다. 아예 극장개봉도 못했고(이런 것이다!! 그동안 점철된 사기행위들로 인해 더 이상 극장주들은 한국 애니메이션을 믿지 않는다), SICAF 개막작으로 상영된 것을 보고 온 사람들의 후문에 의하면, 왜 그 정도의 작품이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얘기다. 왜 아직도 그 모양들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눠먹기 식으로 진행을 할수록 행사의 권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왜 모를까? 아무튼 4작품 중에 가장 만화영화로서 흥행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원작임에도 불구하고(물론 캐릭터나 설정 등에서 여러 군데 모방의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순전히 애니메이션을 거지같이 만들어서 개봉도 못했다라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게 되었다.

<엘리시움> 역시 보지 못했다. 가장 늦게 개봉했지만 개봉 2일만에 극장에서 떨어졌고(사실, 실사영화 중에도 이런 사례는 많이 있다. 정말 가차없는 현실이다) 전국 관객수가 몇 천명 대라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될까? 몇 년 동안 피땀흘려 만든 작품들이 왜 이렇게 버림받게 되는 것일까? 최초 원인은 물론 기획이다. 이 4가지 작품 중에서 한국의 현시점 하에서 그나마 흥행을 기대할 수 있는 아이템은 <망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냐면, 나머지 작품들은 첨부터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이 충분히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엘리시움>에 대해서는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오세암>은 어떤가? 그건 애초에 <예술영화>라는 것을 표방해서 영진위에서 지원금을 받은 작품이다. 첨부터 흥행을 생각한 기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극장 개봉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OVA로 기획되었었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극장판으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최악의 실수로 판명이 되었다. 모든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어떻게든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걸 옆에서 말려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었을 텐데, <오세암>에서는 오히려 그 와중에 한 몫 챙길 사람들만 그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진정으로 오세암이 한국 애니메이션 침체를 뚫어줄 기대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근데, 이렇게 성격규정을 할 때 왜 항상 디즈니 애니메이션 예를 드는 것일까? 현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그렇게 재미없는 애니메이션이 성공한 적이 있었던가?). 만일 그렇다면… 작품을 먼저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야지.. 자기가 작품을 먼저 보고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든지, 투자를 받든지, 극장주들을 설득하든지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아지 똥>은 정말 칭찬해줄만한 가치가 있다. 역시나 원작 자체가 크게 흥행할 가치가 없었지만, 흥행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처음부터 OVA 애니메이션으로서 초점을 맞추고 제작이 진행되었다. 작품의 완성도와 퀄리티 역시 탁월하다. 신생 클레이메이션사에서 제작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깔끔한 화면을 선사한다. 주제파악을 하고 손해를 최소화한 기획, 훌륭한 완성도, 비디오 배급 성공 이 세 박자를 모두 갖춘 강아지 똥이야 말로 2003년도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최고 수작이라고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언제나 “될 작품 크게 몰아주기”가 상식으로 통했던 한국 정부의 작품지원 시스템이, “여러 작품에 골고루 나눠주기”로 선회한 것으로 보여서 기쁘기 그지없다. 저예산으로도 한번도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온 적이 없는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역사에서 항상 ‘크게 한탕’이라는 마인드로 요행을 바랬던 관행이야 말로 그간 애니메이션 산업을 갉아먹는 악습 중 하나였는데, 지난 해 바리데기 등의 선례로 인해 이제 정신을 차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원더풀 데이즈> 얘기를 하자면… 난 감히 이 작품을 퀄리티에서만 보자면,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100억을 손해봤다. 이렇게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100억을 손해 본 것은 그야말로 범죄행위이다. 하지만, 작품을 보고나면 이 작품이 그렇게까지 지탄을 받아야할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90년대 이후의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캐릭터, 애니메이션, 2D, 3D, 미니어춰, 합성 모두 상당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애초에 기획과 시나리오는 흥행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난 이런 작품에 (단지 프로모션 비주얼이 죽인다는 이유만으로) 몇 십억씩 돈을 들고 줄을 서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분명히 망하게 될 것으로 확신했었다. 하지만 흥행과 상관없이 이 작품은 고전으로 남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세세한 설정과 액션 등은 왠만한 일본 애니메이션 수준을 넘어선다.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 최초의 2D, 3D, 미니어춰 등 3가지 합성은 예상보다 훨씬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작품을 보면서 계속 안타까웠던 것은(시나리오는 더 이상 거론 하기 싫고), 아이러니 하게도 성우의 문제다. 나는 이제껏 성우 분야 만이 그나마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세계와 동등할 수 있는 부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원더풀 데이즈>에서의 목소리들은 애니메이션 케릭터들 보다 훨씬 연기력이 떨어져보였다. 무미건조하지 않으면 상황에 맞지 않게 과잉되기 일수였고, 때때로 너무나도 그윽한 목소리들의 남발로 인해서 애초 성우 캐스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되었다. 또 한가지, 후반부에 가서 몰아치는 액션에 있어서 연출이 훨씬 힘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정말이지 한 컷만 더 교차해주어도 보다 박진감이 있었을만한 장면들이 너무 많아 아쉬었다. 아마도 목소리 녹음이나 후반부 연출에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제작 막판에 제작사의 자금사정으로 인해 너무 성급하게 제작을 마친 것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되는데, 만일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작품으로 남게 되는 것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은, 세계 최초, 국내 최초로 시도하는 것이 많아서 제작비가 작품에 비해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제작진들에게 똑 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어보라고 한다면 아마 50억 내외로 만들 수 있을 작품이다.

존 보이트와 릭키 슈로더가 주연을 했던 <챔프>라는 작품은 내 나이 또래 혹은 그 이상의 연령대의 사람들은 모두 기억을 할 텐데, 권투선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마지막 시합을 하다가 죽는 슬픔 이야기로 국내 개봉시 엄청난 흥행을 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실 리메이크 작품인데, 원작에서는 최종 승부에서 지고 죽는..그야말로 곽경택 감독의<챔피언>과 같은 이야기이지만, 리메이크에서는 마지막에 존 보이트가 승부에 이기고 나서 링 위에 쓰러져 죽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기획을 알게 된 많은 헐리우드 전문가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만일 최종승부에서 이긴다면 관객 수가 배로 늘 것이라고 조언을 하는 바람에 제작사와 감독의 타협점으로 부분 수정 한 것이라는 후문이 남는데, 현실이 그렇다. 현재의 영화에서 비극을 잘 만들어서 흥행에 성공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친구>의 감독 곽경택과 배우 유오성이 재결합해서 두번째 작품을 만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기대를 했을 까? 하지만 비극적으로 사망한 김득구 선수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싶을 것인가? 한때, <약속> 등 한국영화계에서 눈물 뽑는 신파 멜러물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지만, 그건 당시 시대적인 장르 유행과 선남선녀 배우, 조폭액션의 유행, 깔끔한 OST의 유행이 같이 결부되어있었기 때문이었지, 단지 비극이기 때문에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원더풀 데이즈>의 100억 손해는 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부터 비극적인 내용의 기획이 아니었다면(이런 분위기를 꾸준히 유지하는 감독의 연출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도입부에서 중반까지는 결코 감정을 과잉하지 않고 암울한 미래를 그려내고 있었다), 몇 차례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탄한 기획하게 견실하게 재정을 운영해서 만들어졌다면, 제작비를 뽑고도 엄청난 이익을 남겼을 작품이 분명해 보인다. 제작사는 블레이드 런너와 같은 저주받은 걸작을 남겼다고 자족하고 살게 될지 몰라도, 이제 투자자들은 아예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손을 뗄지도 모른다. 실사 영화의 경우도 작년 블록버스터들의 연이은 재난으로 대형투자가 안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인데, 적어도 40억 이상, 3년이상이 걸리는 애니메이션에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끝으로, <원더풀 데이즈>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물론 100억 손해는 범죄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작품적 완성도로만 봤을 때, <원더풀 데이즈>는 욕을 먹을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왠 오토바이 씬이 그렇게 많이 나오냐구요? 어느 누구도 <나인 하프 위크>에서 음식가지고 장난치는 게 많다고, <블레이드 런너>에서 스산한 도시풍경 설정샷이 많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특정 장면은 영화 전반과 얼마나 근사하게 결합되느냐로 판단되어야지 그 절대량의 수치만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원더풀 데이즈>에서의 오토바이 씬은 파국으로 치닫는 사람들의 운명을 보여지는 것 같아서 볼 떄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제작진들이 마지막 제작비 부족만 겪지 않았더라도 전체적인 완성도는 더욱 올라갔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아예 완성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원더풀 데이즈>만큼은 입장료 값어치는 한다고 봅니다. DVD나 비디오만으로도 많이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