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June 9, 2011

문화가 산책

연초에 신년계획을 나름 세웠었는데, 새로운 직장도 찾아보고 시나리오도 최소 두 편 쓰고 등등 뭐 말만 거창했다가, 한 4월쯤 되자 갑자기 모든 것이 힘들어졌다. 결국 대폭 수정하게 되었고, 그러고 보니 이번이 이민 8년차 인지라 (게다가 아내도 유급휴가도 생겼고 해서) 자체적으로 안식년을 설정해서 놀러 다니고 쉬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영화들을 최소 하루 한편씩은 보자고 다짐했는데, 뭐 매일같이 보지는 않게 되지만, 그래도 아직 꾸준히 보고 있는 편이다. 

최근에는 드라마 <연애시대> 와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까지 섭렵하고 있는데, 다시 봐도 놀라운 완성도와 탄탄한 구성 및 골계미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에 비해 2011년 아카데미 수상작들의 수준은 매우 떨어지는 편인 것 같고..
<연애시대>
이 16부작 드라마의 메인 카피는 <헤어지고 시작된 이상한 연애>였으나, 이야기는 거기에 그치질 않는다. 사람에게 있어서 “정”이라는 게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같은 과거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끈끈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담담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공형진의 연기는 두 말 할 것없이 훌륭하고 당시 신성이었던 <이하나> 역시 그 이상을 바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연민과 사랑 등 복잡한 감정을 멋지게 표현한 <감우성>과 <손예진>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특히 <손예진>의 연기는 그 녀의 연기인생 그 전에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후에도 보여지지 않는 특별한 것이었다.
<안녕, 프란체스카>
사회 경제가 어려워지면 가정이 해체 – 재조합될 수 있다는 것을 노도철 PD와 신정구 작가는 미리 알고 있었을까? 2005년에 방영된 이 작품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가 닥쳐온 후 보게 되니 (극중 앙드레 대교주보다 더) 놀라운 예지력을 발견할 수가 있다. 구직난과 실업난이 겹쳐진 현실이 어처구니 없는 극중 가족 상황들과 겹쳐져 종종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만드는 역대 최고의 시트콤.
<글러브>
내 참.. 갑자원을 다룬 대부분의 일본 만화보다 못한 이 이야기를 한국 최고의 제작자로 불리는 사람이 만들었으니.. 쪽팔려서 어떡하란 말인가.
<상투푸딩>
가벼운 일본식 코미디를 보고 싶어서 골랐는데, 오히려 진지하게 가사노동의 가치에 대해 접근하는 영화라서 놀랐다.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전 세계적으로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을 고민하는 영화들이 나오는 것은 왜 일까.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닐지…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워낙에 유명한 스파게피 웨스턴 명작인지라, 좀 경건하게 보려고 했으나 금새 졸려 버렸다. 클로즈업과 롱샷을 병치하면서 만드는 긴장감이 처음에는 괜찮은 효과처럼 보였는데 2시간 가까이 계속 그것만 보다 보니 좀 지루하더만. 역시 영화에는 양식적인 연출도 중요하지만, 결국 역사에 남는 걸작에게 필요한 것은 단단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라는 원칙적인 감상을 되풀이 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내일을 향해 쏴라>
왠지 이 영화를 기억할 때는 자전거 타는 장면과, 은행강도 장면, 볼리비아 경찰의 포위를 향해 뛰쳐 나가는 마지막 정지샷 등등이 떠오르는데, 다시 보니 아직 서부영화의 장르적 클리셰가 여기저기 남아있는 것이 발견 되었다. 글치.. 수정주의 서부영화였지..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부치캐시디’의 유쾌한 농담이나 영화의 장르적 재미 보다는, ‘부치’, ‘선댄스 키드’, ‘에타’ 이 세 사람의 관계가 흥미롭게 보였다. 영화는 굳이 그걸 시간 들여 끄집어 파내려고는 하지 않지만, 일반적인 가족의 개념을 넘어선 저런 관계가 오히려 히피 세대들에게는 부담없이 받아들여 졌을지도 모르겠다.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를 보고 탄력을 받아 계속 보게된 ‘조지 로이 힐’ 연작. 이렇게 영화를 유쾌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이 두 작품 이후로 딱히 대표적이 없었다는 것은 안된 일이다. 암튼.. 시종일관 ‘로버트 레드포드’의 모습은 남자가 보기에도 충분히 멋있고, 사람들을 속이는 에피소드들은 (특히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이 후 수 많은 비슷한 장르의 영화들의 도전들을 언제나 가볍게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Fighter>
영어가 짧은 터라.. 특히 영국식 액센트나 미국 남부 액센트, 길거리 슬랭 들에는 쥐약이라서, 보통 DVD를 빌려 보게 되면 당연스럽게 영어자막을 읽게 되는데, 이 영화는 도무지 자막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맨 처음 크리스천 베일의 인터뷰 장면 부터 각 배우들의 놀라운 흡입력이 시선을 배우들 연기에 못박아 두게 만들었다. 감독은 이전에 단편이나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었다는데, 어떻게 이런 연기를 뽑아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워낙에 훌륭한 배우들이라서 그냥 카메라를 돌리면 되었던 건지.
<빌리 엘리어트>
10여년전 극장에서 보고 엉엉 울었었는데, 40대가 되어도 이렇게… 정말 사람은 성장이 없는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웃음의 코드보다는 슬픔의 코드라는 것이 덜 보편적인 것 같다. 그건 아마 각각 자신 만의 지옥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일듯. 자식의 학교 시험을 위해 동료들의 파업을 배신하고 작업장으로 복귀하는 장면은 지금 생각만해도 다시 울컼
<블랙스완>
다른 평이나 , 감독 인터뷰를 통해서 이 영화가 ‘콘 사토시’의 <퍼팩트 블루>의 영향을 여러모로 받았다는 것을 알고 봐서.. 조금 맥이 빠져버렸다. 그래서 인지 <레슬러>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대단한 울림은 없었지만, ‘니나’를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은 정말 극중 인물에 스며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삼중으로 겹쳐 그려낸 듯. 사랑을 잃고 자살하는 백조의 이야기 – 그리고 그걸 연기하는 ‘니나’의 이야기 – 그리고 ‘니나’를 연기하는 ‘나탈리 포트만’의 모습. 역시나 배경음악인 ‘백조의 호수’도 영화 클라이 막스에 맞춰서 흐른다.
<True Grit>
가만 보면 ‘코엔’형제의 모든 작품들은 항상 장르의 양식을 따라가면서도 파괴하는 문법을 따르는데, 그 파괴 정도에 따라서 모던하고 형식적인 분위기가 나는지 고전적인 분위기가 나는지가 갈라지는 것 같다. 그렇게 굳이 분류를 하자면, (워낙에 리메이크여서 그런지 몰라도) 이 작품은 비교적 고전적인 편.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한 퇴물 총잡이 역을 원작 영화에서는 ‘존 웨인’이 했다는데, 그 미국 총기협회 회장님 같은 양반이 이 영화의 ‘코그번’과 같이 비겁하고 거만하고 잔인한 역으로 나오진 않았을테니, 나름 새로운 색채가 가미되었다고 봐야겠지. 
<X-Men, First Class>
3편과, <울버린>의 속편이라기 보다는 1편과 2편의 속편 격인 이 영화는 (당연하지만) 전편을 숙지하고 보면 한결 재밌게 볼 수가 있다. <원티드>에서 ‘안젤리나 졸리’의 내공에 눌려 그저 찌질한 킬러 지망생 정도로만 보이던 ‘제임스 맥어보이’는 이 영화를 통해서 ‘샤이아 라비프’와 함께 차세대 톰크루즈의 대열에 끼었고, <킥애스>로 화려한 총잡이 액션을 보여준 감독 역시 돈을 많이 주면 그 만큼 더 효과적인 액션을 만들어낸다는 걸 입증했다. 근데도 왠지.. 인간 관계나 사건의 인과 관계 같은 것들이 촌스러운 건 원작만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나.  1편 처럼 좀 더 세련되고 근사해질 수 도 있었을텐데..
<킹스스피치>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기분이 나빴던 것. 좋다. 10보 양보 해서 말 더듬는 것이 왕가, 라디오 연설을 종종 하는 시대의 영국 왕에 있어서 큰 장애라고 치자. 그리고 더 양보해서, 영국의 선전포고가 나치의 군사세력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자위적 수단이었다고 당시에는 믿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쟁을 선포하는 왕의 마지막 연설에서 (왕이 장애를 극복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환호하는 장면은, 그리고 그걸 장애에 맞서는 인간의 용기라는 식으로 연출해 나간 것은  좀 너무하지 않았나? 도대체 이 영화는 전쟁에서 사라지는 생명에 대해 발톱의 떄만큼도 배려가 없다. 차라리 그런 면에서 X-Men이 더 솔직한 듯.
<밤과 낮>
어느 신문 기사에서, <킹스스피치> 마지막 연설에 흐르던 배경음악이 이 영화에서는 개똥을 치우는 장면에서 쓰인다고 해서 홧김에 보았다. 뭐… 딱 홍상수표 영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나, 이번에 감독의 페르소나로 나온 김영호는, 속물적인 지식인 역을 연기하기엔 너무도 인간적인 웃음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