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삶

차근 차근 준비를 하고 있다. 가서 살 밑천들과 버리고 갈 물건들의 살생부를 만들고, 한국이 비교적 저렴한 물건들이나 서비스들은 잔뜩 잔뜩 준비하고 있다.

군에 있을 때, 불교철학에 심취한 적이 있어서 였을까? 어쨌든 나에게 2번의 탈영기도를 교사했던 4성제 8정도라는 불교철학은 그후계속 조용히 살고 싶다. 집착을 버리며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게 했다. 그리고 제대하자 마자 5개월 가량 손을 대고 있었던3D 극장용 애니메이션 프로젝트가 여러 사정으로 어려워지자, 나는 늘 꿈꾸고 있던 춘천이라는 이상향을 찾아 떠났다. 마침춘천이라는 무,공,해(한강상류 지역으로 수도권 식수원보호를 위해 이곳에는 공업이 발달되지 못했다) 도시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무공해 산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산업 부흥을 위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난 그곳에 전문직 공무원으로계약되어 일하게 된 것이다.

춘천시에서 홍천으로 들어가는 산골에 폐교가 한 곳이 있었는데 바로 앞에는 저수지가있어 늦여름이면 매일 아침 물안개를 볼 수 있는 곳이었고 <배산임수>라는 말의 모델 하우스 같은 곳이 었다. 어떻게든춘천시의 신뢰를 얻어 그곳으로 들어가 평생 사는 것이 내 꿈이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얘기했다. 일주일에 PET로2병씩 술을 담그면서 살겠다고.. 그리고 커다란 진돗개를 키우면서, 매일 아침 폐교의 운동장을 진돗개와 함께 뜀뛰기를 하면서건강하게 살겠다고… 몇몇 친구들은 나의 인생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몇몇은 절대 지지와 선망을 보내 주었다.

불행히도.. 춘천시의 전문직 공무원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할 말은 많지만.. 다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직 나는 그 폐교 운동장을 산책하면서 남은 인생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일이 있고 난 후.. 난 어딜 가서 살더라도, 한국 땅 내에선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각박한도시가 되었든 한적한 시골이 되었든 간에, 젊은 전문가를 전문가로 보지 않고 타지에서 온 어린 사람으로만 보고, 모든 사람이일괄통제와 일괄책임을 지는 한국의 문화로 부터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이 때부터 나는 이민을 가야하겠다는생각을 시작했다. 이후로도, 회사생활과 개인기획을 거듭하면서, <한국 특유의 패거리문화와 상명하복 구조>공무원들의무사안일을 위한 <이름빨>을 기준으로 하는 정책들을 뼈저리게 겪으면서, 이민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감까지 들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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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준비 중에 가장 주요한 것은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난 몇 년 전부터 꾸어왔던 <가전수리공>에 대한 꿈을 위해 학원을 다니고(물론 캐나다에서의 생존도 고려한 것이다), 아내 역시 수지침과 불어, 중국어 등생존을 위한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 당장 먹고 살 일도 걱정이긴 하지만, 일용직에 있으면서 몇 푼 버는 것보다는 내일을 위한대계를 구체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지침 역시 의료시설이 부족한 캐나다에서 자체적인 건강유지를 위한준비다. 중국어와 불어는 한국인 커뮤니티를 배제한 삶을 위해서 추진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여름용 220V 가전제품의 110V 전환이라든지, 의류정리들을 하면서 조금은 들뜬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그럴수록애틋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가족에 대한 생각이 심하게 그렇다. 요샌 부자(父子)간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를 보면 괜히눈물이 솟구치는데, 얼마 전, 을 보면서 신구가 송강호가 야구를 하는 것을 반대하는 장면을 보고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도 어이없어 했다.(그 장면은 정말 웃긴 장면이어서 다른 관객들을 배를 잡고 있었는데 말이다)

2002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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