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 (송지나 극본 김종학 연출)

시간은 정말이지 정신없이 곤두박질친다. 벌써 12월.. 이러다가 잠시 넋 놓고 있다보면 훌쩍 떠나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PR레터를 받고 나서, 외무부와 구청 세무서를 정신없이 왔다갔다 한 후에 결국 PR여권을 만들었다. 비행기표도 사고.. (11월1일부터 전자정부 출범이니 뭐니 하던데.. 전부 쌩이다. 도대체 왜 내가 군복무를 마쳤는지 외무부에 증빙서류를 제출해야하는 것인가? 아니 주민등록증 만들 때는 젠장 열손가락 가득 잉크를 묻히게 만들더니만, 주민등록 초본에 나온 그런 기본적인 정보조차도 공유를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민원서류를 쉽게 쉽게 처리해주면 국민들 버릇이 나빠진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내가 이래서 이민가는 거야!! 씨발..)

이젠 정말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처음.. 비행기표를 구입할 때는, 마일리지로 구입할 수 있는 표가 3월까지 없다는 말에 경악했다. 각 항공사마다 마일리지를 임의로 축소하겠다는 발표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샌 정말 개나 소나 뱅쿠버로 어학연수해보겠다고 돈다발 들고 날아가는 것이다. 아.. 정말 내가 생각 잘한 것이지.. 앞으로 외국물 잔뜩 먹고 온 새파란 놈들 때문에 회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친구들과 선배들이 불쌍해진다. 그 인간들도 어떻게든 이 사회에서 벌어먹고 살아 보겠다고 바둥거리고 있는데.. 결국 돈빨에 밀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비행기표 사고 3월 7일로 날짜가 정해지고 나니까, 그동안 마음에 남아있던, 어떤… 답답함 – 지난 글에 밝혔듯이 나라걱정과 가족걱정이 사라지고 만다. 역시 기회주의적인 천성은 버리지 못하는가? 막상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내 코가 석자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당장 영어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곳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도 전혀 막막하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허풍은 쳐놨지만, 낮선 땅에 떨어져 맨땅에 헤딩하려고 생각하니 심각하게 겁이 난다.

게다가 .. 여러 달 놀고 나서 지금 당장 이 곳에서 먹고 살 만한 생계비도 모자른 형편인 것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장 막노동이라도 나서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책임하게 벼룩시장의 구인정보를 보고 전화 몇군데 넣어보다가 나이 때문에 퇴짜를 맞고 나서 마음이 상해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는 일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 곧 떠나게 될 것이 주위사람들에게 알려져 어디 일자리 소개도 안들어 오는 형편… 그런 생각 하면서 또 드러눕고..

불안한 마음에 오히려 씀씀이가 커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단란주점에서 200만원어치씩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재밌는게 있으면 사서 아내와 같이 놀아보는 것이다. 조립식 장난감 특별부록에 눈이 뒤집혀 책을 덜컥 사고, 저녁에 아내와 딱 붙어서 프라모델을 조립하면서 옛날 생각을 해보고, 반지의 제왕 종이모형에 정신이 나가서 롯데리아 불갈비버거를 대책없이 매일같이 사먹어보기도 한다. 텀블러에 꼬여서 파파이스 핫쵸코를 마셔보기도 하고..

어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왜 내가 애니메이션 업종을 살려볼 생각을 안했던 것인가.. 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애니메이션 시작할 때 그림으로 시작했으면 캐나다에 가서도 애니메이션을 계속 할텐데… “하는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정작 TV수리는 공부할 생각을 했으면서 애니메이션 동화실에 가서 그림을 배울 생각은 안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관련업종에서 10년 정도 일했으니까 적응도 빠를텐데 말이다.  왜였던 것인가…? 그건.. 내가 앞으로 가전제품을 수리하면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지.. 이런 저런 일이 있는 동안,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꿈이었던 걸 잊어버리고, 그냥 생계수단으로만 생각해버린 걸까.. 난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려고 했었던 것인데..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 개봉이 눈앞에 있다. 간만에 피를 끓게하는 영화 한 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편 영화를 보지도 못했고.. 본 것도 그리 관람료 값어치를 못해서 .. 차라리 최근엔 SBS드라마들이 날 즐겁게 해주고 있다. 전도연, 조인성이 정신없이 매력을 발휘하고 있는 <별을 쏘다>와 송지나 작가의 <대망>.. 둘 다 지지리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래서 관심이 간다.

얼마 전 <대망>에서.. 악덕 고리사채업자 백가에게 혹사당하는 담배농사 짓는 마을사람들을 발견한 장혁은, 양심에 끌려 결국 그들을 돕기로 하지만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조선 최고의 담배를 만드는 비법서 만을 가지고 마을에 돌아오지만, 마을사람들은 일을 더 망쳐놓았다고 장혁을 지탄한다.

마을노인 : 이.. 딱한 젊은이야.. 그렇게 우리 상황을 몰라? 우린 무슨 최고의 담배를 만들던 말던.. 죄다 백가놈에게 뺏기게 되어있어..

장혁 : 그럼.. 이 마을을 떠나면 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앞에만 살짝 읽어봤는데, 담배를 재배하는데는 기온이 낮고 지대가 높아야 한다 그러더라구요.. 제가 딱 그런 곳을 알고 있거든요..

마을사람들.. 웅성웅성.. 속지말자고 비난이 쏟아지고.. 마을노인이 진정시키면서..

마을노인 : 지금 우리보러 고향을 등지란 말인가..?

마을사람들.. 또다시 장혁 비난에 나서고, 마을노인.. 장혁을 따라나섰던 마을청년A에게

마을노인 : 자네가 말 좀 해보게.. 쭉 같이 다녔으니 우리보다 알고 있는게 있을 것 아닌가..?

마을청년 : 침통하게 – 지금 우리에게는 고향을 등지게 되는 거지만.. 우리가 자리를 잡고나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고향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난 두 눈에 또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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