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새해가 밝았다. 이민원년이다. 드디어… 가서 뭔가 할 일도 구체적으로 생기고, 어느정도 마음 속의 준비도 되었다. 이것저것 정리도 하고… 그야말로 비자도장 찍히는 것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개고생이 시작되는 건지, 천국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는 건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보통 모질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거라는 건 확실하다.
어제 TV에서 LA교민들의 한국의 날 행사를 보여주더군. 길거리를 통째로 빌려서 퍼레이드를 하는데, 미국에 첫이민 온 사람들이 타고온 배의 모형과 남대문 모형이 차례로 퍼레이드를 했고, 그 위에 부채를 들고 한복입은 교민들과 홍명보, 박찬호 등이 있었다. (홍명보는 시종일관 예의 그 무표정으로…) 예전 같았으면 그런 방송을 보면 그저 쓴웃음 지으며.. ‘왜 한국사람들은 저런 날만 되면 부채춤을 추는지 몰라…’라고 했을 일을, 어제는 너무도 심각하게 다가왔다. 정말로… 왜들 저러고 살지?
아내와 내가 곰곰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다민족 국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필리핀 외국인 누가 와서 살게 된다면, 누구도 그 사람에게 필리핀 언어라든지, 민속의상 / 풍습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단 이 나라에서 와서 살거면 이 나라 풍습을 익혀야 한다면서 오히려 한복을 입혀놓고 서툰 한국말을 시켜가며 낄낄 거릴지언정, 필리핀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 어쩌면, 필리핀이 싫어서 탈출한 필리핀인이라면 오히려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는 다르다. 인종의 용광로가 되었든 모자이크가 되었든… 그런 다민족/다인종 국가에서는 여러 민족의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여 자국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자세가 되어있는 것이다. 거기선 이민자들이 고국을 싫어서 뛰쳐나왔든, 추방되었든 간에, 그 나라의 민족적 특징이 대단히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로, 이민자에게 있어서도 모국의 언어나 풍습을 간직하고 있거나 그걸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그건 다민족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나만의 개성이자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그 누구도 날 앵글리 색슨으로 봐줄리 없다. 모두다 날 아시안이자 한국인으로 알고 있고, 그런 전제 하에 나와 내 모국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다.
아마도 미국교민들의 한국의 날 퍼레이드는 중국인들의 행사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어짜피.. 모두에게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로 알려져 있고.. 코리언 아메리칸으로 이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면.. 그런 것이다. 오히려 내 민족의 문화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과시하면서 타민족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자신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민선배인 중국인들이 그렇게 해서 미국 현지의 주류사회 진입에 성공하고, 미국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고, 미국교민들은 이 방법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한복 입고 부채춤을 추는 일은 아주아주 지긋지긋한 일이지만.. 다민족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었다. 뱅쿠버 현지에도 한국의 날이 있겠지… 교민사회가 성장하면 퍼레이드까지 할지 모르겠다. 사실.. 먼저 캐나다 땅에 정착한 이민선배들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캐나다 사회의 일원이 되어 멋진 자연환경과 여유있는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었겠지.. 하지만 살아가 보니..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캐나다 현지 사람들이 자신을 코리언 카나디안으로 보고있고, 그것으로 존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기 업무의 전문성으로 알려지기 보다. 한국인으로 알려지는 것이 더 사람을 사귀거나 사회에 적응하는데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뭐.. 이렇게 되는 공식이 아니겠는가..
순간 아주아주 비참해졌다. 적어도 .. 한국에서 계속 살게되면 부채춤은 안춰도 될텐데… 이렇게 우울한 마음으로 아내와 밤잠을 못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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