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가요

1985년에 들국화 1집이 나왔을 당시 나는 아직 정수라나 이선희 만을 추앙하고 있었고, 당시 한국에서 새로 융성하기 시작했던 ‘헤비메탈’이라고 불리우던 음악에는 아버지의 영향을 깇게 받은 탓인지’미, 친, 짓’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당시 중학교 2학년, 다른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생각을 키워갔을 나이일 법도 한데, 내 경우는 아직 강팍한 보수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고, 부모님 외에 따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학교 공업 선생님 정도여서, 40대 기성세대들의 식견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들국화의 음악세계는 사실 ‘헤비메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의 복장이나 전인권의 샤우팅 창법, 그리고 결정적으로 방송계와 거리를 둔 채, 음반과 라이브로만 철저하게 승부하는 락 스피릿이 다른 ‘백두산’이니 ‘시나위’같은 헤비메탈 밴드와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들의 음악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86학번을 달고 대학에 들어간 누나가, 그리고 사촌형이 대학교에서 듣는 음악을 들려줬을 때가 들국화를 처음 만났던 기억이다. 한마디로, 문화의 충격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눈 앞에 새로운 세계가 확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형편상, 곧바로 그 음악 테이프를 구해서 듣기는 어려웠고, 몇 년 간 마음 속으로 벼르고만 있다가, 고등학교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국화는 그 뒤로 20년 가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들국화의 장점은… 헤아릴 수가 없다. 음악적으로 (비틀즈와 퀸처럼)4인 풀밴드를 갖추고 있는데다가, 멋진 화음을 자랑하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노랫말들..(당시의 대개 노랫말들은 사랑 일색이었다. 하지만 들국화는 희망과 미래, 어머니 등을 노래했다), 하다 못해, 앨범 자켓에 ‘도와주신 분들..’해서 땡큐 크레디트를 남기는 데에서도, ~~~’님’이라는 말투를 처음 사용했다. 그 뒤로 ’님’이라는 존칭형 접미사는 피씨통신과 인터넷을 통해 관요엉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십년이 지나고 20년이 다 되도록 가장 들국화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은 바로 ‘건전가요’다. 당시의 모든 음반들은 가수가 발표하는 노래 외에, 일명 ’건전가요’를 수록하고 있어야 했다. 군사독재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금지곡도 허다했고, 이렇게 건전가요를 수록하는 것은 앨범 출시에서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웃기는 건전가요는 ‘시장에 가면’이라고 하는 건전한 상거래를 권장하는 노래였는데, 당시 최고의 음반사였던 서울음반에서 출시한 대다수 음반들의 경우 그 노래를 수록하고 있었다. 이선희며, 김창완, 송창식 모두 포함된다. 강인원 같은 아주 슬픈 발라드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방정맞은 ‘시장에 가면’이 튀어 나오면, 정말이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짓거리를 할까..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수들은, 아무 상관없이 건전가요를 자신의 음반에 넣고 있었다. 가금 자신들이 직접 부르기도 했지만, 대개 그냥 녹음된 곡들을 그냥 집어넣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심의완화를 주장했고, 군사독재정권의 정책이 문화를 압살한다고 믿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안에서도 자신의 완벽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자신의 음악성을 의심한다면? 독재정권 탓을 해버리면 되니까…

들국화는 달랐다. 들국화의 건전가요는 ‘우리의 소원’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앨범수록곡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화음으로 멋지게 불러낸다. 전혀 튀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들국화 앨범에는 그 ‘건전가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그들이 ‘행진’을 부르듯이, ‘우리의 소원’이 앨범 마지막에 불리워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나 역시, 무슨 일을 하든, 그렇게 완벽한 마무리를 해보려고 하지 않았던 적이 많았던 것이다. 춘천에서 애니메이션 페스티발을 기획하다가 중도에 사퇴했을 경우에도, 공무원들과 말이 안통한다는 이유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것도 내 책임이었다. 그 상황을 모르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그런 것이 변명이 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조금 더 긍정적으로 위기에 대처했다면, 들국화의 ‘우리의 소원’같은 건전가요를 넣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여기 와서도, 한국에서 계획했던 일이 모두 다 잘 굴러가는 것 만은 아니다. 그럴 적마다, 누구 탓을 하거나, 어떤 변명을 내세우기도 한다. 물론, 그런 변명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부터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내가 처음 이민을 선택했을 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서, 들국화가 첫 앨범을 냈을 때의 초심을 상상해 보면서, 이 ‘건전가요’같은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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