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다

암 중에는 비교적 치료가 쉽다는 대장암이고, 수술도 그럭저럭 순조롭게 끝난 이후라서, 당뇨로 인한 합병증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종류의 암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자위를 하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암이라는 병이 정말 내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지금 가장 걱정이 드는 문제는 앞으로 아버지의 삶의 방향이다. 아버진 우리네 아버지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정말 (폭풍처럼 변천하는 사회 속에서) 재미없게 사셨던 분이다. 미술에 재능이 있었고 영화를 좋아했던 청년이었지만 생계를 위해 영업직을 몇 십 년간 해야 했고, 결혼 후엔 한국의 여느 직장인들처럼 직장과 집을 왕복하며 세월을 보냈다. 아무런 취미 없이, 아무런 여가활동 없이 주말이면 방에 드러누워 스포츠 중계를 관전했고, 주중에는 다시 하루 12시간 넘게 회사 업무에 관련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껏 놀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 당연히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런 아버지에게 있어서 유일한 낙은 (다른 한국 서민 남성들처럼) 바로 술이었다. 직장을 마치고 동료들과 나누는 술잔,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두고 마시는 한잔의 술, 그리고 휴일 권투중계를 보면서 마시는 소주잔 만이 아버지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또 다시 일주일간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팔 수 있는 리크리에이션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선 아버지께서 인생을 통틀어 정말 기뻐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 언젠가 아버지는 20년 된 프랑스 브랜디를 어디선가 선물을 받아 오셨는데, 그 술을 누나가 대학에 입학하면 따겠다고 공언하셨다. 몇 년 후 누나는 대학 1차 지망에서 떨어졌고, 의료관련 단기대학을 졸업한 후 순조롭게 취직을 했지만 그 병은 개봉되지 않았다. 그 다음 내가 대학에 입학하면 따겠다고 했으나 나 역시 1차에는 떨어진 후 보궐로 입학해서 결국 졸업까지 무사히 마쳤고 그 술은 개봉되지 않았다. 그 이후도 내가 제대하고, 결혼하고, 여러 이벤트가 있었지만 그 술은 아직도 본가 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다. 분명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당신 인생의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부모들도 공감하겠지만, 우리 세대 자식들이란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가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독립을 원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은 당신의 임무가 종결되는 때로 기대해왔지만, 사실은 당신들의 품에서 자식들이 벗어나는 순간이 되는 셈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즈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전에 없는 취미활동을 시작하셨다. 바로 TV드라마 및 외화를 녹화해서 보관하는 것이다. 취미라고 보기엔 어색할 수 있으나 아버지의 수집욕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접목된 절묘한 취미생활이었다!! 때때로는 과도한 취미생활로 집안에 긴장감이 돌기도 했지만(예를 들어, 무선전화를 받으면 TV전파가 간섭을 받아서 녹화 도중 약간의 노이즈가 있기도 했는데, 때문에 아버지가 녹화하시는 도중에는 우리가 전화를 짧게 끊어야 했다), 그리 돈이 많이 들지 않는데다가 나름대로 생산적인 취미활동이라서 가족들 모두 덕을 보기도 했다(특히, 모래시계와 같은 대작이 방영될 시즌에는, 귀가시간이 불규칙했던 나와 누나 역시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어쩌면, 이런 취미생활은 자식들인 누나와 내가 동기를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우리네 부모세대들과 같이 아버지 역시 우리에게 인내와 극기를 강조했다. 허리띠를 졸라 매서 새마을 운동으로 경부 고속도로를 세우고, 우리 모두가 잘살게 되면 그때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늦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당연히 누나는 제약회사에 다니기도 했고, 나는 삭막한 고교생활을 거쳐 전혀 생각지 않았던 고려대 농대에 입학해야 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곧 아버지 뜻에 저항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제 갈 길을 나섰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나는 애니메이션 10년 경력의 이민자가 되었고, 누나는 현장경력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연극과 강사가 되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잘 해내고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진 한편으로는 괘씸한 기분도 들었을 테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한편으로는 기특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운 생각이 드셨을 것이다. 한국전쟁만 없었으면, 새마을 운동만 없었으면, 당신도 좀 더 일찍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을 텐데.. 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방송물 녹화라는 작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취미생활을 시작하신 것이 10년 전쯤이다.

그리고 1년 전쯤부터, 내가 이민에 대해 결정했을 때부터 아버지는 초상화를 공부하시기 시작했다. 60이 넘은 나이에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워낙에 미술에 재능과 기본을 갖추고 있는 터라 쉽게 배워가셨고, 진심으로 그 일을 즐기셨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옛날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참고 견디고 돈을 모아서 나중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강조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그 때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찾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분이 되셨다. 한 때는 아버지께서 초상화를 배우는 것에는 언젠가 아들이 살게 될 캐나다라는 나라에서, 보란 듯이 전문 기술자로 자리를 잡아보자는 생각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정밀묘사 작업의 피곤함을 알고 있기에, 내가 아버지께 종종 건강을 생각해서 쉬엄쉬엄 하시기를 권했을 때, 당신은 초상화를 그리는 순간 만큼은 모든 일을 잊게 되어 즐겁다는 말씀을 하시는 걸 듣고,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당신이 좋아하시는 일을 드디어 찾아내신 것이다. 가족들 모두 진심으로 그런 아버지를 응원했다. 그리고 1년이 채 못되어, 암으로 병상에 눕게 되신 것이다.

연애를 처음 할 때, 가장 피곤했던 것이 나에 대한 상대방의 진심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나의 진심을 상대가 몰라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 수 있고, 전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될 때는 항상 상황이 이미 끝나가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무엇보다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제야 당신 자신의 인생에 사랑 고백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이제야 말로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셨는데, 이제는 그걸 할 수 있도록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수술결정을 듣고 가족들끼리 병원비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께 통장을 내미셨다고 한다. 통장에는 500만원 가량 모아져 있었다. 은퇴기념으로 두 분이 중국여행을 가기 위해 모아두셨다고 한다. 40년 가까이 여행 한번 다니지 않고 한국 사회에 봉사하며 노동을 하셨지만, 지금 받는 국민연금은 고작 30만원 남짓. 그 동안 쥐꼬리만한 용돈을 쪼개 쪼개어 모은 통장으로, 30년 넘게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묵묵하게 고생해온 아내에게 떳떳이 으쓱한 얼굴로 내밀고 싶었던 통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통장은 이번에 아주 미안한 얼굴로 병원비에 보태달라며 내놓게 되었다. 그런 현실이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명언을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머리가 굵어지자 ‘원 세상에.. 그런 지당하신 말씀들을 왜 그렇게 폼나게 말하려고 하시는지…’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좌우간 그 명언들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데 많은 자양분이 되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든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라는 명언들이 그것이다. 이제 아버지와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아버지의 명언 하나를 회고하려고 한다. ‘돈을 잃으면 일부를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반을 잃은 것이고, 희망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는 것… 그렇다. 희망을 잃지 않는 한, 아직 건강을 회복할 기회는 남아있다.

아까 연애 초보 시절에 관한 얘기에 덧붙여, 사실 최후의 한 순간에도 기회는 있었다. 그녀들을 떠나 보낸 것은 바로 내 자신이 용기를 잃고 포기를 해서 그랬다. 마지막 한 순간, 그 한 걸음을 더 나가지 못하고 포기하곤 했다. 이 순간, 아버지가 당신 인생에 대한 애정 고백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 모두 아버지의 삶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문왕은 유리에 갖혀 있을때 주역을 정리했고, 손빈은 앉은쟁이로 병법서를 썼으며, 베토벤, 고호 … 사례는 수없이 많다. 힘들지만 마지막 한 걸음으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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