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지난 3월 31일 새벽,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 향년 97세.

돌아가시기 몇 일 전, 갑자기 꿈에서 뵌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집 밖으로 달려 나가셨다. 어딜 가시려고 하느냐고 아무리 붙잡고 말려도, 방긋방긋 웃기만 하실 뿐, 버선발로 안양의 아파트 문 밖으로 뛰쳐나가셨다.

내 기억 속에서 처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은.. “약게 살아라(자신을 위해 꾀 많고 눈치 빠르게 살아라)” 였다. 아마도 그 때가 국민학교 다닐 때였을 테니… 그렇다고 해도 할머니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을 때였다. 개화기에 태어나신 후 한국 역사의 굴곡을 정면으로 지나오시면서, 약자로서.. 힘없는 서민으로서 70년의 인생을 정리하신 말씀은 “약게 살아라” 였던 것이었다.

돌아가셨다는 사실.. 두 번 다시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막상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시기 전에 뭔가 더 같이 할 수 있었던 일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특히 한국의 현대사를 구비구비 헤쳐오신 장본인에게, 뭔가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동안 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같이 산 적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부산에 머물고 계셨을 때에도 무슨 이유에서 인지 주민등록상 동거인으로 등록하고 산 적이 있었는데, 가끔 경찰서 에서 할머니를 뵈러 사람들이 찾아왔었다. 할머니께 무슨 전과 기록이 어떻게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관할 경찰서가 바뀔 때마다 경찰서에서 안부를 물으러 찾아온 것을 보면.. 아마도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할머니께서 조국 광복을 맞이하셨을 때가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쯤 되셨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가진 것 없는 서민으로서, 일본인들이 한국 땅에서 빠져나가던 그 순간, 과연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을까?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40년 가까이 일본계 지배세력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기 몸 보신을 했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한 자리씩 차지해 가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해방 전후의 사회혼란기와는 상대도 안되게 더 참혹했던 한국 전쟁은 또 어땠을지.. 가족, 자식들과 생이별을 한 차례 해야 했고.. 한치라도 실수를 하면 죽을 수도 있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당신과 자식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하셨어야 했을지..

그런 할머니를 뵙고, 한번쯤은 살아오면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는지, 언제가 가장 힘들었는지 여쭤보고 싶었다. 손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인생 후배로서. 뭐 사실… 개인의 기억 속에 역사라는 것은, 어짜피 개인의 추억으로 남는 것이겠지만..

반대로 내가 살면서 지나친 역사들을 기억해본다. 88올림픽, 과열된 대학입시, 90년 민자당 탄생, 베를린 장벽 붕괴, 91년 걸프전, 강경대 사망, 소련 해체, 현실 사회주의 붕괴, 94년~ 애니메이션 열풍, 98년 IMF 금융관리…… 역시 별 특별한 기억은 없다. 그 하루 하루 동안,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소주를 털어넣은 기억 밖에는..

그야말로 “모진 세월”을 이겨내면서 장수하신 할머니.. 모든 헤어짐은 슬프기 그지 없지만, 그나마 가장 사랑하셨던 아들이 임종을 지킬 수 있었어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제 꿈에서 보여주셨던 그 웃음의 의미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니었는지… 이제 편히 쉬세요.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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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성 (2007-04-09 15:50:53)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딸기아범 (2007-04-11 12:49:22)
고맙.. 이번에.. 어떻게 죽어야지 잘 죽는 건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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