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빈낙도의 정체

이민을 선택하면서 부터 지금까지… 아니, 군 생활 때부터.. 내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은 늘 <안빈낙도>와 <입신양명>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좀 더 덜 일하고 덜 먹으면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게 살다가 죽고 싶은… 그런 희망이 있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보다 지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어나서 20년 이상 훈련되어 왔고, 그리고 계속해서 방송이나 인쇄 매체를 통해 자극을 받아서 생기는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혹은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한 때는.. 그런 <명성>에 대한 선망 자체를 유치하고 저열한 짓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것이 언제나 계속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지금으로서는 <남들 앞에서 잘난 체 뽐내는 짓>에 대해서 그리 부끄럽다거나, 인간으로서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단지.. 좀.. 창피할 뿐,

한 때, 춘천에서의 삶을 꿈꾸면서, <폐교를 얻어 관리를 하면서, 아침에 큰 개와 운동을 하고 낮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술을 담그리..>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그 후에도 그런 식의 <안빈박도>의 삶을 생각할 때 항상 빠지지 않았던 나의 모습은 <운동을 통한 체력단련>과 <(술을 빚던 글을 쓰던 간의) 창작활동>이었다. 그건 마치, 내가 창작활동을 못하고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은 죄다 이 정신없이 미쳐돌아가는 바쁜 사회 속의 삶에 치여서 그렇다고 변명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세월은 흐르고.. 좌충우돌, 맨 땅에 헤딩을 거쳐 5년 가까운 이민 생활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줄어가는 은행 잔고를 보면서 피가 마르기만 했지만.. 지금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멍청함에 견딜 수 없어 좀 더 나은 직장을 찾아야 겠다는 건방짐이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민 5년차에 들어선 올해 신년 계획은 좀 쉬어야 겠다는 거였다. 보다 나의 <안빈낙도>의 취지에 가까와지고 이민을 온 목적에 가까와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뱃살빼기>와 <기타 배우기>.. 그냥 조용히 혼자 건강하고 재미있게 사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왠 걸.. 그 두 가지가 이제까지의 어떤 계획보다 지키기 어려운 것들이었으니.. 아무래도 자신의 습관이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힘든 법인 가 보다. 도대체가 일주일에 2일 쉬고, 공휴일마다 꼬박 꼬박 쉬어주고, 8시간 딱 채우면 땡 소리와 함께 집에 오고, 정치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위한 술자리도 필요없는 시간제 노동자에게, 왜 그런 간단한 계획들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것인지..

그래서 생각해보면, 내가 말 끝마다 <안빈낙도>, <안빈낙도> 했던 것은.. 그냥 단지 게으르고 싶다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꿈꾸던 삶은 그냥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하고 게으르게 살고 싶은 것 뿐이었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쪽팔리니까 <지구에 대한 예의>까지 갖다 붙혀가지고 변명을 늘어놓았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그냥.. 먹고 TV보고 책 읽고 그렇게 뒤룩뒤룩 사는 것이 나의 진정한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지금의 나로서는 그 게으름을 질타하거나 비난할 어떤 근거도 없다. 굳이 <지구>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적게 먹고 적게 산다면.. 게으르게 살다 죽는 것이 나쁘다고 할 어떤 이유가 없다.

근데.. 왜 이것저것 사고 싶고 하고 싶은 욕심이 계속 생기냔 말이지..

록밴드를 그린 만화를 보면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 한 곡정도는 기타로 제대로 치고 싶고, 좋은 생각이 나면 글로 남기고 싶고, 괜찮은 차를 보면 캠핑갈 때 저 차 타고 가고 싶은 이유가 뭐냔 말이지.. 진정한 게으른 자의 삶을 견지하기 위해선 그런 모든 욕망이 없어져야 할텐데..

진정.. 인터넷이 게으른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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