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직을 오래 하셨던 아버진, 한번은 수입품을 취급하는 회사에 근무하신 적이 있었는데, 덕분에 잠시 집안에 재미있는 것 들이 가득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없었던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서 부터, 돌려서 사용하는 깡통 따개라든지, 환등기 등등. 그 중에서 종종 집에 가지고 오셨던 것은 그림 그리는 것에 천재적 소질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을 위한 미제 색칠공부 노트였는데, 그 중에서도 톰과 제리 라든지, 슈퍼맨 만화책 하나를 거의 통째로 색칠을 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정체를 숨기고 루이스와 취재를 나서던 클라크가 멋진 캐딜락 컨버터블을 달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누나는 거침없이 “슈퍼맨 차는 빨간색이야!”라고 단정 지으면서 빨간 색연필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부터, 30년이 넘도록, 나에겐 슈퍼맨의 자동차는 언제나 빨간 색이었다.
이민을 오게 되고, 얼떨껼에 서두르면서 사게 된 첫 차는 기아 “리오“. 여기 까지 와서 한국차를 사게 된 것은 당시엔 무엇보다 가격적인 이유가 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냥 게을러서 그렇게 된 거다. 좋은 상태의 중고차를 알아보려고도 하질 않았고, 다른 메이커의 딜러를 둘러보지도 않았다. (다 정찰제로 팔줄 알았다) 사실 그 돈이면 정말 괜찮은 차들을 살 수도 있었는데, 웹사이트에서 공개되는 MSRP-소비자 권장가격 만을 보고, 얼떨결에 가봤던 딜러샵에서 얼떨결에 만난 세일즈 맨이 권하는 차를 그냥 잡아 타고 왔다. 색깔 따위는 고를 여유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급했는지 모르겠는데, 빨간색은 따로 주문해야 하고 매장에는 회색 밖에 없다고 해서 그냥 그 차를 집어 왔다.
지금에야(2007년 이후) 한국 차를 많이 알아주지만, 7년 전만 해도 정말 구렸다. 특히 전기부분은 모든 이가 경악을 할 정도로 저질의 디자인이었다. 우리 차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비가 퍼붓는 날 와이퍼가 작동을 안해서 고속도로에서 뛰어 내려가 볼트를 조이거나, 누가 차 안에서 방귀를 뀌었는데 파워 윈도우가 작동을 안해서 모두 숨을 참고 묵묵히 가야 하는 등, 수많은 잔고장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뿐 만 아니라, 겨울날 느닷없이 후륜 브레이크 라이닝이 협착해서 드럼 전체를 갈아야 한 적도 있었으니 (것보다 그 상태로 차를 몰고 며칠 출퇴근을 했었으니 덜덜덜)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면서도 아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 때마다 다시 한국 차를 타나 봐라 하면서 이를 갈았다.
뭐 하지만 대형사고 없이 12만을 넘겼고, 오히려 10만이 넘어서자 차가 전체적으로 힘도 좋아지고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이다. 물론 시끄럽고, 시동 걸리는 것도 불안 불안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 중고차를 알아보러 다니면서 우리 차의 반도 안 달린 차를 테스트 드라이브 해보니, 자동차라는 것이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대형매장에 들어오는 중고차들은 대부분 리스차량이라든지 렌트차량이다 보니까, 3만에서 5만 정도 된 차들도 너무나 주행상태가 안좋았던 것이다. 운전 습관을 믿을 수 있는 개인과 거래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겠지만, 뭐 워낙에 고립적으로 살다보니.. 딱히 그런 사람이 (혹은 그런 사람을 아는 사람조차) 주변에 없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결국 돌아 돌아 .. 새 차를 고르게 되었다. 막상 새 차로 가서 잘 관리 해서 이번엔 25만 까지 타보자.. 하고 결정 하고 나니,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제조 국가도 아니고, 연료효율이나 차량 종류도 아닌, 바로 색깔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빨간색 차량 들의 사고율이 높기 때문에 보험료가 높다고 하던데..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빨간 색을 골랐다. 왠지 30년간 원하던 것을 얻은 기분이라 살짝 감동스럽기 까지.. (그렇다고 나나 아내가 슈퍼맨이 되는 일은 없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구 환경에 더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밴쿠버의 공공교통 환경이나, 먹고 사는 것을 빌미 삼아 이 죄를 정당화할 생각은 없고..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서라도 죄과를 매꾸어 나가야 할텐데.
그래도
빨간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