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공항으로 돌아갈 버스를 예약해야 하려면 9시 미팅에 와야 한다고 해서 일찍 일어났다. 아침을 천천히 먹고 가려면 7시엔 일어나야 했다. 그럼 밴쿠버 시간으로 4시. 나이가 드니 시차 적응이 점점 힘들구나.
조식 뷔페는 말 그대로 호텔 조식 뷔페.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전망 좋은 창가에 앉을 수 있다는 점 정도, 그리고 원하는 토핑으로 즉석 오믈렛을 먹을 수 있다는 점 정도. 아내와 ‘과연 조식 뷔페에도 팁을 줘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의를 하면서 식사를 한다. 북미에서 생활한지 이제 14년이 되어 가는데도 팁 문제는 항상 새롭다. 어제 공항에서 오는 버스에서는 2불을 팁으로 남겼고, 저녁 뷔페에서도 2불을 남겼다. 방 정리 서비스를 위해 2불을 남겼고, 풀장 버틀러 / 웨이트리스에게 주문할 때마다 1불 씩을 준다. 그럼 조식뷔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정말 진지한 자세로 서로 고민을 하는 와중에 커피가 비었지만 채워주지도 않아서 결국 그냥 1불을 남기기로 했다.
어제 너무 밤늦게 도착해서 뭔가 제대로 세팅이 안된지라 아침부터 컨시어지를 계속 괴롭혔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어디서 예약해야 하는지 (메인 로비 Sunwing-Nexus tour 사무소에서), 방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날씨가 추워서 망고 나무에서 냄새가 난단다), 그리고 돌아가는 날까지 저녁식사 예약도 하고..
이러저러한 잡무를 마치고 나니 이미 열시가 넘어간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빗방울이 흩뿌리는 정도. 컨시어지는 노상 손을 부벼 가며 추워 하고, 해변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도 날이 너무 추운지 수건으로 동여매고 일하고 있다. 아마 기온이 20도 내외 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추운적이 없다 한다. 뭐 나한텐.. 최적의 기후조건이었지만.. 그래도 좀 더 따뜻하게 챙겨 입고 해변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하하하 이곳은 진정 캐러비안 베이였다. 원래 날이 조금 흐릴 수록 하늘이 더 예쁘게 보인다. 그 하늘 빛을 담아내는 바닷물 역시 더 예쁘다. 파도도 제법 거센지 발 아래 모래들이 아몬드 가루처럼 부서진다. 현지인들은 춥다고 난리인데, 관광객들은 벌써 바닷물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밀려오는 파도에 잠깐 발을 담가본다. 이 시기의 카리브해는 제법 따뜻하다.
한번 쭉 둘러보고 난 후 본격적으로 나설려고 방으로 돌아와 수영복으로 갈아 입었다. 날이 그리 덥지 않은지라 상의도 걸쳤고, 구명조끼로 보이는 패딩도 입고 나섰다. 그리고 비치타월을 빌리기 위해 컨시어지한테 갔다가, 플래티넘 라운지 옆에 있는 풀장을 발견한다. 풀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커튼을 두른 오두막에 더블 사이즈 침대들이 늘어서 있고 다른 쪽으로는 썬베드들이 있는 것이 … 아.. 우리가 휴가 왔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해서 냉큼 자리를 잡고는 다이키리와 피나콜라다를 주문했다. 푸른 풀장을 바라 보며 침대에 누워 칵테일를 마시고 있자니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와이파이가 잘 되는지라, 회사에서 온 단체메일은 여전히 받고 있고, 바로 전까지, 일정 정리를 하느라 머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왠지 참.. 한가하구나..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걸까..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그런 이질감이었던 것 같다. 이질감은 이질감이고.. 뭐. 술은 술이다. 웨이트리스 Alicia가 지나가자 드라이 마티니를 하나 더 주문한다. 오.. 제법 괜찮네. 다른 칵테일들은 코코넛 오일이 너무 많이 들어가 못먹겠던데.
조금 알딸딸해지자 속을 좀 채워야겠다 싶어서 점심을 먹으러 간다. 플래티넘 사이드 뷔페 식당은 방금까지 누워 있던 풀장 바로 건너편. 여기서 보통 점심식사는 해변의 BBQ나 타코로 때워서 그런건지, 뷔페 식당은 텅 비어있다. 자신을 Omar라고 소개하는 직원 한명이 와서 환대 하며 자리를 잡아준다. 알고보니 메뉴판이 있는 식사 주문도 가능한 듯 (A la carte 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근데 느닷없이 무슨 술을 마실 건지 물어본다. 아내는 그동안 기대했던 모히토를, 나는 진토닉을 주문했는데, Omar가 데킬라도 한잔씩 하라고 강추한다. 몇 해 전, 마왕이 떠났을때, 아내나 나나 데킬라를 며칠씩 마시고 속을 버려 한동안 위산역류로 고생한 적이 있어서 왠지 겁이 났지만, 그래도 본고장 데킬라라니 호기심이 생긴다. 일단 스트레이트 샷으로 한잔씩 하고 나서, 나초칩과 다른 칵테일을 마시고 있자니 주문했던 Grilled Bass와 Calamari가 나왔다.
세상에… 아무 소스가 없네 그려. 타지키 소스가 없는 칼라마리는 처음이다. 원래 멕시코에선 그릴이나 튀김요리를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먹는 건가? 그럴지도. 아니면 주방이나 서버가 실수 한 걸지도 모르겠다. 소스 없이 먹어도 간이 간간해서 그리 먹기 힘들지 않아서 그랬는지 뷔페 코너에 가서 소스를 가져다 먹는 귀찮은 짓을 한다거나, 서버를 불러서 소스를 가져다 달라고 하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술을 마실 만큼 마신 것 같았는데, 서버가 올 때마다 술을 더 마셔보라고 추천을 해서, 무서워서 소스 달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음식은 그저 그랬지만, 아주 꼼꼼(?)한 서비스 때문에 5불을 남기고 나왔다.
기분이 좋아져서 당장 방으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었지만, 배가 너무 불러서 일단 조금 걸어야 겠다 싶었다. 마침 날도 개었고, 해변가를 다시 향해 본다. 하하하 사람들이 참 즐거워 하는구나. 이럴 때면 참 인생 뭐 있는가 싶다. 사실 맘만 먹으면 따뜻한 고장에서 간단하게 입고 해변에서 물놀이만 하고 살면서 즐거워 할 수도 있을텐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간 이렇게 살려고 358일 동안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가족들도 못 만나면서 그렇게 산다.
해변을 쭉 한 바퀴 돈 다음, 이번엔 리조트를 크게 한바퀴 돌았다. 수영장 옆에 타코 키오스크를 보고 내일 점심을 저걸 먹어보자고 다짐한다. 풀장 안에 있는 바를 보고 깔깔 웃는다. 술을 마시면 풀장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일 텐데, 여기선 아예 풀장 안에서 바를 차려놓고 술을 멕인다. 여긴 멕시코. 아침에 저녁 식사 식당 예약을 위해 컨시어지와 얘기하는 도중에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응급상황이라고 훌쩍 가버린다. 스페인어가 어느정도 되는 아내의 말로는 어느 객실의 숙박객이 밤새 토했단다. 그게 술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암튼 여긴 멕시코. 메인 빌딩에 있는 아이스크림 바에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하나 집는다. 왠지 모르겠지만 진한 코코넛 향이 올라온다.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에 말이다. 여긴 멕시코. 본관 아래를 지나다 보니 Gym이 보인다. 역시나 텅 비었다. 하긴 술, 음식을 공짜로 주는 올인클루시브에 와서 누가 몸 관리에 신경을 쓰고 싶을까. 반대편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문을 잡아 준다. Oh, Thank you 하면서 갔더니, 허걱.. 같이 zumba 클라스를 듣자고 한다. 앞에는 잘생긴 라티노 줌바 강사가 엉덩이를 휘두르며 come on, guys 하면서 독려한다. 거기에 홀딱 넘어간 아내를 끌고 도망치다시피 빠져 나온다. 여긴 멕시코, 여긴 멕시코.
이 리조트만 그런 건지, 아니면 이런 종류의 리조트가 다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리조트 마케팅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 중에 야생동물들이 있다. 고양이들은 모두 접종 증명 태그를 달고 다니니 야생동물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도마뱀, 악어, Spider Monkey, 거북이 등등이 있단다. 그중 압도적으로 많은 동물은 여기서 처음 본 Coati 로 라쿤과 들쥐 중간 정도로 생겼는데, 중남미에만 산다는 이 동물이 리조트 전체에 쫙 깔려있어서, 땅에 떨어진 과일이나 쓰레기 통을 뒤지면서 살고 있다. 또 식당의 야외 테이블이나 선베드에 있다보면 슬그머니 찾아와 먹을 걸 구걸하는 손님도 있는데 바로 고양이다. 야생동물이야 먹이를 줘선 안된다고 하지만… 이미 이렇게 사람 손을 타 버린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줘야 되는 건지 갈등이 생긴다.. 뭐 한 끼 굶는다고 죽진 않겠지.
어느 정도 걷고 나니, 이젠 이대로 누워도 몸뚱이가 욕을 하진 않겠구나 싶었다. 오늘 저녁 예약은 6시 45분 스테이크 하우스.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았다. 숙소로 돌아와 글을 정리하다보니 스르르 잠이 든다. 좋구나. 먹고 싶을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천국이 따로 없다.. 싶었는데, 눈 한번 감았다가 뜨니 저녁시간이 되어 버렸다. 이곳 저녁식당은 나름 갖춰 입고 가야한단다. 남성은 수영복이나 반바지, 샌들이 안된단다. 간단하게 차려 입고 나섰다. 식당 위치는 역시 바로 코 앞에. 아침 점심은 뷔페를 했던 곳이 저녁엔 그릴 요리를 제공한다. 아내는 연어를, 나는 Rib eye를 Medium rare로 주문했는데 실패였다. 립아이는 워낙 지방 섬유가 많고 기름기도 높은 부위인데, 여간 요리를 잘해서는 medium-rare로 먹기 힘든 고기였던 것이다. 좀 더 익혀 먹거나, 굳이 medium rare를 원한다면 T-bone으로 시켰어야 했다. 가까스로 설익은 기름 부위를 걷어내고 나니 고기가 거의 반쪽이 되었다. ㅋ
저녁엔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 반바지 샌들 차림의 남성도 물론 있다. 굳이 내쫒지는 않는 것 같다. 암튼 바쁘다 보니 서비스 퀄리티가 떨어진다… 싶었는데, 우리 테이블 서버가 옆 테이블 백인 가족들에겐 무척 친절해 보인다. 기분이 좀 상했다. 아시안들이 대개 팁을 적게 주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가? 그렇다고 이렇게 눈에 띄게 차별을 하면 오늘도 팁을 많이 받겠니? 나 역시 고객 서비스 업종에 오랜 기간 일했고, 부끄럽게도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차별을 하면 과연 누구 손해일지 모르는지. 예를들어 흑인이 싫다고해서 흑인들한테 물건을 안 팔겠다고 하면 과연 요즘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나? 식사를 마치고 술을 한 잔 더 하려고 텅 빈 잔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서버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 케바케고 사바사이겠지. Wrong person한테 걸린 것 뿐이다. 플래티넘 라운지에서 마시기로 하고 최소한의 팁만 남기고 일어났다..
풀장의 푸르스름한 불빛과 옆에 딱 붙어서 구걸하는 고양이와 함께 마티니와 블랙러시안을 마신다. 애초에 이 리조트를 정했던 건 그냥 충동적이었다. 유난히 올겨울 밴쿠버가 눈이 많이 오고 추워서 좀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유난히 최근 미대륙 서부와 동남아시아 지역(불의 고리)에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 태평양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쿠바랑 멕시코 중에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동네 여행사 직원 말이 이 리조트가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그 얘길 듣고는 두말없이 계약했다. 항상 그렇듯, 사고를 먼저 치고 나서 조사를 한다. 인터넷을 둘러보니 그닥 평이 나쁘지 않다. 물론 절대 오성급호텔은 아니라는 악평도 있지만(그리고 그 말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성비가 높은 것에는 대개 찬성을 하는 분위기. 근데 하나같이 하는 말이 몇백불 더 주더라도 반드시 플래티넘으로 예약하라는 것, 혹은 다음 번에 또 가게 되면 반드시 플래티넘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얼른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숙소를 업그레이드 했고 다행히 몇 개 안남은 플래티넘 옵션을 잡을 수 있었다. 뭐 대단히 차별적인 특혜를 기대한 건 아니었고, 기왕 돈내고 미대륙을 횡단해서 온 건데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검은 고양이 둘이 줄기차게 따라온다. 우리방 침대에서 자고 말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미안하지만… 안녕..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왠지 자쿠지가 눈에 띈다. ㅎㅎ 간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좀 담가야 겠다. 아.. 왜 때밀이 수건을 안 가지고 온 걸까. 여행 필수템, 때밀이수건.
욕조에 몸을 담근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술기운이 확 오르는 걸 느낀다. 어릴 적엔 술이 제법 세다는 얘길 듣곤 했는데, 사실 그건 혈액 순환이 남들보다 안 되었던 것 뿐이었다. 에구구구. 얼른 일어나 몸을 헹구고 나서 침대에 몸을 눕힌다. 정말 입도 뻥긋 하기 싫다라는 게 이런 거다. 그냥 누워서 심장 박동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고만 싶다.
이렇게 이튿날도 지나간다.
바깥 양반이 스페인어가 되신다고요?
우와, 재주 많은 분인 건 익히 알았지만 또 한 번 존경스럽네요.
ㅎㅎ 저야 전혀 못알아들으니.. A씨가 그렇다하면 그냥 그런갑다 하는 거죠. 진실은 저도 잘 몰라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