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내와 얘기를 나누던 도중 서로에게 다짐하던 게 있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지 말자고…
사실 고백하자면, 항상 내 코가 석 자라는 이유로 타인의 삶에 그리 많은 관심을 둔 적이 없었거든요. 당연히 누군가를 불쌍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그런 것 자체에 도덕적 위화감을 가져서 그런 게 절대 아니었고요, 단지 그런 생각을 가지는 순간 당장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를 덮친 팬데믹 때문에,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소식을 접하다 보니까, 왠지 우쭐해졌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정말 완전 운빨 덕택에 직장도 계속 다닐 수 있었고, 건강하게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했고요. 쥐뿔도 가진 것 없이, 뭐 하나 잘한 일 없이 사는데도 이런 행운을 얻게 되고 보니, 제가 당장 뭐라도 된 것 마냥 다른 사람들 사는 걱정을 하게 되더군요. 예나 제나 개털인 건 여전한데.. 그러다 보니, 커피 한 봉지를 사 마셔도 동네 소규모 로스터리를 돕고, 외식을 하더라도 동네 식당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제가 뭐라고 말이죠.
2019년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박복한 팔자를 타고난 여인 ‘동백’, 6살 때 엄마한테 버려져서 고아원에서 자라고, 스물두 살부터는 남친과 헤어진 채 미혼모로서의 삶. 이일 저일 전전하다가, 지방 소도시에서 술집을 차리면서 자리를 잡게 되자, 이젠 동네 사람들로부터 술집 여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손가락질당하고.. 이후엔 치매 걸려 돌아온 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까지.. 이제는 자신의 팔자에 익숙해진 나머지, 좋은 일이 생기면 오히려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 앞에 ‘황용식’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얘기하죠.
“동백씨, 약한 척하지 말아요. 고아에다 미혼모인 동백씨.. 모르는 놈들이 보면 동백씨 박복하다고 쉽게 떠들고 다닐지 몰라두요. 까놓고 얘기해서 동백씨 억세게 운 좋은 거 아녀요? 고아에다,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님까지 됐어요. 남 탓 안 하고요, 치사하게 안 살구.. 그 와중에 남보다 더 착하고 착실하게 그렇게 살아내는 거, 그거 다들 우러러보고 박수 쳐줘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동정’과 ‘연민’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가지는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 역시 인간이 선해지기 위해 천부적으로 가지는 네 가지 단서 중 하나로 ‘측은지심 (惻隱之心)’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타인을 동정할 때, 과연 상대에 대한 우월감을 배제한 채 해낼 수 있을까요?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연민 상대의 처지가 어떤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잘 알아볼 생각을 했을까요?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홈쇼핑 충동구매를 하듯이 후원단체에 돈을 보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제가 가졌던 연민이라는 것이, 단지 아주 미약한 우연에 의해서 저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게 된 기쁨이 아니었는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평생을 계급 사다리의 바닥에서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 있었으면서 말이죠. 결국 “차라리 인간 대 인간으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밥그릇 싸움을 하자. 차라리 내가 이기적인 인간이 되는 게 상대의 인간적 존엄을 지켜주는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죠. 어쩌면, 소수인종으로서 백인 주류 사회인 캐나다에 살면서 가지고 있었던 묘한 피해 의식 때문에 더 까칠하게 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왠지 “역시 아시안들은 영어를 못 하고 순종적이야..”라는 편견을 만들 것 같았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영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2019)
제작 / 배급 : Sixteen Films, Why Not Production, Wild Bunch
감독 : 켄 로치
각본 : 폴 레버티
주연 : 크리스 히친, 데비 허니우드, 라이스 맥고원
산다는 건 참 피곤한 일입니다
아마 10대~20대 초반에 도파민의 힘으로 아무 생각 없이 세상에 불만을 터뜨릴 때 빼고는, 사는 거 자체가 내내 힘든 것 같아요. 특히 부양가족이 늘어날수록, 자기 원칙과 소신을 찌그러뜨려야 하는 순간이 많아집니다. 자기 한 몸과, 또 같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타인의 존엄을 지키고 사는 것도 이미 장난 아닌데, 여기에 아이들까지 키워내는 건 정말 새로운 차원인 것이죠.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해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슈퍼맨 슈퍼우먼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국가 입장에서 보면 이 말썽꾸러기 아이들은 미래의 납세자가 되어 국방과 복지 등에 필요한 세수를 담당하는 일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줫같은 인생을 견디라고 양육비용도 지원하고, Family Emergency라는 명목하에 (개인의 병가처럼) 급하게 쉴 수 있는 휴일을 제공합니다 (연가에 포함되기도 하고, 별도 병가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국가나 기업주들이 선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런 기초적인 복지구조가 노동의 효율을 높이고, 미래의 세수를 높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몇몇 근시안적인 기업, 당장의 당기수익만을 바라보는 기업 입장에서는, 이런 각종 복지구조 때문에 당장 벌 수 있는 돈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소득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저소득 노동자들의 노동시장 이탈이 많아지니까, 이때다 싶어서 플랫폼 노동 시스템을 광범위하게 확장하게 됩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과 계약해서 일을 하지만, 사실 이들은 개인사업자나 하청업자 자격으로 기업과 계약하는 거죠. 당연히 일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 (자재, 기기, 관리, 내 안전, 타인 안전, 가족 안전)은 온당히 본인 몫이 됩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로만 보면 일반 최저임금 알바를 뛰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받겠지만, 이런 모든 비용이 담겨 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헐값에 자신을 팔아넘기는 상황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에서 그려지는 택배 노동자, ‘리키 (Ricky)’의 삶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는 자신들의 삶. 게다가 말 안 듣고 막 나가는 아이. 제대로 된 저택에서 중산층의 삶을 살 줄 알았건만 월세 아파트 생활을 전전해야 하는 건 2008년 미국발 세계적인 금융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금융위기가 어째서 발생했는지에 대해선 궁금해하지 않죠. 굳이 영화에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이들의 가난은 이들에겐 마치 천재지변처럼 받아들여지는 거죠.
그렇다고 해도, 이들, 저소득 가정의 노동자들은 아내와 싸우고, 삐뚤어진 자식들과 싸우고, 그 자식이 사고 친 학교와 싸우고, 그럴 권리가 없는 건가요? 막말로 일하다가 강도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가도, 자신의 건강과 가족을 먼저 걱정해야 할 권리가 없는 건가요?
저 역시, 어릴 적부터 ‘프리랜서’라는 단어를 선망했던 터라, 자신의 능력만큼 인정받고, 일한 만큼 벌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노동환경을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출장수리 순돌이 아빠 직업이 저에겐 아주 천직이라고 생각했었죠. 조금만 더 성실하게, 조금만 더 꼼꼼하게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회사로부터 금방 인정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쉬고 싶을 때 언제든지 쉴 수 있을 거라는 건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먼저, 회사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회사가 한가할 때 쉬고, 바쁠 때는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는 사람을 좋아하겠죠. 아무리 고객 만족도가 높고 능률이 높은 작업으로 회사에 높은 수익을 준다고 하더라도, 회사에서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없는 직원을 좋아하는 일은 없더라고요. 그 직원의 개인 사정이 어떻든 말이죠.
영화 ‘기생충’에서, 수해를 입어 가족 전체가 오갈 곳이 없어진 기택에게 박사장은 자기 가족 행사 때문에 주말 특근을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박사장 입장에서는 그거 싫으면 거부하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거부발언은 직장을 잃을 각오를 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연회 도중, 기택에게 감정이 상한 박사장이 말합니다.
“김기사님. 어차피 오늘 근무이신거죠? 이게.” “그냥 이게 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시고, 에?”
아.. 정말 전,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이후 사건에서 기택의 행동이 다 이해가 가더라구요. 캐나다의 트레이드 (Trade, 기능직) 노조 역시, 무늬만 노조지 실제적으로는 무슨 파견 인력 사무소 같은 일만 해서, 그냥 적정선에서 임금협상만 할 뿐, 노동자들의 권익에 관심이 없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몸이 아프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혹은 휴가를 가기 위해서 회사를 쉬면, 사실 생활이 어렵기도 합니다. 휴가비용과 각종 보험이 포함되어 있는 급여는 처음에 보기에는 제법 괜찮은 금액으로 보이지만, 그건 딱 내 삼시세끼 걱정만 하면 되는 나이 때까지인 것 같아요. 어느 정도 나이들고 나면, 하루하루 그냥 쉽게 지나가는 일이 너무 드물거든요. 내가 아프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무슨 사고가 난다든지 하는 일이 정말 줄기차게 쏟아지는데, 이 모든 일에 대한 보험이 내 수입에서 빠져나가게 되기 때문에, 정말이지 쉬고 싶으면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캐나다 택배 시스템도 배달 사고가 잦습니다. 한국에서처럼 배달된 음식에서 닭다리가 몇 개 빼먹되는 일은 아직 못 봤지만, 배송품을 그냥 공용공간에 던져두고 간다든지, 물품이 파손된 상태로 배송된다든지 하는 일은 저에게도 종종 있어왔고요. 이럴 때마다 그냥 넘어가면, 왠지 내 권리를 내가 포기하는 것 같아서 시끄럽게 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원래 소신처럼 ‘인간 대 인간의 밥그릇 싸움’이 되기엔, 현 사회의 노동환경은 이미 너무나 양극화되어있다는 거죠. 플랫폼 노동자들처럼, 기본적인 노동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천정부지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컴플레인하고 저랑 쌈박질하는 그 순간 때문에, 그들의 가정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물론, 이 비인간적인 플랫폼 노동 시스템 자체를 없애야 하는 건 맞는 말이겠죠. 그래도 당장, 내가 그걸 없애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플랫폼 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그게 연대가 되었든, 동정이 되었든, 그것이 단지 굴절된 자뻑을 느끼기 위한 것이라도 말이죠.
플랫폼 노동자 개인을 향해서 동정이나 시혜를 베풀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파견직이나 계약직 노동자들도 (현실은 어찌 되었든 최소한 서류상에서만큼은) 근로 계약을 통해 최소한의 복지혜택을 받는 데에 비해서, 그걸 전부 개인 부담으로 떠안아야 하는 폴랫폼 노동은 (그들의 이번 달 월 수익이 얼마가 되든 간에), 지금 시점에서 봤을 때는 노동 환경의 하한선일 텐데요. 이 하한선을 사회안전망 속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고용계약도 언제든지 사회 안전망 밖으로 내쳐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지금 겪고 있는 일은 개인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사회 구조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나에게도 닥쳐 올 수 있다.”라는 가정이야 말로 연대 행위의 단초가 아닐까요? 웹툰 ‘송곳’에서 ‘구고신’이 말했던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켜내는 일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서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일”은, 이런 공감대가 없어서는 오래 버틸 수 없게 되겠죠.
나의, 그 잘난, 의도가 어쨌든 간에, “연대”라는 건 종종 그 결과로서만 제 기능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