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레가시

기억은 파편적으로 저장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억해낸다는 것은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기억의 작은 조각조각들을 모은 다음, 전후 상황에 맞게 추정해내는 작업을 거칩니다.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은 것은, 단지 암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파편화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추리능력 역시 뛰어나서 그럴 것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특히 그렇죠. 그곳이 어딘지 구체적인 정보는 없지만, 어딘가 아련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계실 겁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항상 엄마 냄새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왠지 구수한 살 냄새 같은 거 말이죠. 그리고, 같이 동네 시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얻어먹었던 핫도그가 생각납니다. 욕심이 많았던 전 꼭 양손에 하나씩 들고 먹었는데, 자칫 튀김옷이나 소시지를 떨어뜨릴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 같이 어딘가에 놀러 갔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7~80년대 휴가철 가족여행이라면 보통 친척집 방문일 것입니다. 그곳이 도시였는지 시골마을이었는지는, 아니면 어디 무슨 입장료가 비싼 유원지였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전혀 기억이 안 나고, 단지 사촌형제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같이 뛰어놀았던 건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개다리 춤도 추고, 조립식 장난감도 맞추고, 만화책도 돌려보고 하면서 말이죠. 예전에 개그맨 이경규 씨가 방송에서 “애들 어릴 때 좋은 데 데리고 가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우리 예림이, 5살 때 이전에 간 곳은 하나도 기억을 못 해!” 라는 말을 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장소는 기억 못해도 그 당시 행복했던 기억은 남거든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엔, 어릴 시절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에는 항상 ‘영화’가 있었습니다. <슈퍼맨>이 처음 개봉했을 때, 광화문 국제극장 건물을 몇 바퀴나 뺑글뺑글 돌면서 줄을 섰더랬죠 (당시엔 예매 시스템이 없었거든요). 줄 서서 기다리다가 너무 지쳐 아버지께 업혀서 잤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나죠. 아.. 그리고, 당시엔 영화가 개봉을 하면, 영화 관련 머천다이즈들을 극장에서 만들어 팔고는 했었는데 (물론 저작권 개념은 없었을 겁니다), 슈퍼맨 직소퍼즐을 선착순으로 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스타워즈>도 마찬가지로 영화 내용 기억은 없네요. 종로 피카디리 극장을 또 뺑글뺑글 돌며 줄을 섰고, 극장 앞에 R2D2와 C3PO 핀업 스탠드가 서있었어요.

결코 넉넉한 형편의 가정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이렇게 영화를 보러 가족 나들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주도해서 극장 관람을 했지만, 나중에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누나 손에 이끌려 대한극장에 일 년에 한 번씩은 갔던 것 같아요. 그땐 주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마지막 황제>와 같은 오스카 수상작들을 봤었죠. 어머닌 극장에서 나오면서 저에게 “니 누나가 보여주는 영화는 하나도 재미가 없더라..”며 속닥이셨습니다.

또, 전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또는 혼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는 것도 쉽게 허락을 받았었죠. 제가 자란 경기도 A시에는 규모에 비해 개봉관, 재개봉관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게 종합촬영소가 있었고, 예술 고등학교가 있어서 그랬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국민학교 때 싸움이 붙었는데, 바로 전날 극장에서 보고 온 성룡의 ‘취권’으로 싸움을 하다가 형편없이 얻어맞은 적도 있었죠. 그 자식도 그 영화를 봤었더라면 맞장구를 쳐줬을 텐데…  아무튼 전, 그때만 해도 모든 아이들이 다 극장에 다니면서 자라는 줄 알았어요. 제가 다녔던 극장에는 스크린 오른편에 시계가 붙어있었는데, 영화를 재밌게 보면서도 이 행복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게 너무 야속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자식들이 다 머리가 굵어지고, 지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지들이 알아서 볼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이서 같이 극장에 다니곤 하셨어요. 대학시절에는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빴는지, 그리고 무슨 일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집에는 거의 안 들어가고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었는데요, 가끔 집에 갈 일이 있으면, 아버진 무뚝뚝한 목소리로 영화 추천을 하곤 하셨습니다. “오랜만이다. <인디아나 존스> 재밌더라. 니 엄마랑 배꼽을 잡았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비단 극장뿐 아니라, 가족과 함께 보냈던 즐거운 기억은 집에서도 있습니다. 예전엔 공중파 방송사에서 주말마다 경쟁적으로 영화를 방영해줬거든요. 방송사 입장에서는 방영 판권료 문제도 있을 테니 매일 영화를 방영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매일 TV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건 나중에 영화 전문 유선방송 채널이 생기고 나서야 가능해졌죠.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방송사에서 일주일간 공들여 준비해서 방영하는 작품들의 수준은 제법 괜찮았습니다. 우디 앨런의 <애니홀>은 더빙이 아니고서는 살릴 수 없는, 그런 티키타카를 찰떡같이 재현해냈고,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이 방영될 때는, 화려한 영화 삽입곡 정보를 자막으로 다 넣어주기도 했죠.

아내는 어릴 적부터 9시가 되면 잠자리에 드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적어도 저희 집에서는 영화를 해주는 주말만큼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었죠.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본 영화들이, <베라크루즈>, <강 건너 텍사스>, <진홍의 도적>, <7인의 신부>, <사운드 오브 뮤직>, <튜니티 시리즈>, 그리고 <공포의 보수>와 같은 이브 몽땅이 주연했던 유럽 영화, 버트 랭커스터, 게리 쿠퍼가 주연했던 서부영화 및 2차 대전 영화 들이었어요. 이후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이 영화들이 언급되었을 때, 다른 동세대 영화광들이 기억도 못하던 이 영화들을 모두 꿰뚫는 재미란 남다른 것이었네요. 그중에서도 아버지께서 남달리 애착을 보이던 영화는 바로 <로마의 휴일>, <사운드 오브 뮤직>과 <벤허>, <쿼바디스>였습니다.

요즘은, 팬데믹 동안 집에 갇혀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비디오 게임기를 사 오는 아빠들이 많이 늘었다고 하는데, 아버진 제가 고3이 되자 저를 위해 EBS 방송과외를 녹화한다는 명목으로 VCR를 장만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후, 동네 비디오 가게에 뒷돈을 주시곤 VHS 테이프 두 장 짜리 <벤허> 불법 복제품을 만들어오셨더라구요. 그게 제 수험공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때부터 저희 집에는 비디오테이프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TV 방영 영화나 다큐, 드라마를 녹화한 것인지만, 몇몇 흘러간 명작들이 비디오로 출시가 될 때면, 그 작품을 불법 복제해서 책꽂이에 모셔두기도 했었죠.

집에 비디오테이프가 쌓여가는 동안, 전 저 나름대로 학교 앞 동시상영관 붙박이가 되어있었죠. 학기 초에 수강신청을 할 때에는 보통 수업시간을 다닥다닥 몰아 붙여서 중간에 비는 시간이 없도록 했는데, 저는 일부러 중간에 3시간 정도를 비워두곤 했어요. 오전 수업을 듣고는 학교 앞 크라운 베이커리에서 마늘 빵 하나를 사서는, 동시상영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면서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큰 민폐였네요. 죄송합니다). ‘이훈’ 감독의 괴작 <마스카라>와 같은 영화를 우연히 발견한 것도 동시상영관의 축복이었습니다. 영화에 출연한 젊은 시절 ‘박찬욱’ 감독이나 ‘곽재용’ 감독의 모습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동물원’의 노래에서 나오는 것처럼 ‘화면엔 비가 내리고 가끔씩 구름도 꼈었지’만, 극장 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은 너무 행복했었어요. 누구도 내 영역과 내 시간을 침범할 수 없을 것만 같았고요.

영화판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가끔씩 저 만의 극장이 생기는 꿈을 자다가 꾸곤 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A시의 ‘화단극장’처럼, 주홍색 카펫으로 된 복도와 계단이 있고, 뒤로 접히는 빨간 비닐 재질의 시트가 있었죠. 그 극장에 걸어 들어가고 의자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꿈을 무지하게 많이도 꿨어요. 그래서인지, 결혼을 하고 10주년이 되면서 아내로부터 ‘홈시네마 프로젝터’를 선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더라구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꿈을 이룬 것만 같았고, 마치, <파 엔드 어웨이>에서 자기 땅에 깃발을 꽂던 톰 크루즈가 된 것 같더군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나서 처음 상영했던 영화는, 그동안 살면서 꼭 한 번은 대형 화면으로 보고 싶었던 영화 <대부>였습니다.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의 숨 막히는 연기를 큰 화면으로 보고 있자니, <우진필름>의 정진우 씨가 처음 ‘시네하우스’를 개관하고 <찰리 채플린> 영화제를 개최했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구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여기 앉아서 큰 화면과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으로 <로마의 휴일>과 <벤허>를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비슷한 얘기를 들어본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아버지께서 가지고 있는 영화 감상에 대한 미신 중 하나는, 진정으로 좋은 영화는 평생 단 한 번만 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당신께선 <벤허> 비디오 테이프를 모시고 살았지만). 이는 마치, 자기 생애 100퍼센트의 연인을 만나면 단 한 번에 그걸 알아봐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주문이었지만, 대학교 영화 서클에 들어서 가치관이 바뀌기 전까지 저는, 정말로 좋은 영화는 단 한 번만 보고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았었어요. 왠지 내 인생 최고 명작을 두 번 보게 되면 흠결을 찾을 것 같았거든요. <백 투 더 퓨처>가 그랬고, <다이하드>가 그랬어요. 그 오래전 영화들… <웨스트 월드>와 <사운드 오브 뮤직>도 그랬고요. 하지만… “아.. 딴 게 볼 게 없어서 …. 이 놈의 시키들은 명절만 되면 같은 영화를 틀고 또 틀고..”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불평이, 그때까지는 좋아하는 영화를 또 보고 싶은 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죠.

캐나다의 지상파 방송국도 한국과 다른 것이 없어서, 성탄절이 되면 했던 영화를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반복 방영을 해주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해주길래, 이미 여러 번을 본 영화지만 영어 청취 능력 향상을 위해서 한번 더 보기로 했었죠. 폰트랩 대령 일가와 수녀 가정교사 마리아, 여전히 신파적인 사랑놀음이고, 여전히 상투적인 삼각관계를 다룬 이야기인 건 틀림없는데요, 하지만, 그런 헐리우드 뮤지컬이 가지는 관습과 기호들이 최근 <라라랜드>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걸 보면, 과히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럽 귀족 사회의 규율과 질서에 중심을 두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인 가족의 문화가, 마리아라는 수녀를 통해서 자유주의로 변모하는 과정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마치, 청교도의 엄격한 규율 문화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존중하는 60년대 미국 문화로 전이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 같았어요. 조국을 배신하는 폰트랩 대령의 결심은, 사실 그보다 더 숭고한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함이었던 거죠.

폰트랩 대령이 해외 도피를 하기 직전, 노래 경연에서 에델바이스를 부르던 중 목이 메어 노래를 못 잇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어릴 적에는 그 장면을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저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을 등지기로 결심했지만, 막상 영주권을 받았을 때는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먼저였거든요. 친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30년간의 제 추억들과 결별한다는 얘기였으니까요.

큰 딸 리즐이 남자 친구와 한 밤 중에 부르는 연가 ‘Sixteen Going on Seventeen’과 함께, 파티에서 아이들이 함께 부르는 ‘So Long, Farewell’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 영화에서 아버지께서 정말 감명받았던 장면은 이 취침 인사 장면이 아니었나 생각까지 들더군요. ‘오늘 밤 늦게까지 놀고 싶어요. 저 샴페인 한 잔 해도 될까요?’라고 하는 리즐의 소망은, 전쟁의 폐허를 겪은 후,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헌신해야만 했던 그 당시 모든 한국 기성세대의 소망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팬데믹 동안, (너무 철딱서니 없는 투정 일지 몰라도) 제가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극장에 못 가서였어요. 그래서 주정부의 방역조치가 완화되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간 곳도 극장이었습니다. 화면에 아무것도 안 나올 때에도 스크린에 빛이 꽂히기 전까지의 팽팽한 긴장감을 즐겼고, 그리고 심지어 광고가 상영하는 도중에도, 그 큰 화면과 짱짱한 사운드가 주는 안정감 같은 게 있었죠. 뭣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장면에서 웃고, 같은 장면에서 스릴을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이렇듯, 극장에 앉아있을 때 무척이나 행복감에 젖어드는 건, 어릴 적 가족 나들이가 행복했었다는 느낌이 몸에 남아서겠죠.

이역만리에 살면서 연락도 잘 못 드리고, 코로나 핑계로 임종도 못 지키게 되어 아버지께 너무 죄송할 뿐입니다. 제가 아직 영화를 보면서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건, 아버지가 영화 감상의 즐거움을 저에게 일찍부터 가르쳐 주셔서 그런 걸 테죠. 제가 조금이라도 더 재밌고 행복하게 삶을 살 수 있도록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계신 그곳에도 멋진 영화관이 있나요? 오드리 헵번과 존 웨인, 소피아 로렌은 만나셨나요? 만일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 단편영화 하나 찍어서 보내주세요. 아니면 나중에 제가 그곳에서 뵙게 되면, 근사한 영화관을 같이 만들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하시고 싶은 거 마음껏 하실 수 있는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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