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간에 연대는 당연한가?

파워 오브 독 (The Power of the dog, 2021)

제작 / 배급 : 넷플릭스

각본 / 연출 : 제인 캠피온

원작 : 토머스 새비지 ‘파워 오브 독 (The power of the dog)’

주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 커스틴 던스트

— 이 이후로 스포일러 많습니다 —

필모그래피 전체를 거쳐 여성 서사에 집중하고 있는 감독, 제인 캠피온은, 이번에도 가부장제 시스템에 종속되어 억압받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동시에 2명의 또 다른 소수자의 세계로 확장됩니다.

어릴 적에 친부의 자살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 소년, ‘피터’는 첫 등장에서부터 자신이 가진 여성성을 숨기지 않습니다. 영화 상에서 드러난 그의 모습이나 행동은 트랜스젠더인 것으로, 혹은 그렇게 성장하게 될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지만, 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장면은 나오지 않죠. 단지 꽃을 접는다든지, 식당 테이블 세팅을 돕는다든지, 성격이 유악한 면을 강조해서 보여준다든지해서 서부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상과 동떨어진 모습을 통해 그의 성적 정체성을 관객이 짐작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필’은 가부장 시스템이 공고한 1920년대, 목축업이 중심 산업인 미 서부 사회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며 살고 있는 남성 동성애자, 말하자면 게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강한 마초성을 드러냅니다. 필 역시, 남성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이나,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직접 커밍아웃하는 장면은 없고, 다른 남자들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목욕을 한다든지, ‘브롱코 헨리’의 손수건 냄새를 맡으며 휴식을 취한다든지 하는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이 리뷰는 심각한 오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필이 가지는 남성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 현대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오히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성인 남성 (에라스테스 Erastes)과 미소년 (에로메노스 Eromenos)이 가지는 ‘에로스가 포함된 사제 관계 (erotisch gefarbte Mentoschaft)’와 가깝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성인 남성이, 어린 소년의 멘토가 되어 그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함께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추앙했었는데, 영화 내내 ‘브롱코 헨리’를 추억하는 필의 모습에서 그런 관계였다는 것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 종반부에서 관 속에 누운 필의 모습을 보면, 어린 시절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었을지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브롱코 헨리’라는 정신적 스승이자 연인에게 물려받은 이 진정한 사랑을, 필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남성 동성애는, 핍박받는 성소수자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진리를 깨달은 (그래서 뒷산에서 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인 것이죠. 당연하게도,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그랬듯이, 여성은 그저 종족 번식이나 가정을 지키는 수단으로 인식됩니다. 동생 ‘조지’에게, 성욕 해결을 위해서라면 로즈와의 결혼이 아니라 다른 방법도 있다고 다그치는 장면은, 필의 여성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성장한 후에도 같은 방을 쓰고 살던 동생 ‘조지’가 ‘로즈’에게 연심을 가지고 심지어 결혼까지 하게 되자, 필은 큰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에게 친동생 조지는 (비록 산에서 개의 모습을 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브롱코 헨리와의 관계 중 일부를 대체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 필의 일방적인 연심이었던 거죠. 결국, 필의 질투심은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 비하와 고스란히 연결되어 로즈에 대한 집요한 공격으로 드러나죠. 피터의 여성성을 필이 조롱하고 심지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 역시 필,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기 위함인 한편, 여성성에 대한 심각한 멸시가 동반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듯, 전통적인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가 인디언의 침입으로 부터 목장을 지키듯이, 필은 로즈로 부터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피터에게 들키는 사건이 벌어지고, 또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산속의 개 모습을 피터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브롱코 헨리에게 받았던 사랑을 피터에게 전해주자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피터의 ‘에라스테스’가 되어, 그의 성장을 돕자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 타는 법, 밧줄을 만드는 법을 전수하게 됩니다. 피터가 자신의 ‘에로메노스’가 될 것이라는 필의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요? 아마도 1920년대 당시에는, 트랜스 젠더와 (여성 성 역할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의 구분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가 구분해서 식별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거든요. 90년대 서울 방송에서 1세대 트랜스 젠더 분이 소개되었을 때에도 게이로 소개되었다고 하죠.

피터의 복수극이 과연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필의 마초성은 승마나 목축업, 거침없는 거세 작업 등 카우보이로서의 출중한 능력치 덕분이었지, 그가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사람을 억압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꼿꼿하게 서있는 자세나 웃음기 없이 시종일관 굳어 있는 표정 만으로 카리스마를 세우며, 타인에 대한 독설이나 조롱으로 약자를 공격하는 동시에 패거리들에게 추앙을 받았지만, 그 약자를 상대로 한 물리적인 폭력을 쓴 적은 없죠 (애꿎은 동물학대는 있었지만…). 필의 입장에서는 개척시대 인디언보다 더 심각한 침입자인 ‘로즈’였었는데, 그녀를 상대로 독설을 퍼붓거나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줘 정신적 공황상태를 만든 것 만으로 독살을 당해 마땅한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법의 심판이나 교화 과정보다는 ‘사적제재’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필의 죽음과 피터의 복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로 받아들여집니다. 관객이 그 복수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은 감독의 연출이 그만큼 설득력 있었다는 뜻이겠죠.

필과 피터, 이 두 사람은 1920년대 당시에는 공통적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대표적인 소수자 그룹이었을 테지만, 이 비정한 영화는 결코 그들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없습니다. 집단 내에서 지독하게 비대칭적인 이들의 권력관계는 한쪽 사람이 일방적인 핍박을 받는 상태로 만듭니다. 영화 중반 이후, 필이 피터에게 연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 긴장관계가 해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게 만들지만, 필의 연심은 이천여 년 전 그리스에서나 행해질 법한 수직적인 관계였고, 피터에게 필은 여전히 자기 엄마를 괴롭히는 못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피터에 대한 필의 연심이 고대 그리스 사회의 동성애였다면, 필에 대한 피터의 복수극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극처럼 보입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리타임네스트라’나, 부친의 복수를 위해 ‘아가멤논’을 죽이기 위해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유혹한 ‘아이기스토스’의 모습이 피터에게 자연스럽게 중첩됩니다.


소수자 (Minority)라고 하면, 한 사회나 집단의 권력 구조, 혹은 주요 지배구조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대개, 자신의 신체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특징 때문에 그 집단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 경우가 많겠죠. 그리고, 이런 불리한 점, 차별이 명확히 인식되고, 그 차별이 그들의 특징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드러나는 순간, 단순 사회적 약자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변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수자들끼리의 연대는 당연한 것일까요? 고 노회찬 의원이 ‘일본과 한국이 평소에는 사이가 안 좋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했을 때는 힘을 모아 같이 싸워야 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요,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권력가, 재계, 언론, 관료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 소수자들끼리 같이 손을 잡고 공동 대오를 형성한다면, 그야 물론 최선의 상황인 것은 분명하겠죠. 하지만, 누굴 중심으로 단결하고, 단결을 위해 누가 어느 만큼 손해를 봐야 하는가에는 의문이 남을 겁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같은 소수자이더라도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있다면, 평등한 연대는 절대 있을 수 없겠죠. 이렇듯 소수자들 간의 연대는 무척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그게 당연한 거라고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몇 차례의 절차적 민주화를 거쳐서 성숙된 한국 시민 사회에서, 유난히 아직도 개개인의 행복 추구를 경시하고 단결만을 외치는 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실, 소수자들끼리도 대립하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연인과 지연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소수자 단체끼리도 사안에 대해 얼마든지 입장의 차이를 보일 수 있죠. 페미니즘의 한 갈래로서 최근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aminism)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경우겠네요. 이들은 남성의 몸으로 태어나서 여성의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 젠더 (MTF)들을 비하하거나, 그들 역시 여성에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 한국에서 트랜스 젠더 여성의 입학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어느 여대 학생들의 입장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몇 해전에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제 친구 H씨도, 자신을 향해 쏟아져 오는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에 분노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또 그들의 입장이 있을 테지만, 앞으로 살면서 겪을 불편함을 모두 감수하고 성전환의 용기를 낸 그로써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비난이었거든요.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지는 상호 비난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자신들이 겪어왔던 고난의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채, 자신들 만의 해방을 주장하는 운동은 (칼럼니스트 김규항 씨가 말했듯이) ‘어떤 절실한 사정을 담더라도 복수극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소수자들끼리의 대립이나 긴장을 ‘어차피 저들도 다 똑같아’ 하면서 차별에 반대하는 소수자 인권 운동을 그냥 추악한 밥그릇 싸움 정도로 빈정대거나, 유독 엄격한 도덕작 잣대를 적용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사실, 소수자들이 세계 평화나 사회 진보와 도덕 / 정의의 최선두에 서야 할 의무는 없죠. 자신들에 대한 편견과 불이익을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까요. 그런 소소한 불평과 싸움들이 쌓이다 보면 사회진보가 이루어질지도 모르지만, 그게 당연히 수반해야 하는 의무는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의 입장 차이나 이익관계로 인해 대립이 생기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죠..

어쩌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두고 그들끼리는 당연히 연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이나 기계적인 짝짓기일지도 모릅니다. 대개의 경우, 어떤 사회에서 성적 취향이나, 인종, 성별 때문에 치명적인 불리함을 겪어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일 테죠. 영화 <런던 프라이드 (Pride, 2014)> 에서 ‘마크’가 파업 쟁의 중인 광산 노조와 연대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게이 중 한 명이 자신이 나고 자랐던 동네의 광부들과 그 아이들이 자신을 얼마나 혹독하게 괴롭혔는지 얘기를 꺼내는 장면은, 단지 영화 속 에피소드가 아니라 바로 지금도 벌어지는 현실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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