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 시대 – 90년대 한국영화 이야기 #1

누가 뭐라 그래도 80년대 말, 90년대는 한국 영화사 전체에서도 두드러진 “영화광 (Cinephile 씨네필)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전부터 프랑스 문화원, 독일 문화원에서 해외 명화를 찾아다니면서 보던 세대들을 지나서, 90년대 초에는 <영화공간 1895>니 <영화사랑>이니 하는 ‘비디오떼끄’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세계적 명화들을 불법 복제한 후 VHS로 공개 상영했던 영화모임으로, 서유럽 공공기관에서 정식 필름으로 운영하는 ‘시네마떼끄’에 비유해서 ‘비디오떼끄’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가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영화광들이 모여 같이 영화를 보기도 하고 자신들의 해석을 붙여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로드쇼’, ‘스크린’과 같은 영화 잡지들이 인기를 모으고, ‘씨네21’도 95년에 발간을 시작했고요. 특히 ‘로드쇼’의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는 독특한 문체와 당시 서유럽 후기 구조주의 이론들을 소개하기도 해서 영화광들의 열광적인 신봉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누벨이마쥬>, <컬트무비>라는 (국적 없는) 단어를 유행시키기도 했죠.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중견감독과 제작 스테프들이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고 고백했었죠. 게다가 이분들의 활동기간도 그 이전에 비해서 월등하게 깁니다. 80년대 한국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감독 들이나, 그 이전 영상 세대인 이장호, 김호선 감독의 경우 대부분 10년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상업영화 현장에서 메가폰을 잡으셨지만 (박철수 감독님의 경우 작고하시기 직전까지 독립영화에서 활동하셨지만), 김지운 감독, 류승완 감독, 봉준호 감독, 최동훈 감독, 강제규 감독, 박찬욱 감독의 경우는 데뷔 이후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로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이제 좀 세대교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듭니다)

물론, 한국 영화 아카데미와 한국 영상원 등이 현재 한국영화 제작진들의 요람이 되어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해냈고, 또 80년대 한국영화 뉴웨이브를 이끌던 감독과 제작진들의 영화문법이 그다음 세대들에게 유전되어 전반적인 한국 영화의 질적 변화를 만들어 준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80년대 말, 90년대 초라는 시기에, 왜 영화광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는지는 우수한 영화교육 시스템과 개선된 도제 관계로는 설명하기 부족합니다. 

일단, 영화라는 상품의 특수성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이 상품의 가격 결정 시스템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죠. 30억 제작비의 영화나 200억 제작비의 영화 모두 동일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으니까요. 아마도 무한 복제가 가능한 영화매체의 특징 때문에 그럴 텐데, 영화라는 상품은 태초부터 제작자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각 나라 배급업자와 극장의 사정에 따라 가격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50억 불 제작비의 대작 헐리우드 영화가, 미국에서 상영할 때의 가격과, 일본에서 상영할 때 가격, 그리고 한국에서 상영할 때 가격이 모두 다 다를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때문에, 아무리 궁핍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극장만 있다면, 세계 최고 품질의 헐리우드 영화를 소비할 수 있었죠.

사실 70~80년대, 국가 경제 성장에 헌신하면서 살던 일반 노동자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여가 생활 중에, 극장 관람이라는 것이 그나마 가장 하기 쉬운 일이었거든요. 아니면 집에서 TV 앞에 누워 봉황기 중계를 본다든지 김일 레슬링, 혹은 박종팔 권투 중계를 보는 일이었는데, TV 시청은 뭐, 매일 오후에는 할 수 있었던 거였구요. 특별한 날 가족 서비스를 하고 싶은 가장들이 선택하기 가장 쉬운 게 극장 관람이었던 거죠. 독재정권이 국민을 우민화하기 위해서 3S (Screen, Sports, Sex)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있을 테고, 또 당시 수입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적대하는 내용이 많았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노동자 가족들이 영화 관람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가격 정책을 폈을 겁니다.  

한국 영화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고작 1%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든 작품을 가지고 대작 미국 영화와 같은 가격으로 경쟁을 해야 하니 무척 억울한 일이겠지만, 영화 관객의 입장에서는 완전 횡재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80년대에는 한국 중산층이라도 바나나 하나 사 먹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영화라는 상품만큼은, 머스탱을 몰고 출퇴근하는 미국 중산층과 한국 서민이 같은 걸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 개발도상국인 한국 시민도, 다른 전시 / 공연 문화 – 콘서트, 무용, 뮤지컬 공연, 미술 전시 등과는 달리, 영화만큼은 높은 수준의 작품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에서 영화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영화 제작은 도무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던 거죠. 일단 같은 가격으로 헐리우드 영화와 경쟁해야 하는 것도 무리수인 데다가, 한국영화 제작비가 아무리 싸다고 하더라도 외화 수입 가격보다는 비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싼 가격으로 미국 영화를 수입해서 개봉하는 것이 훨씬 이득인 셈이 되는 거죠. 하지만, 이 간단한 계산은, 정부에서 외화 수입쿼터 제도 (한국영화를 제작해야지만 외화 수입 허가를 받는 것)를 시행하면서 어그러지게 됩니다. 

이 당시만 해도, 정부의 한국영화 진흥책은 당시 정권을 홍보하는 영화에 점수를 더 주고, 한국 영화를 안 만드는 회사에는 불이익을 주는, 이런 폐쇄적 방식에 머물러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런 쿼터제도는 또 그 나름대로 부작용이 있었는데, 영화사끼리 수입쿼터를 가지고 현금 거래를 한다거나, 또는,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중박은 터지는 변강쇠 류의 토속 애로영화를 양산하는 일만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85년에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87년부터 영화 수입 자유화가 됩니다. 수입 쿼터제의 부작용을 정부에서 발견하고 그걸 일소하려는 노력 때문은 아니었고요, 88년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미국 영화사들로부터 압박도 많이 받고, 가정용 비디오 시장을 열어보려는 국내 대기업에서도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가 많아서였죠. 어떻게 보면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는 이때쯤엔 올림픽을 괜히 유치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을 겁니다. 해외의 이목이 집중되는 잔치를 집에서 벌이려 하다 보니까, 집에 흉 잡힐 게 너무 많았던 거죠. 

87년에는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도 있었는데, 올림픽 때문에 상주하는 외신기자들도 많다 보니까 정권도 지 성질대로 못하고 어떻게든 국민들을 달래려 했던 거겠죠. 이런저런 이유로 88년 올림픽 기간 즈음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명작들, 하지만 국내에서는 사전 검열 때문에 개봉을 못하던 작품들을 해외 선전용으로 시범 상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복자 펠레>, <양철북>,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등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았지만, 몇몇 가지 이유로 개봉이 불허되었던 당시의 문제작들이 극장에 걸리면서, 이게 웬일인가 했었죠. 그리고 이때 소개되었던 작품들은 몇 달, 혹은 몇 년 후에 몇 가지 수정을 마치고 정식 개봉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화 수입 자유화, 그리고 곧이어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네. 예전에는 해외여행도 정부 허가를 받고 갔었습니다)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던져주게 되죠. 서울 시내 개봉관들 중심으로 기획실이 생기면서 각 극장마다 수입담당이 직접 해외에 나가서 외화를 수입하게 되었거든요. 80년대 중반까지는 대개 설날과 추석에는 한국영화 혹은 (주로 ‘동아수출공사’에서 수입한) 성룡 영화, 나머지는 모두 헐리우드 네임드 대작 영화를 봤었고, 그게 아니라면 영화사 직원이 미군부대에 출입하거나 일본 잡지를 사서 보면서 외화를 수입했었는데, 외화 수입 자유화가 되면서 수입업자들은 그야말로 다종 다양한 외화들을 미리 시사하고 나서 골라낼 수 있었던 거죠. 

관객 입장에서는 그동안 영화잡지 ‘스크린’이나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이름만 들어보고 꿈속에서만 그리던 작품들이 쏟아져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장논리라는 게 있어서 장사가 안될 것 같은 영화가 극장 개봉되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이때, 한국의 관제교육 시스템과 고질적인 정경유착이 반전을 이루어내죠. 바로 89년부터 KBS 제3TV에서 방송했던 ‘TV 고교 가정 학습 (TV과외)’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프로야구나 미스 유니버스 등 여러 가지 포퓰리즘 정책을 폈는데, 그중 하나가 사교육을 금지시켜서 빈부에 따른 교육격차를 해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노태우 정권 때에도 대학생 과외를 제외한 보습학원 같은 건 계속 금지되었었는데, 이때 대학입시용 TV 과외를 시작한 거죠. 그것도 문교부에서 방송의 일정 부분을 학력고사 문제에 반영하겠다고 공언까지 하면서요. 당시에는 ‘4당5락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라는 단어가 유행할 정도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입시공부를 지독하게 시킬 때였으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과외 방송을 볼 시간이 없었고, 결국 대부분의 가정에서 예약녹화 기능이 있는 VCR 기기를 구매하게 됩니다. 국내 VHS VCR 시장을 확대하려는 대기업의 이해관계가 한국 가정의 교육열과 잘 맞아떨어진 거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VCR의 정체성은 공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삼성 (스타맥스)>, <SK>, <대우 (우일영상, 시네마트)>, <금성>과 같은 대기업에서 영화 비디오를 출시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한국 영화 산업의 본격적인 2차 판권 시장이 이때부터 시작된 거죠 (90년대 중반엔 한국 영화를 제작할 때 비디오 판권을 2~3억에 미리 선판매를 하기도 했어요. 94년에 개봉한 영화 ‘태백산맥’이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제작비 ’20억 원’을 들였다고 광고를 했으니까, 비디오 판권 3억은 작은 돈이 아니었죠). 각 기업에서 매달 10~20편씩 출시를 했는데, 이건 사실 한 해에 극장에서 개봉하는 작품 수보다 많았거든요. 당연히 컨텐츠가 부족하게 되었고 각 기업에서는 미디어 사업부를 만들어서 좋은 작품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극장 개봉작은 물론 서로 앞다투어 판권을 구매했고, 흘러간 명작에서부터, 소수의 영화광들만 숭배하는 ‘컬트’영화까지 떼거지로 출시되었죠. 그야말로 영화 감상의 ‘빅뱅’이 89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공륜(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당시 공륜은 등급심의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 극장 개봉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있었죠. 당연히 수입업자들은 작품을 고를 때, 이게 이문을 남길 것인지도 고민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륜의 입맛에 맞을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구요. 당시 공륜의 등급 심의 기준은 섹스에는 무척이나 엄격하지만 폭력에는 매우 관대한 미국의 등급 심의와 취향이 비슷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수입업자 입장에서는 헐리우드 영화들을 수입하는 것이 여전히 가장 안전한 투자였습니다. 때문에 영화광들은, 영화잡지나 영화 관련 도서, 방송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비디오떼끄’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