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 짐을 싼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록키로 일주일 캠핑을 가는데, 그것도 텐트가 두 개에 침낭이 네 개, 그리고 전기 옥장판까지 챙겨서 가는데, 막상 소형차 (이 당시엔 미드 ‘히어로즈’의 버프를 받아 닛산 벌사 Nissan Versa를 몰고 다님) 안에 실어보면 다 들어간다. 해치백 승용차 뒷좌석을 접어서 짐을 꾸역꾸역 넣다 보면 어떻게든 싣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공간이 조금이라도 더 생기면 아이스박스를 하나라도 더 싣고 가고 싶다.
문제는, 그렇다고 큰 차를 가지고 가면 널럴하게 짐을 실을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큰 차가 있으면 그만큼 쓸모없는 짐이 늘어난다. 7인승 크로스오버 3열 좌석과 2열 좌석을 접어서 또 짐을 꾸겨 넣고 다닌다. 물론 모기장 텐트라든지, 매우 유용한 장비도 추가로 실을 수 있지만, 막상 싣고 가서는 달랑 5분간 쓰고 도로 싣고 오는 장비도 많이 가지고 다닌다. 쓸 일이 없기를 기대하더라도 혹시 몰라 비상 대비용으로 가져가는 짐도 많아진다. 이후에 캠핑 트레일러도 끌고 다니게 되었는데, 트레일러가 있다고 해서 짐을 나눠 담을 수 있는 상황은 절대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트레일러 안에서 생활할 때 쓸 가재도구 짐들이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한집에서 오래 살다가 이삿짐을 싸면 이 많은 것들이 어떻게 그동안 이 작은 집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깜짝 놀라게 되는데, 어쩌면 캠핑 짐을 싸는 건 이삿짐을 싸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가는 장기간 캠핑 여행, 그것도 1,500km 장거리 운전이 동반되는 여행이라 약간의 긴장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다. 이전에 처가 식구들과 같이 관광버스 투어를 다녀온 적이 있는 아내는, 그때의 기억이 좋았는지 여행사 일정표를 그대로 본떠서 우리 일정표를 만들었다. 단지, 아내나 나나 저질 체력에 평소에는 계속 서서 일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웬만하면 하루에 5시간 이상 운전을 안 하기로 해서, 첫날은 밴쿠버에서 약 500km 동쪽에 위치한 시카무스 (Sicamous)라는 호반의 도시 모텔에 묵기로 했고,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록키 관광에 들어갔다. 연료 절감형 소형차에다가 짐까지 잔뜩 실은 터라 코카할라 고속도로 (Coquihalla highway : 밴쿠버-프레이저 밸리 지역 동쪽 관문 격인 고속도로로 표고 1,244m에 달한다)를 지나갈 때는 좀 헉헉대기는 했지만,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서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었고 중간에 쉬면서 김치볶음밥도 먹는 등.. 놀러 가는 일은 역시나 즐거웠다.넓은 초원처럼 보이지만 코카할라 고속도로는 제법 높은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다캐나다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그야말로 화장실과 주차장만 있는 ‘휴게장소’로만 역할을 하는데, 이곳 코카할라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커피와 간단한 스낵을 파는 경우도 있다.코카할라 고속도로의 종착지인 호반의 도시 ‘메릿 (Merritt)’ 2021년 BC 이상기후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다첫날 숙소를 잡은 경유지 ‘시카무스 (Sicamous)’시의 리조트 정경모텔에 묵었지만 식사는 김, 김치, 된장국
주 경계를 넘어서 캠핑 예약을 해둔 밴프 국립공원 터널 마운틴 캠핑장 (Banff National Park, Tunnel Mountain Village Campground)에 도착하기 전에, BC 최동단에 있는 요호 국립공원 (Yoho National Park)에 먼저 들러보았는데, 이때부터 날씨의 변덕이 시작되어 천둥이 치면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 딱히 급할 것도 없고..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컵라면을 끓여 (아침에 미리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아왔다) 요기를 하고 나니, 날씨가 천천히 개면서 아직은 약간 어둑하지만 그래도 제법 근사한 에메랄드 호수 (Emerald Lake)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날도 갠 김에 다리를 건너 호숫가를 천천히 산책해보려 했지만, 6월의 요호 국립공원은 아직 쌀쌀해서 우리 집 강아지가 결사반대를 표현했다.흐린 날의 에메랄드 호수억수같이 퍼붓는 소낙비 아래에선 컵라면
주 경계를 지나 앨버타 주로 진입하면 시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시계를 한 시간 앞당겨야 한다. 요호 국립공원을 떠나 밴프로 향하던 중, 마침 지나가는 길이어서 캐나다 록키의 시그내쳐라고 할 수 있는 루이스 호수 (Lake Louise : 이름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사진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곳)에 들러 봤지만, 여전히 구름이 잔뜩 끼고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인지라 (그리고 나라는 인간이 원래 자연경관에 감동받는 일이 적어서), 그렇게 까지 인상 깊지는 않았다. 나중에 아침에 햇빛이 반짝일 때 다시 오기로 하고 캠핑장으로 향했다.찌푸린 날의 루이스 호수
터널 마운틴 빌리지 2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5시경. 그런데… 이 캠핑장은 이름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마을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캠프 사이트마다 따닥따닥 텐트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록키 관광을 막 마치고 돌아온 젊은이들이 북적북적거렸다. 우린… 추위를 대비해서 전기장판을 가져갔으므로 텐트사이트가 아니라 전기를 제공하는 RV 사이트를 예약했는데, 막상 가보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커다란 아스팔트 도로 양 현으로 조그마한 사이트마다 테이블들이 비치된.. 그게 다였다. RV 들은 길가에 주차하듯이 세워져 있고, 테이블 옆에 작은 화로가 있어서, 거기서 불을 피울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이 있는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우리 텐트를 설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옆 잔디밭까지 들어가서 쳐야 했다. 이후 자스퍼 캠핑장 및 다른 캠핑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터널 마운틴 캠핑장도 바닥이 광역 밴쿠버의 주립공원과는 달라서 비교적 팩을 박기 쉬웠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던 큰 텐트는 팩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제대로 서있기가 힘든 모델이어서 추가로 밧줄을 달아서 고정을 해줘야 했다.
터널 마운틴 빌리지 #2 RV 캠핑 사이트
록키로 캠핑을 떠나기 전에 아내와 한바탕 다툼이 있었는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록키 캠핑장의 모닥불로 삼겹살을 먹어야겠다고 주장했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유치찬란하구나) 아내는 이틀 걸려서 가는 길이니 가능한 상할 수 있는 음식은 가져가지 말자고 했지만, 결국은 내 땡깡에 못 이겨 삼겹살을 아이스팩으로 포위를 해서 공수해갔다 (하지만 쌀쌀한 날씨 덕분인지 고기가 상하는 일은 이후에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사연이 많은 삼겹살이다 보니까, 좀 전까지 운전하고 바로 직전까지 텐트를 치느라 기진맥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 장작을 구해오라고 부탁하기엔 좀 민망했다. 비록 600여 개의 캠프 사이트를 가지고 있는 빌리지 1보다는 작다고는 하지만, 빌리지 2 역시 만만치 않게 넓어서 장작을 구하러 차를 가지고 가야 했는데… 아뿔싸… 여기서 무료로 제공되는 (캠프파이어 사용료를 캠핑장 예약할 때 미리 냄) 장작은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컸던 것이다. 최대한 마른 놈으로 (하지만 이 날은 비가 계속 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옹이가 없는 놈으로 골라서 차에 가득 싣고 돌아왔지만,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손도끼로 작게 해체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일단 집에서 가지고 간 신문지를 잔뜩 구겨서 밑불을 만든 다음, 최대한 작은 장작을 던져 넣었지만.. 이건 역부족이었다. 장작에 불이 붙기 위해선, 일단 불씨, 산소, 그리고 적절한 온도가 필요한데, 종이에 붙은 불로는 도저히 온도를 젖은 나무의 발화점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점심을 컵라면 하나로 때운 후 중노동을 하려니 너무 현기증이 나서, 결국 신문지 불로 삼겹살을 구워서 먼저 몇 점 입에 넣고 와인을 일단 마셔야 했다. 이때가 저녁 8시. 그러고 나니 반짝 에너지가 도는 것 같아서 죽을힘을 다해 장작을 부수기 시작했고, 이날 밤은 간신히 따뜻한 모닥불을 만들 수 있었다. 일 년 중 가장 해가 긴 6월, 게다가 시차가 있어서 11시가 다 되어서야 어둑어둑해졌다. 6월의 록키는 아직 많이 추웠지만, 힘들게 피운 모닥불 말고도 전기옥장판과 겨울용 패딩을 미리 준비해서 대충 버틸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어느 캠핑장에서 또 느꼈던 건데, 이렇게 추운 캠핑장에서 가장 따뜻한 곳은 샤워장이었기 때문에, 씻거나 볼일 보는 데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이전까지 텐트 캠핑하면서 자는 잠이란, 춥고, 춥고, 또 추운 거였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옥장판 덕택에 너무나도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텐트 창을 열어보니 밖에는 터널 산도 보이고…이런 호사가 다 있나 싶기도 했지만, 날씨가 아직 쌀쌀하고 잔뜩 찌푸려서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젯밤 늦게까지 고기를 먹은 탓에 배도 든든하고 해서 비가 쏟아지기 전에 곧바로 루이스 호수 쪽으로 다시 향하기로 했다. 밴프와 루이스 호수를 잇는 93번 고속도로 Icefield Parkway를 지나가다 보면 종종 굴다리와 같은 짧은 터널이 보이는데, 야생동물들이 고속도로에 뛰어들지 않고도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게 만든 배려라고 한다. 그리고 도로 양옆으로는 철조망도 높게 쳐있어서 야생동물의 도로 진입을 막는데.. 가끔, 철조망 가까이 까지 내려와서 팬서비스를 해주는 동물들이 있어서, 가다 보면 고속도로 노견에 차들이 줄줄이 정차해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야생동물용 육교
길 가에서 가끔 만나는 팬 서비스
루이스 호수는 아직 잔뜩 찌푸려있었지만.. 엊저녁과는 달리 명성에 걸맞은 영롱한 호수 색을 나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호수 한 바퀴 산책하기엔 아직 너무도 추웠어서 반 바퀴도 채 못 가서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오히려 근처의 모레인 호수에 도착하니 구름이 좀 걷히는 듯하고 날씨도 좀 풀리는 것 같아서 그 위 전망대까지 올라가 볼 수 있었다. 루이스 호수나 모레인 호수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보니까 넓디넓은 주차장이 줄기차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주차된 차들 사이로 다람쥐들이 바쁜 듯이 뛰어다니곤 했었고, 사람과 마주쳐도 도망치기보다는 대뜸 두 발로 뭔가를 원하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루이스 호수모레인 호수
캠핑장으로 돌아갈 때는 93번 고속도로 대신 제한속도가 낮은 Bow Valley Parkway로 가면서 존스턴 협곡을 들러보았는데, 주차장이 꽉 차 있을 때부터 이미 촉이 왔지만, 역시나 그 좁은 산책길이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이 당시는 팬데믹 시절이 아니었지만, 밀물처럼 쏟아지는 인파들을 보자니 (그리고 관광지에서는 반드시 고함을 질러야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내도 나도 멀미를 느껴서, 이날은 이대로 일정을 정리하고 밴프 시내에서 관광 겸 쇼핑을 좀 하다가 캠핑장으로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닥불은 포기.
월마트에서 100불 주고 산 큰 텐트는 세우기는 좀 까다로운 편이었지만, 나름 모기장으로 된 파티오도 있고 해서 부엌으로 쓰기도 좋고 의자에 앉아 쉬기도 좋았는데, 거기에 테이블을 세팅하고는 오뎅탕을 끓여 먹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캠핑장에서 와인과 오뎅탕을 먹으면서, 기타 치고 놀고 있자니 추위가 좀 가시기 시작했다. 사는 게 뭐 있나.. 600km 운전해서 록키에 왔더라도.. 날씨가 안 좋으면 이렇게 텐트 안에서 놀면 되는 거지.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밤 10시쯤 되어 멈췄지만, 왠지 이러다가 밤에 또 퍼붓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을 것 같아서 큰 텐트 속에 작은 텐트를 하나 더 친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해보니 밤새 퍼붓던 비바람 때문에 큰 텐트 속에는 빗물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2중 텐트가 아니었으면 비바람 치는 밤에 텐트 밖으로 뛰쳐나와 방수공사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비오는 날은 즐거운 오뎅 파티
다행스럽게도 다음 날 아침에는 비가 안 와서 텐트를 걷는 게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비를 맞으면서 캠핑을 철수하는 일은… 힘들기도 힘들거니와, 이후에 별도의 날을 잡아서 장비를 말리러 나서야 하므로 일이 많이 복잡해진다). 달랑 3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먹어버린 음식들이 있을 텐데, 이상하게 차에 남는 자리가 없어서 짐을 싣는 게 더 어려워진 것 같아서 의아해하긴 했었다. 록키에서의 3일차 일정은 자스퍼 국립공원 (Jasper National Park)로 이동하기 전에 반대편으로 가서, 캔모어 (Canmore)라는 동네의 유스호스텔에 묵는 것이었다. 밴프에서 20분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밴프 호텔들의 미친 가격은 감당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캠핑은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묵는 곳이었는데, 우리도 가서 빨래도 좀 하고, 간만에 깨끗한 침대 신세도 져야겠다는 계획이었다. 캔모어에 가는 도중에 미네완카 호수 (Lake Minnewanka) 에 들러 보기도 했지만.. 이쯤 되니… 다 그 호수가 그 호수 같은 지점에 이미 도달해 버렸다.빙하의 미에랄 듬뿍, 미네완카 호수 (Lake Minnewanka)캔모어 (Canmore), 록키 마운틴 스키 라지 (Rocky MOuntain Ski Lodge)
마을이면 마을, 고장이면 고장마다 다 제철 음식과 토속음식이 있어서 어디를 가도 입이 먼저 즐거웠던 한국과는 달리, 미국과 캐나다는 어디나 햄버거 아니면 파스타다 (혹은 주방장 스페셜 소스가 들어간 햄버거 혹은 파스타이다). 가끔 시골의 다운타운으로 나가면 중국 음식이 있기는 하지만 밴쿠버에 사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런 중국 음식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캐나다에 20년 가까이 살면서… 이제는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여행지에 가서 새로운 음식문화의 충격을 받지 못할 때는.. 정말 짐 싸들고 돌아가고 싶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데.. 캔모어에 와서, 그것도 앨버타 주 대도시인 캘거리나 에드먼튼도 아닌 캔모어에 와서 (그나마) 캐나다 (퀘벡주) 토속음식인 푸틴을 먹어보고 감동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퀘벡주 몬트리올에 본사를 둔 프랜차이즈 식당이었지만, 푸짐하게 쌓은 감자튀김 위에 깍둑 썰은 훈제 햄 및 각종 치즈를 때려 넣은 다음 그레이비 소스를 잔뜩 뿌린, 듣기만 해도 콜레스테롤 대폭발할 것만 같은 이 음식에 감동을 받을 줄은 몰랐다. 여기에 퀘벡에서만 팔고 있다는 ‘솔의 눈 (Spruce beer)’ 음료가 느끼한 맛을 싹 가셔 주었다.
퀘벡주 전통 음식 ‘푸틴’
오늘 밤은 말끔하게 정돈된 방에서 침대에 누어 잘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설레어서 밤늦게까지 캔모어 시내에서 놀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리고 앨버타는 BC 주와 달리 주 소비세가 없어서 쇼핑을 좀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또 다음 날 자스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니 일찍 숙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대신 캔모어 시내 하드웨어 스토어 (Hardware Store 공구/ 철물점)에서 캠핑용 물통과 날렵하게 생긴 도끼 한 자루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베란다에 주변 땅다람쥐 (Ground Squirrel)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밴프에서도 느꼈던 건데 이 동네 다람쥐들은 그동안 사람 손을 너무 많이 탔는지, 사람이 오면 으레 자기들에게 먹을 걸 줄지 아는 것 같다. 야생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막상 저렇게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주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안 주면 되는 거 아닌가?” 했다가 아내에게 구박을 듣고 길을 나섰다.
먹을 걸 기다리는 땅다람쥐
캔모어에서 자스퍼로 가기 위해선 93번 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이 넘게 계속 올라가야 했는데, 이번 여행 자체가 여행사 일정을 보고 그대로 따라 만든 거라, 자스퍼로 가는 길에 유명 관광지 몇 군데를 똑같이 들러 보았다. 공룡 발바닥 모양에 파스텔톤 녹색 물이 가득 차 있는 ‘페이토 호수 (Peyto lake)’는 주차장에서 호수 전망대를 거친 후 숲을 따라 크게 돌아오는 트레일이 있었는데, 트레일 군데군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채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기들이 극성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외에 ‘아사바사카 폭포 (Athabasca fall)’나, 지구온난화로 발가락 한쪽이 사라지고 있는 ‘까마귀 발 빙하 (Crowfoot Glacier)’, 몇천 년 된 빙하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컬럼비아 대빙원 (Columbia Icefield)’ 등을, 정말이지 투어버스를 탄 것마냥 순식간에 점을 찍고 난 다음에야, 자스퍼 국립공원의 위슬러 캠핑장 (Whistler Campground)에 느즈막히 도착했다.
페이토 호수 (좌, Peyto Lake), 까마귀 발 빙하 (우, Crowfoot Glacier)
컬럼비아 대빙원과 그곳까지 관광객을 나르는 설산차
이때가 오후 7시 정도. 텐트를 치려고 했는데 비는 안 왔지만, 모기가 많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 이때까지만 해도 아내는 천연성분을 선호했던 터라, 바르는 모기약도 화학제품이 아닌 무슨 허브 오일 같은 걸 썼었는데, 자스퍼 모기들은 자연 허브 따위는 아랑곳없이 내가 텐트를 치는 동안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자스퍼의 위슬러 캠핑장은 밴프의 터널 마운틴 캠핑장과는 달리 널푸른 숲속에 만들어진 캠핑장이었다. 마치 광역 밴쿠버에 있는 BC 주립공원처럼,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캠프 사이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캠핑장 관리자 말로는 자기네들이 꾸준하게 내쫓고는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중과부적인지) 큰사슴 (Elk) 무리들이 여기저기 사이트들을 어슬렁거리면서 다니고 있었다. 건너편 옆 캠프 사이트에 있는 RV에 다가가 냄새를 맡고 있던 큰사슴 무리를 보면서 우리 집 강아지가 계속 캬르르릉 컁컁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모든 현실 감각이 사라지면서 무슨 TV 교양 프로그램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뿐, 저렇게 큰사슴 무리가 돌아다닌다면… 곰은 과연 없을까??? 우린 위슬러 캠핑장에서도 전기장판을 쓰기 위해 전기가 들어오는 곳으로 예약을 했는데, 그 캠핑장 역시 우리 텐트 말고는 죄다 RV였기 때문에, 만일 곰이 먹이를 찾으러 다닌다면 우리가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아니 사람을 무서워하는 곰이라도, 작은 강아지를 먹으러 올 수는 있는 거잖아… 등등 걱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결국 아내와 나는 귀를 쫑긋 세우느라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치고, 정작 우리 강아진 갸르릉 갸르릉 코를 골면서 꿀잠에 빠지게 되었다.
옆집 RV에 관심 있어 보이는 큰사슴
밤새 잠을 설치며 불침번을 섰지만 곰의 습격은 없었다. 깊게 우려하던 일이 사실 기우에 불과한 것이라는 게 드러날 때 사람들이 순식간에 대범해지는 것처럼,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에이. 당연히 그렇지. 이렇게 인간들이 우글거리는데 곰이 오겠어..?”를 시전했다 (자매품으로, 생각도 못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쓰는 “에이 씨.. 거봐. 내가 뭐랬어?”가 있겠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밴프에 있는 루이스 호수 캠핑장 (Lake Louis Campground)의 경우, 텐트와 소프트탑 RV가 사용할 수 있는 캠프 사이트에도 전기가 들어오는데, 거기엔 야생동물이 아예 못 들어오도록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곰은 곰이라 할지라도 큰사슴들이 바로 옆으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어디서 또 이렇게 호사스러운 야생 사파리 캠핑을 할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잠을 설쳐서 그랬는지, 아니면 텐트를 치면서 모기에 너무 물려서 그랬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너무 무겁고 으슬으슬 떨렸다. 뜨끈한 국물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서둘러 라면을 끓였지만.. 이게 그만 속에서 꽉 뭉쳐 버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몸져누울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차를 몰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려 나섰는데… 하하하 여긴 정말 야생이로구나. 길가에 순록 (Caribou), 산양 (Rocky Mountain Goat), 그리고 검은 곰 가족들이 산책을 하고 있어서 번번이 갓길에 차를 대고 사파리를 즐기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길가에서 놀고 있던 순록 (Caribou)
자스퍼를 상징하는 말린 호수 (Maligne Lake)에 도착했을 때에도 날씨는 여전히 잔뜩 찌푸려 있었다. 거무튀튀한 하늘을 반사하는 호수 물빛을 보고 있자니, 그리고 아직 시즌 준비 중이라 썰렁한 비즈니스들을 보고 있자니 몸이 더 으슬으슬 춥고 그랬지만, 그래도 강아지의 안정적인 배변 활동을 위해서 호수 주변을 천천히 걸어 보았다. 하지만, 이후 메디신 호수 (Medicine Lake)에 가서는 더 증상이 심해져서 결국 하루를 마감하고 캠핑장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오는 길에 자스퍼 다운타운에 들러 황도 통조림을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고, 밤에 증상이 심해지자 아내가 강아지용으로 준비해 둔 동종약도 먹어봤지만, 결국 이 초기 감기+속병은 이후 캠룹스에서 중국식 탕수육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낫게 되었다.말린 호수 (Maligne Lake)메디신 호수 (Medicine Lake)
컨디션은 영 아니었지만, 다시 불을 피우며 최대한 록키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겼다. 아내는 그동안 별러왔던 ‘스모어 (S’more. 모닥불에 구운 매쉬맬로우에 초콜릿을 녹인 후, 비스킷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는 북미 전통 캠핑 음식. 순식간에 혈당이 치솟을 수 있다)를 만들었지만, 당시 내 속사정으로는 한 조각도 먹을 수 없어서 그냥 복숭아 통조림으로만 당을 채웠다. 날이 어두워지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밤에는 어느새 폭우로 바뀌어 있었고, 다음 날 아침에 아예 푹 젖은 텐트를 걷어야 했다.
모닥불에 굽는 매쉬맬로우
날씨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렇게까지 완벽했던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볼 수 있는 건 다 보았고 놀 만큼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사실.. 예상대로 호수와 산들은 어느 게 어떤 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야생동물들의 재롱만큼은 실컷 즐겼었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장기간 캠핑으로 매우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막상 축축한 짐들을 차에 구겨 넣으려고 보니, 아무래도 조만간 하루 날 잡아서 다시 캠핑장에 가서 이 모든 걸 쫙 펴놓고 말려야겠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짐을 다 챙긴 후 다시 서쪽으로 향하다가 BC 주 경계에 들어서서 록키 여행의 마지막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랍슨산 주립공원 (Mount Robson Provincial Park)에 들러보았는데,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랍슨산 정상은 아니나 다를까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아침에 서둘러 만든 김치볶음밥 도시락을 구름에 잠긴 산을 보면서 먹는 건 각별한 맛이었다.
구름으로 덮여 있던 랍슨산 (Mount Robson)
여행 마지막 날 숙박이 계획된 캠룹스 (Kamloops)는 캘로우나 (Kelowna)와 더불어 BC 주 내륙도시 중 가장 큰 도시로 (이때 갔을 때는 여전히 흐린 날씨였지만) 평상시 작열하는 태양과 불볕더위가 인상적인 곳인데, 5번 고속도로와 1번 고속도로와 모두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여서 BC 주정부 기관이나 공기업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모텔에 체크인을 한 후, 시내 구경을 좀 하다가 어느 중국식당에 들어가 탕수육 한 점을 넣고 나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평소에 밴쿠버 밖으로 나와 중국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렇게 투덜대던게 다 미안해졌다. 밥에 약을 탔나? 어쩌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MSG의 효능 중에 소화작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자연 속에서의 캠핑도 좋지만.. 이렇게 도시 생활도 좋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톰슨 강 (Thompson River)을 따라서 길게 늘어진 강변공원을 산책하면서.. 아내와 첫 록키 여행의 소회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캠룹스 강변공원
밴프 국립공원 터널 마운틴 캠핑장 (Banff National Park – Tunnel Mountain Village Campground. https://www.pc.gc.ca/en/pn-np/ab/banff/activ/camping?utm_source=gmb&utm_medium=tunnelmountain_campground#tunnelvillage2 ) : 밴프 시내와 가까운 곳에 있는 캠핑장으로 (아마도) 캐나다에서 가장 큰 캠핑장. 총 3개의 마을 (VIllage)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름철이 되면 총 1,100개의 사이트가 가득 찬다. 캠핑장의 이름은 밴프시 근처에 있는 터널 산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밴프 다운타운에서 딱 보이는 그 산은 캐스케이드 마운틴).
대부분의 캐네디언 록키 국립공원의 캠핑장이 그렇듯이, 이 캠핑장은 캠핑장 내에서 놀 거리가 많다기보다는, 캐네디언 록키의 곳곳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에게 저렴한 숙박 장소로 사용된다. 비교적 사이트 간의 거리도 짧고 사이트 자체도 매우 작은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국립공원 캠핑장처럼, 전기시설, 샤워실, 설거지 싱크대, (워크인 캠핑족들을 위한) 부엌 등을 제공하고, 장작은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 제공되며, 대신 하룻밤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는 퍼밋 (Fire Permit)을 사야 한다. 하지만 국립공원 외부에서 나무를 반입하는 것은 전염병 방지를 위해 금지되어 있고, 공원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장작도 무지막지하게 큰 사이즈이기 때문에, 커다란 도끼가 필요하다
가까운 시내 : 밴프
광역 밴쿠버로부터 접근성 : 0/5
이동통신 / 데이터 : 잘됨
프라이버시 : 1/5
수세식 화장실 / 샤워실 : 있음
시설 관리 / 순찰 : 3/5
RV 정화조 : 있음
RV 급수 시설 : 있음, 좋은 수압
캠핑 사이트 크기 : 1/5
나무 우거짐 : 1/5
호숫가 / 강변 / 해변 : 없음
햇볕 : 4/5
자스퍼 국립공원 위슬러 캠핑장 (Jasper National Park – Whistler Campground https://www.pc.gc.ca/en/pn-np/ab/jasper/activ/passez-stay/camping/whistlers) : 자스퍼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캠핑장으로 드넓은 숲 속에 사이트들을 배치해서 본격 야생 캠핑을 경험할 수 있다. 최근 2년간의 안식기와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2021년에 재개장을 했다는데, 최신식의 화장실 및 샤워시설도 설치하고 캠프 사이트도 총 800 사이트로 증축했다고 한다. 과연 예전 그대로의 야생 사파리 느낌이 날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연초에 캠핑장 예약할 때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과 고생들을 생각하면 이런 증축을 적극 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재개장 후 리뷰나 사진들을 보더라도, 그 야생, 그 분위기는 여전해 보인다. 자스퍼에서 장기간 캠핑을 계획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추천받는 캠핑장. 역시나 일반적인 국립공원 캠핑장처럼, 전기시설, 샤워실, 설거지 싱크대, (워크인 캠핑족들을 위한) 부엌 등을 제공하고, 장작은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 제공되며, 대신 하룻밤 캠프 파이어를 할 수 있는 Fire Permit을 사야 한다. 하지만 국립공원 외부에서 나무를 반입하는 것은 전염병 방지를 위해 금지되어 있고, 공원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장작도 무지막지하게 큰 사이즈 이기 때문에, 커다란 도끼가 필요하다
가까운 시내 : 자스퍼
광역 밴쿠버로부터 접근성 : 0/5
이동통신 / 데이터 : 잘됨
프라이버시 : 4/5 (2019년 이전)
수세식 화장실 / 샤워실 : 있음
시설 관리 / 순찰 : 4/5
RV 정화조 : 있음
RV 급수 시설 : 있음, 좋은 수압
캠핑 사이트 크기 : 4/5 (2019년 이전)
나무 우거짐 : 3/5
호숫가 / 강변 / 해변 : 있음
햇볕 :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