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일의 재미

밴쿠버에서 밴프까지는 차로 한 9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인 것은 틀림없지만, 우린 둘 다 서두르면 꼭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편인 데다가, 또 운전하면서 스트레스를 제법 받는 성격이기도 해서 하루에 5시간 이상 운전하는 걸 저어했다. 그러다 보니, 6박 7일의 록키 캠핑 일정이라고는 해도 앞뒤로 1박 2일씩 빼먹고 나니까, (도착 직후, 출발 직전까지 미친 듯이 놀지 않는 한) 사실 본격적으로 캐네디언 록키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날은 3일밖에 되지 않았다. 해서 그 3일 동안 어떻게든 빡세게 다녀보자는 아내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곧바로 다시 육체노동으로 하루하루 보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이왕 휴가를 왔는데 좀 느긋이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휴가지에서조차 아내와의 의견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첫날 제법 강행군을 했기 때문에, 둘째 날엔 좀 쉬면서 여기저기 관광지 주차장을 찍고 다니자는 것엔 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었다. 일단 아침에 온천에 가서 몸을 좀 녹인 후에 밴프 시내 관광 및 주요 관광지들을 돌기로 하고, 캠핑장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 밴프 시내에서 가까운 밴프 어퍼 온천 (Banff Upper Hot Springs)으로 먼저 향했다.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캐나다에 와서는 (자연환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위락시설들이 마치 80년대 서울/ 경기 수준인 것에 대해서 적잖이 실망하고는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이 바로 온천 (Hot Springs) 일 것이다. 이곳의 온천은 문자 그대로 ‘따뜻한(hot) 샘물(spring)’로 만들어진 풀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심지어 뜨겁지도 않다!!), 각종 수상 오락 시설들이나, 복분자 탕, 민들레 탕 등 다양한 허브 욕탕에 익숙해진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아놔… 참.. 소박하구나.. 이런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도, 뜨끈한 풀장에 잠긴 채 뻥 뚫린 하늘과 눈 덮인 설산 들을 보고 있자니.. 이것 참 호강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여기에 등만 밀면 금상첨화겠구나.. 싶어서 까칠까칠한 타일 벽을 찾아다녔는데, 눈치가 빤한 아내에게 들켜 호되게 꼬집히기도 했다.

따끈따끈해진 몸으로 밴프 시내를 돌아다녔다. 세계적인 관광도시에 걸맞게 카메라 렌즈를 어디로 들이대든지 간에 예쁘장한 그림이 나온다. 우리의 평소 휴가 때와는 달리, 이때는 날씨가 어마무시하게 도와주어서 더 그렇다. 온천으로 데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크림콘을 들고 시내를 걸어 다니는 관광객들의 기본자세도 잊지 않았다. 밴프 시내에는 기념품점이나 관광객 대상의 레스토랑 말고도 (너무나 당연하지만) 일반 식료품점이나 주류 판매점들이 있는데, 무슨 터무니없는 선입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화석연료 산업이 훨씬 발달한 앨버타주가 당연히 BC 주보다 맥주 가격이 쌀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그 반대여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맥주 가격의 경우 BC 주가 캐나다에서 두번째로 싸다고 한다 https://www.vice.com/en/article/d3m4p7/where-to-find-cheap-booze-in-canada).밴프 시내 쇼핑가. 저 멀리 캐스케이드 산이 보인다밴프 시내 주변을 흐르는 ‘보우강 (Bow River)’

그러고 나서, 천천히 페이토 호수 (Peyto Lake) 쪽으로 향한다. 파스텔톤의 물감을 끼얹은 듯한 호수 빛과 공룡 발바닥처럼 보이는 모양으로 워낙 유명하기도 해서 밴프 관광 일정에서 빠지지 않는 곳인데, 주차장에서부터 조금만 걸으면 바로 전망대가 나오는 곳이라, 게으른 나 역시 부담 없이 가자고 나섰다 (하지만, 그 안에 2.5km 거리의 산책로가 있었을 줄이야…). 페이토 호수 자체도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밴프에서 거기까지 가는 길이 바로 그 유명한 자스퍼와 밴프를 연결하는 93번 고속도로 – 아이스필드 파크웨이 (Icefield Parkway)였기 때문에, 운전하는 내내 눈에 불을 켜고 야생동물이 있는지를 살펴야 했다. 지난 2011년에 왔을 때는 그야말로 갖가지 동물들을 다 만나던 길이었는데, 이젠 국립공원 관리 공단 자체에서, 동물을 보려고 고속도로에 차를 세우는 걸 자제하라는 안내문을 여기저기 붙여두고 있었다. 사진도 한 장 안 남은 걸 보면 아마도 한 마리도 못 만났지 않았나 싶다.

페이토 호수 전망대 (Viewpoint)에서 너도 나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전망대라는 것이 수려한 광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남기는 곳이 아니라 포토스팟으로 변모해서, 다른 사람이 인생샷을 찍고 있으면 그 옆에 서서 호수 구경을 안해주는 것이 어떤 예의처럼 암묵적으로 통용되어 왔나 보다. 일군의 관광객들이 그걸 가지고 실랑이하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만간 스마트 폰 사진에서 원하지 않은 피사체를 자동으로 지워주는 앱이 개발될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몇 년이 지나자 구글폰에 기본 사양으로 탑재되어 나왔다.  하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사진기록 SNS가 지금처럼 계속 각광을 받는다면, 조만간 모든 국립공원에 전망대 따로, 포토스팟 따로 만들어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공룡 발바닥 같은 ‘페이토 호수 (Peyto Lake)’

셋째 날에는 새벽같이 모레인 호수 (Moraine Lake)로 향하게 되었다. 사실 애초에 모레인 호수는 첫날에 가려고 계획을 했었지만, 아침 8시에 이미 주차장이 가득 차 있었어서 황급히 차를 되돌려 루이스 호수로 갔었던 것이다 (모레인 호수 주차장 규모가 더 작다). 국립공원 150주년이라 입장료가 없다 보니까.. ‘아놔.. 참.. 인간들 정말 공짜들 엄청 좋아하는구나. 모두 대머리나 되어라…’라고 구시렁대면서 길을 돌렸었는데, 이날은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해 먹고 곧장 모레인 호수로 향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루이스 호수와 함께 캐나다 록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호수이다 보니까 주차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와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루이스 호수가 약간 연하고 크리미한 옥색이라면, 모레인 호수는 영롱한 에메랄드빛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뒤에 빙하가 낀 산이 바짝 붙은 채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 어떤 이는 루이스 호수를, 어떤 이는 모레인 호수를 더 자기 취향이라 말하곤 하는데, 아침 일찍 도착해서 저 먼 산봉우리들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고 천천히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사바세계의 미적 기준이라는 게 어찌 되었든 다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사바세계의 미적 기준을 잊게 만드는 ‘모레인 호수 (Moraine Lake)’

하지만, 이것만 보고 그냥 곱게 돌아갈 아내가 아니었다. 일단, 호숫가 산책로를 천천히 돌면서 모레인 호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만큼 한 다음에, 다시 주차장 근처에서 이어지는 산책로로 곧바로 향했다.  얼마 후 바윗돌들이 가득 차 있어 (그래서 산책로 이름도 Rockpile Trail) 자칫하다가는 최소 발목염좌, 더 나가면 두개골 골절로 이어지기 딱 좋은 벌판이 나오고, 곧이어 다시 빡빡한 침엽수가 양옆으로 나란히 펼쳐진 등산로가 나오는데, 바로 ‘컨설레이션 호수 (Consolation Lake)’ 로 가는 등산로가 되겠다. 모레인 호수 주차장에서부터 왕복 2.5km에 약 300m 남짓한 오르막을 오르면 되는 거리라서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작부터 난데없이 바윗돌 길이 나와서 엄청 겁을 내며 이동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후에 숲길, 다시 쨍한 햇볕을 맞고 가야 하는 등산길, 호수 가까이에 나오는 습지대 등, 다종다양한 생태계가 편도 1.2km의 짤막한 등산로에 다 섞여 있어서 나름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듯한 재미를 느꼈다. 호수에 거의 다 도착해서, 또 어떤 사람들이 곰이 있다고 소리치며 나와서 조금 긴장을 했었는데, 맞은편에서 나오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곰은 호수 건너편에 있다고 심드렁하게 말해서, 여기까지 온 김에 그냥 가보기로 했다.

트레일계의 종합선물세트 ‘컨설레이션 호수 등산로 (Consolation Lake Trail)’

습지대를 지나서 나온 호숫가는 또다시 바윗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위태위태한 바윗돌들 위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가득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가기 어려웠다. 일단 만만하게 생긴 바위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고 물을 마시고 있는데, …어라..? 사람들이 모두 호수물 아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어떤 이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가며 호수 아래를 뚫어지게 살핀다. 

‘무슨 고대 어종이라도 있는 건가…?’ 하며 그 근처로 다가가서 덩달아 호수를 살폈는데, 알고 보니 관광객 하나가 인생샷을 찍다가 신형 아이폰을 떨어뜨렸는데, 검은 바윗돌 들과 어두운 호수 바닥 덕에 못 찾고 있어서, 주변 다른 관광객들이 모두 합심해서 찾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여행이란 게 별거냐? 이렇게 할 일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앞다투어 비생산적인 일들을 하며 재미를 느끼는 거 아니겠나?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호수 바닥을 살피던 중에 저쪽에서 찾았다며 환호성을 지른다.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고……일제히 호수 바닥을 수색하는 사람들

다음 날 역시 새벽부터 눈 비비고 일어나서 루이스 호수로 곧장 향했다. 일정상 이날이 루이스 호수 캠핑장에서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어차피 가는 길에 샐먼암 근처에서 하루 더 캠핑을 하고 집으로 갈 계획이어서, 캠핑 트레일러를 청소한다든지, 캠핑 짐을 꼼꼼하게 쌀 필요는 없었다. 그런 고로, 돌아가서 아쉽지 않게 루이스 호수 구경을 한 번 더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바로 전날, 일출 햇빛에 서서히 드러나는 모레인 호수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걸 루이스 호수에서도 한 번 더 경험하자는 심산도 있었다.

루이스 호수 전경을 독차지하고 있는 페어먼트 호텔에 가서 영역 표시도 할 겸,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나와서 천천히 호숫가 산책로를 걸었다. 어스름이 걷히고 햇볕이 저 멀리에 있는 ‘후버산 (Mt. Huber)’과 ‘빅토리아산 (Mt. Victoria North Peak)’의 꼭대기부터 황금빛으로 물들여갔다. 압도적인 광경도 광경이었지만, 갑자기 몇 해 전 먼저 보낸 강아지와 같이 왔었던 때가 기억이 나면서 울컥했다. 그땐 너무 춥고 날도 많이 흐려서 제대로 구경도 못 했었는데.. 궂은 날씨가 내 탓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황홀한 광경을 우리만 보고 있자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햇볕이 봉우리들을 넘어 호수를 내리쬘 때까지 기다린 후, 캠핑장으로 돌아와 짐을 싸고 또 길을 나섰다. 출발 날에 트레일러 브레이크 사고로 액땜을 해서인지, 이번 휴가는 내내 날씨가 너무 청명하다. 날씨가 좋으니 운전도 훨씬 수월하다는 느낌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박지는 ‘슈스압 호수 주립공원 (Shuswap Lake Provincial Park)’. ‘슈스압 호수’는 마치 ‘ㅅ’ 자를 약간 우측으로 눕힌 것처럼 생겼는데, 오는 길에 묵었던 ‘헤럴드 주립공원’이 아래쪽 가지의 북쪽 해안에 있다면, 이 슈스압 주립공원은 위쪽 가지의 북쪽 해안에 있다.

어쨌든 샐먼암 시로부터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고, 고속도로에서 나와 Squilax-Anglemont 길을 타고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하는 외곽 지역이라서, 마지막 날은 정리도 할 겸 트레일러 안에서 느긋하게 쉬어야겠다 싶었는데, 캠핑장이 있는 ‘스카치 크릭 (Scotch Creek)’이라는 마을이 의외로 볼 게 많았다. 아마도 여름에 이곳에서 장기 캠핑을 즐기는 휴가객들을 대상으로 관광 산업이 발전한 것으로 보였다. 슈스압 호수를 따라 캠핑장 주변으로 여기저기 보이던 대규모 사설 RV 리조트들 역시, 여름 피서지로서 이 지역의 인기를 가늠케 했다. 자전거를 끌고 시내에 들어가 시장과 도서관을 좀 더 구경한 후에 (그리고, 레퍼토리 식으로, ‘여기서 살면 어떨까?’로 시작되는 말씨름이 또 한 번 이어지고), 인터넷 별점이 높던 P 피자집에서 피자를 사 가지고 돌아와서 휴가를 마무리했다.  


슈스압 호수 주립공원 (Shuswap Lake Provincial Park https://bcparks.ca/explore/parkpgs/shu_lk/) : 슈스압 – 컬럼비아 지역 (Shuswap-Columbia Region) 관광의 또 다른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공원으로, 330여 사이트가 있는 대형 캠핑장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이곳의 해변은 단지 캠퍼들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일 피크닉을 하는 사이트와도 공유하고 있어서 날씨 좋은 주말에는 수많은 피서객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공원 입구에서 평평한 차도를 따라 2km 정도만 가면 시장이 나오기 때문에, 음식을 현지 조달하려고 하는 장기 캠퍼들에게 무척 편리하다. 참고로 ‘슈스압 호수 해상 주립공원 (Shuswap Lake Marine Provincial Park)’ 와는 다른 곳으로, ‘슈스압 호수 해상공원’의 경우에도 차량 진입이 되는 캠핑장이 있기는 하지만, 100% 선착순으로 제공되고, 샤워장이 없다.

가까운 시내 : 스카치 크릭

광역 밴쿠버로부터 접근성 : 1/5

이동통신 / 데이터 : 통화 가능, 데이터는 매우 부분적

프라이버시 : 3/5 ~ 4/5

수세식 화장실 / 샤워실 : 있음

시설 관리 / 순찰 : 3/5

RV 정화조 : 있음

RV 급수 시설 : 있음

캠핑 사이트 크기 : 3/5 ~ 4/5

나무 우거짐 : 4/5

호숫가 / 강변 / 해변 : 있음

햇볕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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