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프리의 저주

2017년 5월, 실패로 돌아갔던 조프리 등정을 향한 아내의 열망은 4개월도 채 안돼 이루어졌다.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된 J 님과 P 님 부부와 2017년 여름부터 급격하게 친해져서, 거의 매 주말마다 같이 놀러 다니곤 했는데, 서로 가치관도 너무 잘 맞았고, 비슷하게 맨땅에 헤딩으로 밴쿠버에 정착하신 이분들이 겪었던 얘기들에 많은 정서적 공감을 하기도 했다. 또한 준프로 산악인이셨던 이분들로부터 나눠 받은 산행의 즐거움이나 산행에 필요한 정보들 역시 매우 감사한 것들이었는데, 특히 이제 막 아웃도어 취미를 제대로 시작하려던 아내에게 지독한 뽐뿌질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프리 호수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나를 제외한 셋이서 손뼉을 치며 의기투합해서 9월에 다시 가기로 결정해버렸다 (얘기했듯이, 다른 커플과 같이 놀러 다니면 많은 계획이 다수결로 결정 나기 때문에 의견 충돌의 기회가 줄어든다). 마침 계획을 잡은 날짜가 먼저 보낸 강아지의 3주기 즈음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이유로, 나 역시 얼떨결에 산행에 동참한다고 해버렸다.

그렇게, 9월의 어느 주말, 지난 5월 때처럼 팸버튼에 있는 내언 폭포 주립공원 캠핑장으로 먼저 향했다. 이날은, 역시 우연히 모임에서 알게 된, 한국에서 홀로 밴쿠버로 여행을 온 K 작가와 같이 움직였는데, 같이 캠핑을 하면서 술 마시고 얘기들도 나누고, 그러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조프리 호수로 같이 올라가는 계획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나면 다음 날 새벽 등반은 자연스럽게 무산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간단하게 먹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상태에서 다음 날 등반을 준비하자’는 사전 합의에도 불구하고, 먼저 도착하신 J 님과 P 님 부부께서 아주 근사한 저녁상 (삼겹살 + 손수 키운 쌈 채소 + 된장찌개 + 각종 장아찌 및 민들레 김치 등)을 미리 준비해 두셔서 술이 엄청나게 잘 들어갔다.. 아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ㅋㅋㅋㅋ 이렇게 먹고 마시다 보면, 산행은 무슨 산행을 할 수 있겠어.. 하는 기대가 사라지질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내 못된 심보에 하늘이 응답이라도 하듯이, 작은 사건이 하나 터졌다. 같이 술을 마시던 K 작가가 갑자기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었다. 좀 눕고 싶다고 해서 우리 트레일러에 눕혔는데 (당시에는 작은 카라반을 가지고 캠핑을 다녔다), 왠지 체온도 떨어지고, 맥박도 약해지는 것 같았다. 아앗.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식겁해져서 핫팩을 만들고, 서둘러 마사지를 하고 난리를 치렀지만, K 작가는 계속 바다에 가라앉는 것 같다고 하면서 응급실에 가야겠다고, 구급차 좀 불러 달라고 했다.  결국 911에 전화를 걸어 완전히 꼬부라진 혀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때가 거의 자정쯤.

내언 폭포 주립공원 캠핑장은 11시에 입구 게이트를 닫기 때문에, 구급차는 캠핑장 밖에 있는 주립공원 주차장까지만 올 수 있어서, 우리가 K 작가를 부축해서 주차장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응급콜을 받고 밤늦게 달려왔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은 환자를 본 구급요원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털을 간단히 체크를 하고, 환자의 신원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K 작가가 여행자 보험을 안 들었다는 걸 발견했다. 여기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 (구급요원 포함)은 경악하며 1차 멘붕.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았는지, 구급요원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보험이 없는 상태에서 응급실에 가기를 원하는지 두 번 세 번 물었다. 2만 불 정도 나올지도 모른다는 협박 아닌 협박도 빠지지 않았다. 막상 응급실에 가면 중증도에 따라서 환자를 분류하고 대기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운반하는 입장에서는 사람을 골라가며 맡을 수가 없다. 중증도가 낮은 환자를 이송하느라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다른 응급환자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구급요원 입장에서는 눈앞에서 병원 치료를 원하는 환자를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야. 너. 그냥 취해서 그런 거야!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신호를 온몸으로 보내고 있었지만, 응급요원으로서 그걸 차마 입 밖으로 내보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마침 당시에 한국에서 신입생 환영회 때 술을 먹다가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대학 신입생이 유명을 달리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던 때여서, 응급실에 가기를 원하는 K 작가의 의지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래.. 일단 빨리 병원에 가자. 가서 생각해보자… 라고 했는데, 그 근처에 응급실을 갖춘 병원이 없단다. 팸버튼에도, 위슬러에도… 내언 폭포 주립공원에서 응급실에 가려면 150km 밖에 있는 노스밴쿠버의 라이언즈 게이트 종합병원까지 와야만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2차 멘붕. 

아니, 팸버튼이랑 위슬러 인구를 합치면 그래도 만 오천 명은 되지 않나? 게다가 위슬러는 스키장도 많고 다운힐 산악자전거도 많이 타서 응급환자가 많이 생길 텐데, 어찌 종합병원이 없는 거지?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응급환자 이송은 편도여행이었다. 말인즉슨, 누군가 보호자로서 150km 환자 이송에 따라가면, 그 사람은 이제 캠핑장에 못 돌아온다는 뜻이다. 응급 상황에 경험이 적은 아내를 혼자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나 혼자 따라간다고 해도, 캠핑장에 정박한 카라반을 아내가 끌고 돌아올 수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구급요원 중 한 명이 은근하게 제3안을 제안해왔다.

“팸버튼 시내에 있는 클리닉으로 일단 가자. 미리 당직 간호사에게 연락을 해서 환자를 볼 수 있게끔 해두겠다. 그리고 당직 간호사는 또, 당직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원격으로 진료를 보면 되지 않겠냐.. 그러다가 정말 응급상황이 발견되면 그때 종합병원으로 이송하면 된다.” 결국 이 말에 K 작가 포함해 모두가 수긍을 했고, 아내와 내가 보호자로 같이 구급차를 타고 동행하기로 했다. 이때가 새벽 2시.

클리닉에 도착하니, 당직 간호사가 밝게 우리를 맞이해 줬다. 자는 걸 깨워서 귀찮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따뜻하게 맞이해주니 왠지 울컥했다.  곧바로 바이털을 다시 재고는 K 작가 상체에 하얀 줄이 주렁주렁 달린 딱지들을 여기저기 붙이더니 심전도를 재면서 실시간으로 당직 의사에게 환자 상태를 생중계했다. 그런데… 아니, 약 한 알 받아먹은 거 없이 심전도만 측정했는데… K 작가 상태가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아.. 역시……

좀 김빠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침대에서 일어나 직접 웃옷을 챙겨 입는 걸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누구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조금 미심쩍더라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성인이라면,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법이다. 그게 비록 남에게 조금 민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거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 아니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서로 격려를 하면서 클리닉을 나섰다. 이때가 새벽 3시경. 당직 간호사에게 택시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더니, “택시? 여긴 이 시간에 택시 없는데?”. 여기서 3차 멘붕. 아 ㅆㅂ… 정말 육성으로 욕이…

캠핑장에서 팸버튼 시내까지는 비록 차로 5분, 4km 정도 걸리는 거리이지만,  제법 만만치 않은 경사라서 (고저차 50m)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 내리막으로 미친 듯이 달리는 차가 있다면, 이 시간에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걸어 올라오는 보행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할 텐데… 하지만 어쩌랴. 그냥 조심해서 올라가는 수밖에.. 그래도 캠핑장에 남아 엄청나게 걱정하고 계실 J 님, P 님 부부에게 별일 없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마침 저쪽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이곳 상황을 전하니 당장 차를 끌고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J 님이 평소에 정말로 하기 싫어하는 두 가지가 다른 사람한테 무슨 부탁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영어로 말하는 것이었는데, 우리를 위해 숙소에서 잠을 자던 캠핑장 관리인을 문을 두드려 깨우고, 영어로 응급상황이니 입구 게이트를 좀 열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팸버튼 시내 입구 주유소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가 멀리서 내려오는 J 님의 차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아… J 님… 진정 당신은…

이렇게 사건 사고를 겪고 캠핑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4시가 다 되어갔을 때였다. 캠핑장 입구 게이트는 다시 굳게 닫혀 있어서, 주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후 걸어와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일이 마무리되어 정말 다행이다’ 하면서 서로 격려해주었다. 물론 나중에 비보험 의료 청구서가 날아오면 K 작가의 마음이 많이 다치겠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서로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약 두 시간 정도 잤나? 누군가가 카라반 문을 두들기며 깨웠다. J 님이었는데..

산에 가잔다.

네? 산이요? 정말이요? 술 그렇게 꼬라지게 마시고 나서 그 사건이 있었는데? 이제 꼴랑 두 시간 잤는데 산에 가자고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P 님은 이미 해장국으로 배추된장국을 끓여 놓았다. 빨리 한 숟갈 뜨고 주차장 다 차기 전에 얼렁 올라가잔다. 원망과 애원이 섞인 눈초리로 J 님을 쳐다봤더니, 슬쩍 한마디를 던진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아… J 님… 진정 당신은…

그렇게 해서 내 생애 최초 음주산행이 시작되었다. 정성스럽게 해장국을 준비한 P 님께는 매우 죄송한 일이었지만, 단 한 숟갈도 뜨질 못했다. 속에서 도저히 받아주질 않았다. 산에 올라가는 동안에도, 주변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셀카를 찍어대고 그랬지만, 난 묵묵히 앞사람 엉덩이만 쳐다보고 올라갈 뿐이었다.

광역 밴쿠버 모든 사람이 칭송해 마지않는 조프리 호수의 경치가 하나도 기억에 안 남았다. 마음속에는 계속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염불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어떻게 올라갔는지 기억도 안 나게 올라가다 보니 두 번째 호수에 도착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며 인생샷을 찍는 통나무 위에서 P 님이 갑자기 김광석의 ‘타는 목마름’을 부르셔서, 속은 메슥거리고 지친 와중에도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두 시간 반 정도 올라가니 마침내 세 번째 호수에 도착했지만, J 님은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 캠핑장 근처에서 쉬자고 한다. 세 번째 호숫가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컵라면을 먹을 때 눈치 보일 거라고… 아.. 맞다. 컵라면 먹기로 했었지.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중환자였던 K 작가가 1리터짜리 보온병을 혼자 등에 짊어지고 여기까지 올라왔었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더 가보자.. 하며 막바지 힘을 내었다. 덕분에, 터키색 호수를 바라보면서, 컵라면으로 해장을 하게 되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조프리 호수에 오르게 된 아내는 아침 내내 싱글벙글.. 그러더니 다음번에는 이곳에서 백패킹을 해보자고 은근히 옆구리를 찔렀고, 나는 못 들은 척하면서 라면에 집중했다.

BC 주의 고산 지대에는 위스커 잭 (Whisker Jack)이라고도 부르고 그레이 제이 (Gray Jays)라고도 불리는 작은 새가 사는데, 그동안 등산객들에게 어지간히 얻어먹어 와서 그런지, 사람이 손만 위로 뻗으면 자연스럽게 그 손에 내려앉았다. 왠지 심통이 난 나는 몇 차례 빈손을 뻗어 애꿎은 새를 골탕 먹여봤는데, 이 새들이 제법 영민해서 한두 번 속고는 나에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인생의 에너지원 컵라면 (좌)과 먹을 게 없자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레이 제이 (우)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나서, 2021년에는 아내의 예언대로 조프리에 백패킹을 가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거의 일 년간 등산로가 닫혀 있었는데, 마침 2021년 7월에 예약제로 다시 연다고 하는 소식을 아내가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예약에 성공했다. 마침, 그 즈음에 2차 백신도 맞았고.. 또 뜨문뜨문 편두통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나는 (항상 그래 왔듯이) 별로 의욕이 없었지만, 그리고 최근 리뷰를 읽어보니 딱 질색인 더위와 모기가 미친 듯이 달려든다고 해서 매우 매우 가기 싫었지만, 아내가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왕복 운전과 치맥을 얻어먹는 조건으로 동반하였다.

그 이전 다른 백패킹에서 어지간히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서, 햇반 대신 생쌀을, 3분 카레 대신 라면을 챙기는 등 최대한 가볍게 가볍게 준비를 했음에도, 배낭은 2킬로의 음용수를 포함해서 15킬로 가까이 나가게 되었다. 뭐.. 그래도 짐은 어떻게든 질 수 있다고 하지만, 저놈의 모기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지다가 전날 잠을 설쳤는데, 그래서인지 출발 당일에는 정말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파왔다. 근데 하필 그때, 예전 J 님의 말이 떠오르는 건 또 뭔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이번에는 어차피 캠핑을 할 거라서 오후쯤 주차장에 도착해도 괜찮았다. 거기에 등산로 진입을 예약제로 바꾸는 덕분에, 주차장을 매우 쾌적한 상태였다.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을 먼저 해결하고, 배낭을 단단히 조여 메고, 휴대용 모기향을 켜고,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출발했다. 

아내에게는 적잖이 싫은 표시를 냈지만, 사실 나로서도 지난번 산행의 기억이 전혀 없어서 한번 제대로 가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햇볕과 달려드는 모기… 그리고 모기향의 냄새 때문인지 몰라도 올라가는 내내 머리가 터지듯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인상을 쓰고 이동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건지.. 고산병인가? 등등.. 그 와중에도 경치 구경보다는 두통의 원인에 대해 생각하느라, 백 퍼센트 즐기지 못했던 건 아쉬운 일이었다.

꽤 무거운 짐을 지고 했던 산행이었지만, 그리고 두통이 계속 괴롭혔지만,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올라가서, 약 3시간 만에 캠핑장에 도착했다. 백컨트리 (Backcountry) 캠프 사이트는, 일반 프런트컨트리 (Frontcountry) 캠프 사이트와는 달리 손바닥만한 공간을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다른 공간과 구별해 둔 것에 불과했는데, 따로 번호가 정해진 것이 아닌 데다가, 당연스럽게 사이트마다 크기도 다르고, 바닥 상태도 달라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좀 비교를 한 다음 골라야 했다. 

깨질 것 같은 두통 때문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칠 즈음에는 정말 쓰러질 것 같았는데, 하지만 쓰러지더라도 텐트 안에서 쓰러져야 모기떼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이지 마지막 힘을 짜내서 텐트를 쳤다.

조프리 호수 등산로는 그늘보다 뙤약볕 길이 많다 (좌). 캠프 사이트는 이렇게 대충 바위들로 둘러싸서 경계를 만들어놨다 (우).

좀 드러누워 쉬고 난 후에도 두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저녁을 지어 먹을 거라면, 그나마 밝을 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또 주섬주섬 일어나 계곡 근처로 가서 물을 필터로 정수해 담아오고, 냄비 밥을 하고 라면을 끓였다. 

그러고 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한 단어밖에 생각이 안 났다. “역대급!! (두둥!)”. 지난 일 년간 등산로를 폐쇄했으면서 화장실을 정비를 안 했나 보구나. 게다가 이제 화장지를 비치 안 해두니 더 더러울 수밖에 없네. 그리고 보통 이렇게 더러운 재래식 화장실의 경우, 사람들이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해서 시트를 발로 밟은 채 쪼그려 앉아서 볼일을 보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럼 또 더러움의 악순환이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곳 화장실의 최악의 문제점은 청결도에 있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화장실을 캠프 사이트가 모여 있는 곳에서 멀찌감치 만들어 두었는데 (아니..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당연히 캠프 사이트는 호숫가에 만들고 싶었고 화장실은 호숫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겠지), 텐트에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수많은 바위 장애물들과 작은 계곡을 지나서야만 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캠프 사이트 근처나 호수 근처 어느 바위 뒤에서 몰래 볼일을 보는 사람들이 당연히 많아지지 않겠나? 그 상황을 보고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이제부터 물 안 마시고 참을 거야.” 나 역시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하지만.. 그 다짐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두통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자고 있던 새벽 2시 반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야간 산행을 온 일군의 청년들이 텐트를 치느라 떠드는 모양이다. 잠이 깨고 나니 급격하게 요의가 몰려왔다. 

결국, 겸사겸사 화장실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섰는데, 정말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그래도 플래시를 휘두르다 보니까 음식물 보관하는 곳도 눈에 띄어서, 대충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오르면서 화장실에 도착했다. 단언컨대, 이 밤중에 우정 화장실을 찾아 산 넘고 물 건너 와서 볼 일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었을 거야. 하지만, 오는 길에 봤던 호수에 비친 별들은 너무 근사했다.

힘든 밤 화장실 나들이였지만, 그래도 멋진 호수의 야경 (좌), 야생동물 때문에 음식 냄새나는 짐들은 높이 매달아 둬애 한다 (우).

다음 날 아침에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아내를 설득해서 아침을 안 먹은 채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밤새 매달아 둔 음식들을 챙긴 후 배낭을 쌌는데, 딸랑 한 끼 먹은 것밖에 없지만, 왠지 짐도 가벼워진 느낌이고 내리막길이기도 해서, 내려올 때는 한 시간 반 좀 넘게 걸린 것 같다. 

오는 길에 팸버튼 입구에 있는 맥도널드에 들러서 간단히 커피도 마시고, 그 옆 편의점에서 두통약도 사 먹고, 화장실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통으로 내내 고생했지만, 지난 몇 차례 백패킹을 할 때마다, 오는 길에 아내가 넘어져 다쳤던 걸 생각하면, 이번에는 아무도 안 다치고 잘 갔다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에 돌아와 먹는 치맥도 근사한 훈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튿날부터 일주일 내내, 나는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급성 간염이나, 혹은 백신 부작용으로 추정만 될 뿐… 결국 백패킹 한번 갔다 온 덕택에 일주일간 집에서 쉬어야 했다.  이쯤 되면 나에게 있어서 조프리 호수는 무슨 저주가 걸려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조프리 호수 주립공원 (Joffre Lakes Provincial Park https://bcparks.ca/parks/joffre-lakes/) : 광역 밴쿠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등산로이자, 인스타에서 가장 셀카 배경으로 많이 찍는 호수. 일명, 밴쿠버의 록키. 팸버튼 시내로부터 마운트 커리 (Mt. Currie)를 지나 릴루엣 (Lillooet) 방향으로 30분 정도 가면 인기만발의 핫플레이스임을 증명하듯이 길 양쪽으로 주차장이 보인다 (2017년 이후 주차장을 확장했다). 협소한 등산로 탓에 실질적으로 거리 두기가 불가능해서, 코로나가 터진 2020년에는 잠시 입장을 금지했다가 2021년 7월에 예약제로 전환해서 재개장하였다.

보통 주차장에서 첫 번째 호수 (Lower Lake)까지는 5분 정도, 인생샷 후보지로 가장 각광을 받는 두 번째 호수 (Middle Lake)까지는 2시간, 그리고 가장 널찍한 세 번째 호수 (Upper Lake)까지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캠핑장까지 가려면 여기서 약 한 시간 안 되는 산행을 또 해야 한다. 하지만, 캠핑장에서는 조프리 정상에서부터 이어지는 ‘마티어 빙하 (Matier Glacier)’를 바로 근처에서 볼 수가 있어서 그것도 나름 근사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전문 장비 없이 빙하에 오르거나 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특히 마티어 빙하는 해나다 점점 작아진다고 하니, 없어지기 전에 한번 보러 가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만일 캠핑을 계획 중이라면 강한 햇볕, 미친 모기떼들, 삐끗 미끄러지면 최소 무릎이나 팔꿈치를 부러뜨릴 바윗길, 그리고 영하에 가까운 밤 추위들을 다 대비해야 한다. 2020년부터 BC의 모든 백컨트리 캠핑장에는 화장지를 비치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쓸 화장지 역시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화장실 상태가 너무 열악해서, 화장실이 아닌 장소에 볼일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으니) 식수 역시, 정수기와 함께 클로린 정수 태블릿도 준비를 하자.

가까운 시내 : 팸버튼

광역 밴쿠버로부터 접근성 : 2/5

이동통신 / 데이터 : 안됨

프라이버시 : 1/5

수세식 화장실 / 샤워실 : 없음

시설 관리 / 순찰 : 1/5

RV 정화조 : 없음

RV 급수 시설 : 없음

캠핑 사이트 크기 : 1/5

나무 우거짐 : 1/5

호숫가 / 강변 / 해변 : 있음

햇볕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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