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섬을 나와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은 ‘노스밴쿠버 (North Vancouver)’라고 해서 밴쿠버 시에서 북쪽으로 다리를 건너서 가야 하는 곳이었어. 당시에도 비교적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더 부촌이긴 했었는데, 지금처럼 부동산 가격이 몇 배로 차이가 나거나 하진 않았었거든. 게다가 월세 임대 아파트, 그것도 애완견을 허용하는 후줄근한 아파트 (알고 보니, 규제가 적은 아파트 들일 수록 관리를 잘 안 하는 경향이 있더라)들의 경우에는, 당시엔 지역 별로 임대료 가격 차이가 크게 나진 않았어.
노스밴쿠버에 새로운 둥지를 틀은 거에는 딱히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단지 동네가 예뻤다… 라는 거 였어. B 섬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번 대중교통 타고 서쪽 끝까지 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온 적이 있었는데, 동네도 예쁘고 (프랜차이즈가 아닌) 아기자기한 소규모 동네 상점들도 좋더라구. 특히 ‘론즈데일 (Lonsdale)’ 지역은 경사가 심해서, 바다 건너 다운타운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밤이 되면 도시의 야경을 그대로 즐길 수 있기도 했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정부 지원으로 학교에 가기 위해선, 미리 서류를 갖춰야 할 게 꽤 많더라. 일단 관련기관에 가서 컨설팅을 받아야 했는데, 마침 예전 세미나에서 만났던 케이스 매니저 분과 연락이 닿았고, ‘BC 이민자 봉사회 (ISS BC, Immigrant Services Society of BC )’에서 만나기로 했어.
케이스 매니저가 하는 일은 클라이언트의 기존 경력이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소개해주거나 그 직업을 얻기까지 로드맵을 관리하는 것으로, 필요하면 대학 학위 프로그램을 수료하는데 필요한 비용까지 정부지원을 연결해주는 거였는데, 마치 신인을 발굴한 후 키워서 가수로 데뷔시키는 매니저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무 연고 없이 온 이민 생활에선 이런 만남 하나하나, 인연 하나하나가 아주 소중한데, 아주 운이 좋게도 정말 능력 좋은 케이스 매니저 분을 만나서, 연방정부 / 주정부의 다양한 지원정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시기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지만, 캐나다 정부가 신규 이민자의 정착에 막대한 지원을 하는 건 여전하다. 최근에 영주권을 받은 어떤 분은, 취업지원 프로그램에서 직장 면접 때 입고 가라고 옷까지 사줬다고 해)
곧이어, ISS에서 주관하는 구직 과정 (Job Finding Club) 수업을 두 달 정도 들었어. 사실, 이런 수업은 이민 온 첫 해 (섬에 들어가기 전)에도 잠깐 들었던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마다 강사마다 각각 개성이 있더라. 물론 MBTI나 커리어 로드맵, 이력서 쓰기처럼 정형화된 코스도 유익했었지만, 강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무적인 걸 배우는 건 아주 재미있었다. 이때 들었던 몇 가지를 기억나는 대로 짚어보자면;
- 캐나다 이민자가 정착하는데 보통 5단계를 거친다.
- 모든 게 환상적이고 파라다이스로 보이는 단계
- 어라?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데 – 보통 언어 때문에 겪는 첫 번째 어려움
- 어떻게는 어려움들을 극복해나가면서 스스로 자리를 잡는 단계
-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는 단계 – 구직 과정이나 직장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
- 적당히 만족하고 적당히 포기하면서 생활하는 단계. 사람에 따라 일찍 올 수도, 늦게 올 수도 있고, 몇 단계는 건너뛸 수도 있지만, 4단계를 거치지 않고 5단계에 도달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 북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평균적으로 7번 커리어를 바꾼다. 이는 직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했던 일을 접고 전혀 다른 일로 경력을 쌓는 걸 말한다.
- 캐나다 신규 이민자가 첫 직업을 가질 때까지 평균 50번의 이력서를 쓰고 5번의 면접을 보게 된다.
- 캐나다에서 대부분의 취업은 인맥을 통해서 성공한다. 이력서 한 개 더 쓰는 것보다 인맥을 한 명 더 넓히는 게 구직에 도움이 된다.
- 같은 의미로 캐나다에서는 구인을 할 때, 대개의 경우 추천인을 통해 최종 검증을 한다. 사람들과 나쁘게 헤어지는 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 인맥이 없다면 인맥을 만들어라. 사교모임에 적극 참여해라. 콜드콜 (Cold Call. 세일즈 기법 중 하나로, 아무 연고 없는 타깃 고객에게 무작정 찾아가거나 전화를 거는 행위)을 통해서 인포메이션 인터뷰 (Information Interview. 직무에 대한 정보, 구인 계획 등을 얻기 위해 대화를 하는 것) 기회를 만들어라. 인포메이션 인터뷰 시 자신의 능력이나 적극성을 어필해라. 풀타임 구직자로서 이력서와 명함을 만들어 항상 가지고 다녀라
- (종교활동이나 사교활동을 안 하거나, 성격상) 인맥을 만들기 어렵다면, 학력을 만들거나 자격증을 따라. 인사과에서 사람을 처음 뽑을 때, 추천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자격증이다. 자격증 하나가 인사과의 검증 노력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 구직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고 있는지 정보를 얻는 것이다. 구직 활동은 결국 자신을 세일즈 하는 일이라서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일이 제일 관건이다.
- 밴쿠버 회사에서 가장 적절한 출근 시간은 – 다른 동료들 출근 시간과 맞춰라
이력서, 커버레터, 인터뷰 수업 등을 듣고 나서, 이민 첫 해에 처참한 실패로만 끝났던 밴쿠버 애니메이션 업계에 이력서를 돌려 보았다. 좀 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커버레터를 팝업카드 형식으로 만들어 보기도 했고.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까지 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영어회화 능력의 한계를 느꼈고, 결국 자괴감에 빠지게 되더라.
게다가 밴쿠버 애니메이션 업계 규모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도 느껴지더라. 내가 구직활동을 했던 2년 전만 해도 ‘Studio B’, ‘Mercury Filmworks’, ‘Bardel Entertainment’ 등 메이저 스튜디오와 함께 중소규모의 스튜디오들이 밴쿠버에 많았었는데, 회사 들이 문을 닫거나 다른 주로 옮기거나 하는 경우가 많더라구. 듣기로는 캘리포니아에서 아놀드 슈바츠네거가 주지자로 선출되면서 LA 영화업계에 세제지원을 대폭 늘렸고, 동시에 캐나다 달러 강세가 지속되자, 주로 미국 방송 일만 받아서 하는 밴쿠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의 일이 줄어서 그랬다나……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는 이제 2D 애니메이션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흘러가고 있었어. 당시에 Vancouver Film School에서 1년짜리 Maya Animation 과정 수업료가 2만 불이었는데, 그 돈을 내고 1년을 투자해서 운 좋게 취직이 된다고 해도, 내 얘기가 아닌 다시 하청 애니메이션 일을 한다는 게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솔직히, 학교에 가서 영어로 수업을 받는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해. 입학을 위해 ‘토플 (TOEFL)’이니 ‘아이엘츠 (IELTS)’ 같은 영어시험을 볼 자신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다가, 아내는 예전 B 섬 도서관 사서의 소개로, 나는 그냥 동네 비즈니스 콜드콜을 통해서 인포메이션 인터뷰의 기회를 갖게 되었고, 운이 좋게 각각 그 자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아내는 근처 동네 시립 도서관에서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 (Library Assistants 사서 보조)’로, 나는 이란계 이민자가 운영하는 동네 컴퓨터 매장에서 수리 기사로 일하게 된 건데, 정말이지 너무 운이 좋았던 케이스였어.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다면 잡을 수 없었던 행운이기도 했지. 비록 아내는 파트타임이었고 나는 수습 직원, 둘 다 비정규직이었지만 한국말 통하는 한인 비즈니스가 아닌, 영어로 일하게 될 현지인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대단한 성과로 생각되었다.
아내는 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받게 되었고, 곧이어 나 역시 동네 컴퓨터 가게에서 정규직 오퍼를 받았는데, 가게 사장은 정식으로 기록을 남기는 고용이 아니라, 최저임금이 안 되는 돈을 세금 보고 안 할 수 있는 캐시 잡 (Cash Job)을 제안하더라구. 그러고는 나 보고도 취업신고를 하지 말고 국가에서 주는 실업급여를 계속해서 함께 받으라고 말하는 거야. 애초에 이런 경력에도 안 남고 그나마도 불법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지만, 도대체 나라는 인간을 얼마나 우습게 봤길래 이런 얘길 꺼내나… 까지 생각이 드니까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더라.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지만, 혹시 나중에 추천인으로 이름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관계이기 때문에, 최대한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작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