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신 포도

재수에 재수가 겹쳐서 들어간 현지 회사. 그것도 각종 보험과 혜택이 있는 제법 큰 회사다 보니까 처음 6개월은 정말 황공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물론 고객 서비스직으로 감정노동 충만한 일인 데다가, L 마트의 회사 성격 자체가 가격 경쟁력보다는 고객 서비스에 방점을 두는지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첫 6개월은 매일매일이 기적 같은 순간이었던 것 같아. 아무리 진상 고객을 만나 실랑이를 하더라도 당장 내일 또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었기 때문인지, 구직활동 기간 중 땅으로 바닥 쳤던 자존감이 금세 회복되기 시작하더라.

게다가 고객 서비스를 중시하는 회사 성격상, 주 고객층에는 이미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많았는데, 그렇다 보니 다른 소매업계에 비해 직원들을 전문가인 것처럼 대우하는 문화가 있었고, 또 나름 지역사회에서 전통이 있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름 좋은 대기업으로 알려져 있더라구. 말하자면, L 마트에 취직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축하와 격려를 많이 받게 되었다.

물론 처음 취직을 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만만치 만은 않았지. 진정 6개월 이상 버텨낼 수 있을 지가 나로서도 의심스러웠는데, 문제는 당연스럽게도 “영어”였지 뭐. 아마도 L 마트  전체 직원을 통틀어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Top 20에 꼽히지 않았을는지.

사실 그게 무리도 아닌 것이, 이민 오기 전까지 30년을 넘게 살면서 영어학원이란 곳에 단 한 번이라도 간 적이 있어야 말이지. 이민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인생을 살면서 영어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대학 다닐 때조차 영어와 관련된 교양과목들은 죄다 C, D로 마감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내가 담당해서 일하고 있는 “컴퓨터 수리기사”라는 직책이, (음침한 구석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컴퓨터 분해와 조립, 그리고 수리를 묵묵히 반복하는 일상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하루 종일 전화로 고객과 원격 기술지원도 해야 하고 (컴퓨터가 고장 난 손님들은 대개 벌써 화가 나 있거나 아주 절박한 상태다), 자기들이 고장 내놓고 바꿔달라고 따지러 오는 고객들을 상대해야 하기도 하는 등 (업계 전문 용어로 ‘PABKAC’ 이라고 한다. Problem allocated between keyboard and chair), 마치 의사들이 수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증상을 잘 들어야 하듯이 컴퓨터 증상을 꼼꼼하게 알아들어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는 입사 초기에 정말로 심각한 것이었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불평을 듣고 있다 보면, 종종 유체이탈을 해서 “아… 지금… 이 회사나 나에 대해 욕을 하고 있는 중이겠지. 이런 걸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면 자위를 하기도 했지.

어느 날은 재고 문의 전화를 받았는데, 확인도 안 하고 “오케 오케” 하다가 낭패를 겪은 적도 있다. 어느 여성 손님이 아이 넷을 안고 끌고 매장에 왔더니, 자기가 찾는 물건이 없다는 걸 발견한 거야. “아이 넷을 데리고 마트에 오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앗!!” 하는 꾸지람을 들었을 때는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더라구.

TV 등 덩치 큰 물건을 팔았을 때에는 매장에서 물품을 채우는 다른 직원들에게 사내방송을 해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후진 발음으로 사내 방송 하기가 너무 민망해서 직접 고객이 구입한 물건을 운반해주기도 하고, 똑같은 물건을 판매를 하는 경우에도 내가 할 때는 갸우뚱하던 고객들이, 입담이 좋은 친구들이 ‘구라’를 풀고 나서는 제꺼덕 제꺼덕 사는 경우를 몇 번이나 봐야 하기도 했고… 그리고, 가장 주눅이 드는 경우는 전화를 받았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사람 바꾸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때였다. 그럴 때마다, 아.. 내가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자문해야만 했어.

근데…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당장 다음 달 내 월급에서 카드 값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냥 배째라 하게 되더라.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어차피 내 영어는 이 모양 이 꼬라지인데, 니들이 어쩔 거야?’ 하는 심정이 되더라구. “내가 듣기에는 중국인, 인도인 발음도 장난이 아닌데, 한국 억양을 못 알아듣는 건 순전히 니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일거야”라는 논리로, “니들이 아쉬우면 니들이 한국 억양에 익숙해지거라” 하는 자세로 일했어. 뭐, 지금은 그래도 BTS 덕택에 한국식 억양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때는 사실 좀 무리수였었지.

다행히 내 주 직무가 고장수리를 하는 것이었어서, 그 일을 꼼꼼히 하고 있자니 (영어를 못해도) 제법 평판이 좋아졌고 또 자신감도 생기게 되더라구. 결국 나중에 가서는, 화가 잔뜩 난 진상고객의 전화 응대를 하다가 “나 말고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바꾸래 ㅋㅋㅋㅋㅋ!” 하면서 동료 동료들에게 수화기를 넘기는 걸 즐기는 뻔뻔함도 갖게 되더라.

처음엔 영어실력 때문에 딱 어떻게든 6개월만 버텨 보자 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일하다 보니 최저시급 (2005년 기준 8.5불)을 시작했지만 6개월 후 16불+a로 뛰었고, 거기서 또 1년이 지나자 동네에 입소문도 나고 그랬는지 컴퓨터 수리 커미션을 포함해서 23불 수준까지 올라갔었다.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도 내가 입사하기 전 월 200불 남짓이던 수리 매출이, 이후 5000불로 뛰어 좋아하기도 했고……

허나, 사람 심정이 간사한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매번 바뀌는 (때로는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근무시간표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고객불만을 감당하는 게 점점 지쳐가더라구. 첫 6개월이 지나고 새해 (2006년)가 되자, 절박함이 사라진 후 찾아오는 허무함, 그리고 단순 반복 작업에서 오는 매너리즘이 찾아 오기 시작하더라.

그리고, 수리기사라는 직업은 기본적으로 힘든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어서, 이런저런 불평 불만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다 보면 너무너무 지쳐갔다. 그야말로 기가 쪽쪽 빨리는 기분이었어. 고장 난 컴퓨터를 들고 오는 손님 상대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인데, 정말 아픈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임상의사들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존경심이 들더라구.

그리고 가끔 판매를 도와주러 세일즈 매장에 나갈 때마다 느꼈던 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쓸 컴퓨터에 대해 기본적인 조사도 안 하고 판매 직원의 결정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었어. 한두 푼 하는 쇼핑도 아닌데 말이지. 물론 이건 아주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자기가 해야 할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덜컥 맡기는 모습이 나는 너무 답답해 보이는 거야 (물론 반대로, 각 제품의 장단점만 설명해주고, 고객에게 본인 판단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식의 내 판매법을 매니저는 너무 답답해 하기도 했지).

뭐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애초부터 현지인 직장에 근무하려고 했던 건, 단 한 번의 도전조차 해보지 않고 한인 사업체에서만 일한다면 나중에 후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때문이었고, 만일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고 말도 잘 통하는 직장 동료들과 같이 재미있게 일을 할 수가 있다면 뭐가 나쁘겠냐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터무니없는 고객들의 불평들을 계속 듣고 앉아 있자니, 정말이지 이가 갈리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더라구.

근데 또, 막상 다른 직장을 찾아보려니까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L 마트처럼 대우해 주는 곳을 찾기 힘든 거야. 동일 직종 대비 높은 급여와, 각종 다양한 복지 혜택 등, 일단 한번 눈이 높아지고 난 다음이 되어버리니까, 한국말이 통하고, 급여 및 대우도 맞춰 주고, 일도 조금 하고 많이 놀 수 있고, 스트레스 덜 받는… 그런 일 찾기가 어디 쉽겠냐고.. 그러다 보니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처음에 마지노선으로 생각했던) 6개월이 후딱 지나가 버리고 어쩌다 보니 급여도 올랐다.

만일.. 누군가 우리처럼 현지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얌전히 월급 받고 사는 것이 이민 1세대로서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면… 뭐 좋다. 그런 거겠지… 하지만, 본인들에게 자산과 열정이 있어서 시작부터 소규모 사업을 벌이고 거기에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누가 더 우위에 있고 누가 더 열등한 지를 논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해. 애초부터 일대일로 비교할 일이 아닌 데다가,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제일 좋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 나랑 같은 직장에 다녔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장래 계획이 있다면 자본금을 모아 자기 사업을 벌이는 것이었거든.

무엇보다, 주변 지인들이 한국에서 온 조기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는 어학원이니 보습학원들 사업이 너무 번창하고 있더라구. 만일 내가 아직 한국에 있었다면, “왜곡된 공교육 시스템에 기생하면서 자녀가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공포감을 부모들에게 주입해 가면서 불평등한 교육 기회를 팔고, 또 그걸 통해서 불평등한 부의 세습에 기여한다” 등등을 들먹여가며 경멸했을 사교육 비즈니스였지만, 막상 내 생활이 갈수록 피곤해지고, 한국에 있는 부모님들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경제적 지원이 절실해지고, “아놔, 어차피 현지 회사 취직은 나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해보기 위한 거였어.”, “나도 저 사람들처럼 쉽게 쉽게 돈 벌 수 있는데…” 등등 착각에까지 미치자, 왠지 팔만 뻗으면 따 먹을 수 있는 포도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거야.

현재 잘 나가고 있는 지인 어학원의 분점을 내서 운영을 할까? 아니면 논술시험 대비 보습학원을 운영해볼까? 같은 고민을 하다가, 내가 직접 세팅해준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관리해 줄 겸, 종종 지인이 운영하는 학원에 들러보았는데, 거기서 만난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보면서 ‘아… 맞다. 이래서 내가 이민을 왔지.’ 그런 현타가 쎄게 오기도 했다

 뭐… 그렇다고, 사교육 산업을 비난하는 건 절대 아니고, 내가 그럴 자격도,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걸 잘 알아. 그리고 나 역시, 주변 상황이 나를 1mm만 더 밀어 붙였어도, 그걸 구실 삼아서 주저 없이 그 비즈니스에 참여했을 지도 몰라. 그게 성공을 할 자신이 있었든지 아니든지 간에 말이지.

그건 그냥.. 면역력과 같은 거였어. 어떤 이들에겐 “하지만 현실이…”와 같은 마법 주문 한마디가 자기 손에 오물을 묻히기 쉽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나와 아내에게는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서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해 음식을 마구 퍼먹고 있는 장면으로만 보였던 것뿐이야. 그건 절대로 내가 고상해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세균에 각각 다른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해.

아무튼 이런저런 고민이 거듭되던 중, 급여가 오르고, 또 집을 사기 위해 은행 모기지를 받을 때에도 굳이 회사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안 해도 되는 대기업 직원스러운 혜택을 겪고 나니까, ‘에라… 그냥 감사히 다니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더라. 물론 그러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나고 나면 또 주말마다 이력서를 쓰곤 했지만.

그런 복잡한 마음의 나날들 중에서도 어느 하루는, 회사가 있던 동네 주 의원 (MLA, Members of the Legislative Assembly 한국의 광역의원과 비슷)이 가게에 와서 컴퓨터에 대해 물어보러 왔는데, 5년 전에 산 컴퓨터로 어떻게 최신 기능을 사용할 수 없냐고 하더라구. 한국으로 말하자면 부산시 시의원 정도 되는 양반이 동네 슈퍼에 직접 와서 컴퓨터 쇼핑을 하는 것도 신선해 보였지만, 5년 전에 산 컴퓨터를 어떻게든 써먹어 보려는 거였어. 그런 검약 정신이 나름 좋아 보이더라. 이렇게 소소한 일로 감동을 받아가면서 직장생활을 버텨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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