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프랜티스

또 다시 구직활동의 나날들. 이쯤 되니까, 그냥 내 인생은 원래 이런 거려니 하는 심정이 되더라.

일단 내가 다녔던 코스에 참가했던 학생 중에는 그때 당시 냉동회사에 적을 둔 사람이 없었어. 만일 회사에 이미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은 기초과정 (Foundation Course)이 아니라, ‘어프랜티스 기술 이론 교육 (Apprentice Technical Training) 코스’라는 걸 들었을 거야.

학기 내내 수업을 따라잡기 바쁘던 학생들이, 코스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드니까 천천히 졸업 후의 상황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지만, 여기서 태어난 백인 청년이라고 하더라도 트레이드 직업을 쉽게 잡을 수는 없더라구.

캐나다의 모든 직업들이 기본적으로 내부 네트워크 / 리퍼런스 (추천서)를 통한 채용을 선호하긴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트레이드 쪽은 정말 심하더라. 몇 년 후에 ‘어프랜티스 기술 이론 교육’ 2년차, 3년차 코스를 들으면서, 노조에도 가입되어 있고 나름 건실한 회사에 다니는 급우들과 대화를 많이 해봤는데, 이들이 냉동 트레이드에 들어온 경위를 들어 보면, 대개 아버지 혹은 다른 가족들이 끌어들인 경우가 많았다. 무슨 중세시대 길드도 아니고, 정말이지 철저하게 그들끼리만 공유해온 직업이었던 거지. 

학교를 마치고, 오전 시간이 비었지만, L 마트 근무 시간을 변경하고 싶지는 않았어. 주중 낮 시간도 구직활동에 활용하고 싶기도 했었고, 스스로에게 경제적 부담감을 줘서, 좀 더 적극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게 하고 싶기도 했어. 물론 L 마트가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하루는 이력서를 쓰거나 회사들에 전화를 걸어서 채용계획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음날엔 직접 이력서를 들고 회사들을 찾아 다니고 그랬지. 지루하기도 하고, 내 성격 역시 변죽이 좋은 편이 못 되어 이런 식의 ‘콜드콜’에는 끝까지 적응을 못한 편이지만, 그래도 이런 기본적인 걸 건너뛰면, 왠지 나 스스로 ‘내겐 이민생활이 맞지 않는다..’라는 딱지를 붙이는 기분이라서 억지로라도 해냈다. 사실 꼭 이민이 아니더라도, 아무 인맥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이렇게 성격에 안 맞는 일도 해내야 하는 경우가 많겠지.

BC 주 냉동/공조 노조에 가입한 회사 중에 광역 밴쿠버에 있는 회사들 중심으로 전화를 하고 찾아 다니고, 그 외에 구글 검색으로 또 연락처가 나온 회사들에 전화를 하고 찾아 다녔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한 백여 군데씩 이력서를 넣었던 것 같아. 달이 바뀌면 또 처음 회사부터 다시 연락을 했었어. 물론 대부분은 거절이었는데, 백인 마초 남성 중심의 직종이다 보니, 거절도 마초답게 거친 경우도 많더라.

하루는 어느 회사에 예고도 없이 직접 찾아가서 이력서를 제출했었는데, 매니저라는 인간이 그걸 찬찬히 보더니, “그러니까… 넌 이민자라는 것들이냐? (So… You meant, you are an immigrant thingy?)”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 서비스 매니저의 예의 없음에 화가 많이 났었지만, 뭐, 그 사람이야, 약속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구직자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어차피 나 역시, 갖은 예의를 다 차리면서 격식 있는 영어로 소통하는데 한계가 있을 테니, 차라리 이런 직종에서 일하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로 해버렸어, 그냥.

학교를 마치기 전부터 꾸준히 구직활동을 했으니, 이렇게 한 3개월 정도 하다 보니 결국 A 냉동이라는 이란계 이민자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연락이 오더라. 알고 보니, 사장이랑 기사 단 둘이서 끌고 가던 코딱지 만한 회사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발목을 다쳐서 일을 못하게 된 거였더라구. 그래서 당장 써먹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이력서를 받고 연락을 해봤다고 하더라. 역시나 운이 좋아서 취직하게 된 거였지. 물론 그간 발품을 팔았기 때문에 행운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만……

북미에서 이런 트레이드 직업을 할 때에는 어프랜티스 (수련생 Apprentice) 과정을 거쳐야 해. (한국에서 이런 수련생 제도가 의료계 외에도 있는지 잘 모르겠네) 어프랜티스 과정 이수 시간은 각 주의 산업인력공단에 따라서, 또 분야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지만, 2014년 당시에는 BC 주 냉동기사의 경우에는 어프랜티스 현장 경력이 4 레벨 동안 최소 7,220시간이 필요했었어. 각 레벨마다 1805시간인 셈이지.

그리고, 매년 다시 학교로 돌아가 각 레벨 별 기술이론 수업을 받은 뒤 시험에 통과하고, 마지막 4년차 레벨 시험까지 통과한 다음, 7,220시간을 채우고 소속회사의 저니맨으로부터 인증 사인을 받으면, 일단 주정부 자격증 (CoQ Certification of Qualification)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나서, 국가 자격시험 (IP Exam. Inter-Provincial Exam)까지 통과하면, 비로소 국가 인증 저니맨 (Red Seal Journeyman)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시스템이야.

 자격증을 가진 기사를 왜 저니맨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사수 없이 혼자 돌아다녀도 알아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사 정도로 해석하고 있었어. 한국의 영한사전에 의하면 ‘숙련공’이라고 번역하는데, 실제 쓰이는 의미로는 반 정도만 맞는 해석인 듯 싶다. 정작 여기 저니맨들은 ‘배울 것 다 배웠다는 자격증’이 아니라 ‘앞으로 배울 자격이 있다는 자격증’ 이라면서 자신을 낮추기도 하고 말이지.

저니맨이 되면 자기가 맡아서 하는 일에 대한 책임도 늘고 물론 시간당 급여도 훌쩍 올라가긴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많이 가지고 있으려니 비용이 많이 들고, 또 그렇다고 한 두 명만 보유하자니 전반적인 작업의 퀄리티가 떨어지거나, 아예 공사/서비스 계약을 못 따내는 경우도 있으니 계륵 같은 존재이긴 한 거야.

반대로, 어프랜티스 입장에서 보면, 저니맨이 되기 위해선 지금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 어떻게든 필요 이수 시간을 채워야 하니까 절대적인 ‘을’의 입장이 된다고 할 수 있지. 일단 그 회사의 어프랜티스로 받아들여 지기까지도 한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고, 어프랜티스가 된다고 하더라도, 회사에 따라서 근무 시간의 일정 부분만 어프랜티스 시간으로 인정해주는 회사도 있더라구. (사실 100% 시간을 다 인정한다고 해도 회사에서 손해 보는 건 없어. 단지 직원들이 저니맨이 되는 걸 최대한 늦추려고 하는 이유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회사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학교에 안 보내주는 경우도 많은데, 그럼 오버타임을 해서 각 레벨 이수 시간을 다 채운다 하더라도 언제까지 하위 레벨의 급여를 받을 수밖에 없는 거야.

물론 급여는 회사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지역 냉동 노조 급여 수준에 맞춘 각 레벨 별 통상임금이란 게 존재하거든. 근데 다음 레벨로 올라가려면 매해 학교로 돌아가서 2달 정도 걸리는 기술 이론 교육을 이수한 다음 레벨 테스트에 통과하는 게 필수적인데, 말하자면, 월급 올려주기 싫어서 학교에 안 보내주는 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거지. 작은 회사 같은 경우 바빠서 못 보내주는 걸 수도 있지만.

게다가 이런 트레이드 직업은, 일감을 받아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당 근무 시간이 정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계절에 따라서 (냉동/공조 일은 여름에 정신 없이 바쁘고 겨울엔 한가한 경우가 많다), 혹은 다른 이유로 일감을 못 받으면, 생활도 생활이지만 어프랜티스를 마치는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는 경우가 태반 이더라구. 학교에서 이런 속사정을 못 듣고 학업을 마쳐서 나중에 꽤나 놀랐었지.

결국 어프랜티스에서 저니맨으로 성장하려면 회사와의 친밀한 관계가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억울한 상황이 있더라도 회사의 종처럼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의 방위산업체에서 일하거나 대학 교수 연구실에서 일하는 대학원생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은 심정이었다.

내 경우에는 회사 규모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현장 경험과 어프랜티스 시간을 쌓아야 하는 상황이었거든. 그래서 A 냉동 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하루에 4시간 이상 시간을 못 받고, L 마트에서 받는 급여보다 훨씬 적게 받았지만 일단은 시작해야 했어. 이렇게라도, 당장 1년이라도 현장 경력이 생기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구직활동이 훨씬 쉬워질 거라는 생각이었어. 그랬더니, 일단 일을 해보고 나서, 같이 손발이 맞을 것 같으면 그때 어프랜티스로 등록해주겠다고 하더라구. 뭐, 그렇게 튕길 것 같아서 어프랜티스를 채용할 경우 회사에서 얻는 세제혜택 같은 정부 안내서를 프린트해서 가져갔건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

이거 딱 보니, 애초에 비즈니스 세금을 제대로 신고 안 하는 회사거나, 최저임금 노예로 부릴만한 이민자를 찾는 회사거나 둘 중 하나같다는 촉이 오는 거야. 그래도, L 마트에 대한 심각한 혐오감 때문에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막상 사장은 하루에 4시간 정도 밖에 일을 보장해줄 수 없다면서 L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계속 일할 것을 나에게 권유하더라구. 아놔.

냉동 어프랜티스 첫날, 회사 차량도 없이, 유니폼도 지급을 못 받은 채, 어느 식당 냉동고를 설치하는 걸 도와주러 갔었어. 기본적으로 내 차를 몰고 사장네 집 앞까지 가서 주차를 해둔 후, 사장이 운전하는 서비스 트럭에 타고 이동을 했다. 마치, 감독 어깨너머로 배우는 연출부처럼…  배운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잔소리도 많이 듣게 되더라.

근데 생각해보면, 남들을 가르치거나, 자기가 잘난 걸 떠들어 대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어프랜티스를 두는 것 같은 성가신 일을 안 했겠지. 자기 몸이 힘들어도 자기가 직접 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잖아, 왜… 그렇지만, 그럴 경우 나 같은 사람은 어프랜티스 시간을 채우거나 기술을 배울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할 테니, 이 정도 잔소리 듣는 건 어프랜티스의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은 동네 맥도널드 매장 건물 옥탑에 있는 공조시설 콘덴서 봄맞이 대청소, 그 다음 날은 다른 맥도널드 지점의 냉장고 청소 등, 시키는 거 그대로 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첫날 이후로도 꾸준히 스케줄을 주긴 하더라. 학생 때 알바로 이삿짐이나 막노동 며칠 했던 걸 제외하면, 이런 육체노동을 아예 직업으로 한 적이 없어서 나름 걱정이 들었었는데, 생각보다 잘 해냈던 것 같아.

하지만 이렇게 하루에 4시간 정도씩만 일해서 (작은 회사라 어쩔 수 없었지만) 언제 시간을 다 채우나… 하는 걱정은 언제나 있었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내에게 큰소리쳐둔 것도 있고, 예전부터 은근히 블루칼라를 동경해오던 책상물림의 허영 같은 것도 있어서, 몸이 조금 힘들어도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했어. 집에 오자마자 무엇보다 먼저 샤워를 하며 그날 하루의 먼지와 스트레스를 씻어내야 했지만 말이야.

한국에서의 군생활, 사회생활.. 뭐 그 이전에는 학교에서도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했던 것 중 하나는, 조직 내 위계를 이용한 농담이었어. 예를 들어, 회사에서 부사수한테 뭔가를 가르쳐 주고 나서, 종종 “야, 너, 나한테 커피 한잔 빚졌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 있잖냐, 왜. 근데, 그게 진담이면 물론 향응제공을 강요하는 폭력이 되는 거고, 농담이라 하더라도 사수 입장에서나 농담인 거지 그게, 부사수 입장에서는 어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 사실, 이런 식의 장난의 불평등은 수직적 체계를 가진 어느 조직에서나 볼 수 있었지. 근데, 한국을 떠나고 나서 두 번 다시 안 볼 줄 알았던 그런 폭력적인 농담을 캐나다 트레이드 일을 하면서 다시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3개월 정도 지나서, 어느 정도 몸도 익숙해지고 사장 성격도 파악이 되자, 넌지시 A 냉동의 어프랜티스로 공식 등록해달라고 요청했더니, 대뜸 낄낄거리면서 뻗대다가 앞으로 한 달간 커피 사라고 하더라구. 이건 뭐, 사람 약점을 잡고 흥정하는 유괴범도 아니고 말이야. 정말 그 징그런 얼굴에 주먹을 냅따 꽂고 싶었지만, 그냥 나도 따라 웃으면서, 내가 미리 다 준비해온 서류에 사인을 받아냈다.

노스밴쿠버를 베이스로 하고 있던 A 냉동의 주 고객은, 맥도널드와 팀 호튼과 같은 패스트푸드 식당 중 몇 군데 프랜차이즈 지점, 그리고 노스밴쿠버와 다운타운 밴쿠버에 있던 몇 개의 소규모 레스토랑들, 혹은 다른 종류의 이란계 사업체들이었고, 그 비즈니스들의 냉장고 수리 및 정비, 에어컨의 수리 및 정비를 맡고 있었어.

따져보면 이렇게 고객들이 크고 작은 사업체 모두 합쳐 50군데 정도 되었는데, 처음엔 달랑 2명이서 일하는 이런 마찌꼬바 같은 작은 회사에 제법 많은 고정 고객들이 있는 것이 마냥 신기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일 년에 약 2,000시간 일을 한다고 계산했을 때, 각 고객 당 매 분기 10시간 이상을 채워야 하는 시간이어서, 분기별 4시간 정도의 정기점검 외에 따로 고장수리 일을 하지 않는다면 회사 유지가 안 되는 고객 수였더라구.

그렇다 하더라도, 꾸준히 일을 만들어 오고 나한테 일감을 나눠주는 R 사장의 능력은 뭐,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 비록 일주일에 20시간 내외로 밖에 시간을 못 받기는 했지만, 작은 회사 특유의 시스템 – 역할 분담 없이 각 개인이 모든 걸 다 잘할 줄 알아야 하는 – 덕택에, 그 회사에서 일 년 남짓 일하는 동안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은 걸 배우게 되었다. R 사장 역시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나에게 번번이 “네가 만일 큰 회사에 입사했으면 처음 2년간은 에어컨 필터만 교체해야 했을 거야” 라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고 말이야.

한여름 바쁜 시기가 끝나자, R 사장은 사업을 하느라 십 년간 못 가봤다는 이란 부모님 집에 갔다 오겠다고 훌쩍 떠나더라. 그리고, 회사 서비스 콜은 일년차 어프랜티스인 내가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 왔어. 지금 생각해도 그 인간이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갑작스럽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 3주간 혼자서 일 많이 하고, 주말과 야간에는 당직 대기 일도 하면서 사고도 많이 치고, 또 그만큼 뼈저리게 배웠다.

꼭 냉동 기술이 아니더라도, 고장 진단에 있어서는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증상 (사람으로 치자면 고열, 복통 등)이 있고, 또, 어떤 특정 원인의 전형적인 증상 (사람으로 치자면 황달 등)이 있잖냐, 적어도 이런 전형적인 증상에서 특정한 원인을 추측하는 경험은, 이때 3주간의 당직 기간 동안 수많은 실수를 하면서 많이 익히게 된 거지.

냉동/공조기술 회사의 경우, 배관공이나 전기 공사 업체와는 달리, 설치 및 고장 수리 외에도 정기 점검 (PM, Preventative Maintenance) 계약이 있어서 비교적 작은 회사도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한 편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고정고객 이탈을 막는 것은 비즈니스에 있어서 항상 중요한 일일 텐데, 기존 고객들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참 신기하더라구.

물론 대부분의 고객이 이란계 동포 (?) 들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고, 또 사장이 직접 하는 일 조차 언뜻 봐도 그리 꼼꼼하게 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고정 고객이 유지된다는 건, 아무래도 R 사장의 접객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줘야 하는 부분이었지. 그리고 또, 캐나다 특성상 한번 서비스 업체와 정비 계약을 맺고 나면 별 큰 사고를 치지 않고서는 꾸준히 같이 가게 된다는 경향 때문도 있지 않았나 싶다.

남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R 사장과 같이 일하면서, 냉동기술 외에도 많은 걸 알게 되었는데, (커다란) 서비스 차량 운전 기술에 대해 꼬치꼬치 잔소리 해댈 때에는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핸들에서 양손을 떼서 입을 틀어 막고 싶었지만, 그가 얘기하는 ‘이란’이라는 나라와 이란계 이민자들의 캐나다 이민 역사와 같은 건 아주 흥미롭더라. 이후에 만난 다른 이란계 이민자들에게도 비슷한 걸 느꼈지만, 이들이 얼마나 팔라비 왕조를 그리워하는지, 현재 이슬람 공화국의 압정에 대해 얼마나 노여워하는지를 듣게 되면, 실제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과 자유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왕정이나 공화정, 시민혁명에 대한 선입견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어.

79년 회교혁명 전후로, 개발 우선 주의 – 친서방 외교를 앞세웠던 팔라비 왕정 하에서 부를 누리던 많은 자산가들이 향한 곳이 이곳 밴쿠버였어. 밴쿠버에서 한국계 이민자들이 모이면, IMF 즈음에 밴쿠버로 건너온 삼미그룹 회장 아들 얘기를 가끔 하곤 했는데, 회교 혁명 시 이민 온 이란의 자산가들은 그 정도 규모가 아니라 마치 이재용 급의 재벌 수백 명이 온 것과 같아서, 그 중 몇 명만 꼽아도, 한 사람은 캐나다 전체 각 공항시설 앞에 주차장 (Park’n Fly)을 만들어 현재도 영업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당시 캐나다 전체에서 가장 큰 전자제품 양판점 체인 (Future Shop, 캐나다의 전자랜드 같은 양판점으로 이후 미국 Bestbuy에 매각. 그 전자제품 매장 체인을 실질적으로 운영 책임을 맡았던 회장 조카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Expedia를 거쳐 현재 Uber의 대주주 겸 CEO로 활동하고 있다) 을 만들어서 운영했더라구.

A 냉동 회사에서 일했던 1년여 기간은, 가장 많은 걸 배우고 그만큼 일에 대해 재미를 느꼈던 때이긴 했지만, 동시에 오전, 오후에 각각 다른 회사를 다니느라 너무나 바빠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신경을 못 쓰던 때이기도 했어. 일하는 동안 많은 상황에서 혼자 책임을 맡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때문에 몸이 아프거나 해도 쉽게 일을 빠질 수가 없었어. 특히 15년간 같이 살던 강아지를 먼저 떠나 보내야 했을 때에도, 슬픔에 빠져있던 아내를 그냥 집에 둔 채 나와서 일을 해야 했던 건 한동안 후회로 남았지.

한편으로는, 오후와 주말에 다니던 L 마트에서의 노동조건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고, 그런데도 계속되는 경영진의 헛발질을 지켜보고 있자니 회사에 대한 염증이 너무나도 심하게 들었었어. 애초에 L 마트에서 컴퓨터 수리 기사로 일하는 것에 전혀 미래가 없어 보여서 학교도 가고 구직활동도 했던 것이었는데, 새로 구한 직장이라는 곳이 규모가 너무 작아서 일감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L 마트 생활을 청산 못하고 있자니 왠지 엄청 서글퍼지더라.

당시 A 냉동에서 견습생으로서 받은 급여는 L 마트 컴퓨터 수리기사로 일하면서 받는 시간당 급여보다 형편없이 작았고, 다른 회사의 같은 어프랜티스 일년차가 받는 급여보다도 낮았었어. 그동안 날 믿고 일을 많이 맡겨온 것도 있고, 종종 나에게 저니맨급으로 일한다고 칭찬하던 것도 있고 해서, 하루는 맘 먹고 R 사장에게 급여 인상을 요구했었지.

소심한 성격 탓인지, 아니면 남한테 돈을 밝히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려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단지 경험이 적은 건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회사에 급여 인상을 요구하는 행위가 아주 곤혹스럽더라구. 그때에도 몇 번을 주저하다가 힘들게 얘길 꺼냈던 것이 기억난다. 왠지, 일은 저니맨급으로 하면서 돈은 일년차 수준도 제대로 못 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억울함이랑, 너무나도 힘들게 구직활동을 하다가 어렵게 일을 배울 기회를 얻은 지 일 년도 안되었다는 고마움이랑 격한 충돌을 일으켰던 것 같아.

아무튼 R 사장의 대답은 어프랜티스 일년차에게 더 이상 급여를 올려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면 다음 레벨 (2년차) 공부를 할 수 있게 (학비 지원은 바라지도 않고) 학교라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내가 학교 간다고 두 달이나 빠지면 회사는 어떻게 하냐는 답변만 들었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정말 악덕 사장 밑에서 바보같이 시달리고 있었군).

그러고 나선, 자기가 보기엔 내 실력 정도면 ‘챌린지 시험 (해외에서 경력과 자격증이 있는 이민자 대상으로, 학교에 가지 않고도 캐나다 자격증을 딸 수 있게 하는 시험으로, 해외 경력 증빙이 필요하다)’을 쳐도 충분히 합격할 것 같으니, 한국에 있는 아무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위조 경력 증명서를 만들어 오라고 하더라. 나 참……

가뜩이나 저임금에 착취당하고 있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는데, 저렇게 탈법을 종용을 받고 있자니 모든 상황이 순간적으로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더라. 이때가 A 냉동에서 일 년 정도 일했을 때였고, 일 년이지만 나름 경력이랍시고 내밀 수 있는 것도 생긴 터라 다시 구직 활동에 전념했지, 뭐.

그러다가 하루는 맥도널드 매장의 냉장고들을 정비하고 있자니, 거기에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계만 전문적 으로 정비하는 회사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 나는 매장 전체에 있는 십여 개의 냉장고와 지붕 위 에어컨 네댓 개 정비를 4시간 동안 후딱후딱 마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아이스크림 기계 하나만 가지고 세 시간 동안 꼼꼼하게 정비하는 걸 보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까 왠지 제대로 된 회사에서 제대로 된 프로토콜 대로 일하는 것 같아 부럽더라구.

얘길 듣자니, 그 회사, D 식품이라는 회사는, 특정한 T 냉동회사 기계 만을 독점 계약해서 서비스 용역을 하는 회사였는데, 사실 그 T 냉동회사가 맥도널드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패스트푸드 식당과 편의점에 소프트 아이스 크림 기계, 슬러시 기계, 햄버거 그릴 등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제조사였기 때문에, 여름이고 겨울이고 일감은 넘쳐나도록 많고 사람은 수시로 뽑는다고 하더라.

다음날로 이력서를 제출했고, 일주일 후에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창립한 지 100년이 되었다는 회사 치고, 내 주변에 아무도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처음엔 너무 신기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정도로 전통 있는 (가족이 운영하는) B2B 중소기업 들이, 사실 다른 나라에는 참 많았더라구.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겪은 한국에서만 어려운 일이었던 거야.

2차 면접 때는 예고도 없이 쪽지 시험도 봤지만, 수십 년간 익혀온 시험 보는 기술 덕택에 이번에도 매니저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하하, 이어서 채용 통지를 받았다. 급여는 일반 일년차 어프랜티스보다 조금 높은 수준 이었는데, 학교에서 2년 차 과정을 마치고 오면 (물론 학비도 대주고) 금방 인상해주겠다는 약속도 해주더라. 이제 현장 작업은 죄다 나한테 맡긴 후, 자기는 사무실에서 경영에 전념하려던 A 냉동의 R 사장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 되어벼렸지만, BC 노동법에서 규정하는 최소한의 시간 (2주) 만을 주고 나서, 곧바로 이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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